나에게 시간을 쓰는 일
나를 챙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핑계는 수만 가지. 돈 버느라 바빠서 애 키우느라 바빠서 몸이 아파서. 어떤 우선순위에 밀려서 내 몸과 맘은 늘 뒷전이다.
얼마 전 퇴사한 회사의 팀원들을 만났다. 하나는 퇴사, 하나는 이민을 간단다. 오랫만에 만나 삼겹살에 폭탄주 말아먹고 2차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팀장 팀원 이런 거 없이 '밤의 여자들'이 된 우리들은 옆 테이블 생일 축하 파티에 노래도 불러주고 어깨도 들썩이며 잠시 '나'를 잊었다. 그러다 불쑥 나는 이민을 간다는 팀원에게 그래도 서른다섯이면 판을 새로 짤 수 있는 나이라 이야기했다.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달라지니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래, 서른다섯이면 판을 새로 짤 수 있는 나이지. 기회가 오면 바로 낚아채 일어날 수 있는 나이.
<신호>, 존 윌리엄 고드워드
그러다 문득 나는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다섯에도 판을 새로 짜는 게 과연 가능할까.
망설이다가 보낸 30대, 참다가 보낸 40대.
40대 중반이 되니 몸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새로 시작한 일에다 남편의 정리해고 이슈까지 더해져 위가 꼬였나 보다. 맵고 짠 음식에다 술을 들이부은 탓. 거기다 노화까지 더해져 몸이 sos를 보냈다. 뒤틀리는 배를 움켜쥐고 가서 처방받은 약도 소용없었다.
걸어야 산다는 선배들의 말이 떠올랐다. 점심 시간 후에 여의도 공원을 미친듯이 걷던 부장님들 생각도 났다.
죽 몇 숟가락도 아플까봐 먹지 못하다 며칠 약을 들이붓고 나니 천천히 나아가는 중이다. 혹시 몰라 다음주에는 위 내시경도 예약해두었다.
중년의 삶은 아프고 찔리고 뒤틀린다. 프리랜서라 시간은 많은데 나한테 정작 쓸 시간은 적었다. 다 제껴두고 우산을 들고 뒷산에 올랐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힘이 없을 거란 내 신념은 고작 내 생각에 불과했나 보다. 오히려 걸으면 걸을수록 맑아졌다.
걷자. 새 판을 짜는 것보다 내 마음과 몸에 시간을 쓰자. 걷다 보면 또 용기도 생기고 새 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할 용기, 또 살아낼 용기는 생길 테니까. 45년 동안 혹사시켜 '고만 좀 쳐먹어'라고 외치는 위를 위해서라도 덜 먹고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