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29
"오! 맛있겠다. 아빠는 라면 참 잘 끓여."
"(가스불을 가리키며) 뭐 내가 끓이나. 얘가 끓이지."
"아니 그래도 아빠가 물도 맞추고 면발도 보고 그러잖아."
"그렇지. 라면 물도 못 맞추는 놈하곤 만나지 마. 그것도 하나 못 맞추면서 뭐는 딱딱 맞추겠냐?"
"응? 갑자기?"
겨울방학 중 어느 낮, 점심은 너구리 순한 맛이었다. 가난할 때 많이 먹은 건 신물 나서 안 먹는다던데 어떻게 된 게 라면은 먹는다. 수제비는 수십 년 안 먹었는데 감독이 두현 저수지 앞에 있는 진부령 황태에서 얼큰 수제비를 사 준 뒤로는 감독과 가끔 먹으러 간다. 숙취 해소에 최고다.
아내랑 연애할 때부터 면요리는 꼭 내가 했다. 지금도 맡겨 놓으면 불안하다. 딸의 면 요리도 내가 다 해줬다. 소면, 쫄면, 냉면, 각종 파스타, 골뱅이 무침에 라면까지. 아내는 면 요리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 년에 라면을 서너 개 먹을까 말까 한 사람이었다. 자기 말로는 빵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던킨 같은 도넛도 나랑 연애하면서부터 먹기 시작했다.
국수와 파스타, 도넛 맛의 기준과 기억은 평택 시절의 것이다. 이십 대 시절, 평택에 살 때는 아무 국물에나 소면을 말아먹었다. 어머니가 담그신 열무김치나 물김치가 적당히 익으면 거기에 소면을 삶아 말아먹었다. 다른 간도 하지 않았고 그냥 시원한 맛에 먹었다. 비빔국수가 먹고 싶으면 어머니한테 장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비빔면의 종류가 많지 않았고 비빔장이 시판되기 전이라 어머니의 비빔장이 그 맛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미군부대에서 파스타 소스를 잔뜩 사 오시면 면만 삶아 넣어 먹었다. 기지촌엔 미트볼이며 각종 소시지 종류가 흔했기에 대중없이 아무것이나 넣어 먹었다. 제법 파스타 만들기에 자신이 붙어서 교회 후배들에게 해준 적도 있었다. 도넛도 당연히 미군부대 앞 가게의 맛이 기준이었다. 그 집의 도넛과 인테리어는 던킨 도넛과 똑같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던킨 도넛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던킨 도넛이 막 유행하기 전부터 미군 부대 앞에서 던킨 도넛과 똑같은 도넛을 팔던 그 가게는 던킨 도넛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난 그 사실을 아내와 연애한 후에야 알았다. 부산에 있는 던킨 도넛에서 도넛을 먹었는데 모양과 맛이 살짝 달랐기 때문이다. 원래 내가 먹던 것이 더 진한 맛이었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물어보니 미군 부대에 납품하던 도넛 회사에서 그 기술을 익힌 분이 미군들 입맛을 기준으로 도넛을 만들어 왔던 것이라고 한다.
라면은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끓여 먹었다. 쌀이 떨어져서, 간식이 없어서, 그게 제일 싸서 그렇게 매일 끓여 먹었다. 라면에 넣을 파나 김치, 여타 다른 재료들은 없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우리 집에 냉장고가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서 뭔가를 꺼내 먹거나 보관된 채소를 사용하는 일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덕분에 라면 하나는 누구 못지않게 잘 끓이게 됐다. 그 탓인지 대학 시절, 기숙사에서 후배들이 끓여준 짜파게티를 먹기 전까지 난 남이 끓여준 라면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이후에도 역시 없고.
은채가 크면서 내 라면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한 입만 달라거나, 무슨 맛이냐며 물어봤다. “넌 매워서 못 먹어.”하면 이내 포기했다. 소면을 삶아서 간장과 참기름에 비벼 먹는 간장 국수가 은채의 거의 유일무이한 면 요리였다. 두세 살쯤 됐을 것이다. 하도 라면을 먹고 싶어 하기에 무슨 라면을 끓여주면 가장 순하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퍼뜩 생각난 것이 <사리곰탕면>이었다. 끓여 줘 봤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나도 안 매우면서도 라면 고유의 감칠맛이 살아 있는 이 면을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때부터 별미로 먹기 시작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진라면>도, <너구리>도 순한 맛이 있었다. 두 라면과 함께, 매운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위대한 라면과의 동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언젠간 여행 갈 때 컵라면을 몇 개 싸가서 <튀김우동>을 줬더니 왜 이렇게 맛있는 걸 이제 줬냐며 화를 내며 먹었다.
부산의 밀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엄마와 밀면 하나를 나눠 먹었다. 그러다 다섯 살 때쯤인가, 집 근처 유명 맛집에 가서 난 비빔, 은채는 물밀면을 시켰다. 내 작전은 내 비빔밀면을 재빨리 먹어치우고 은채가 남긴 물밀면으로 입가심하는 것이었다. 그런 내 구상은 그야말로 구상에 그쳤다. 은채는 육수까지 드링킹 했다. 그 이후, 최소한 밀면만큼은 1일분의 삶을 살게 됐다. 그야말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 들었다. 평생 면 요리를 해줘야 할 여자가 하나 더 생겼지만 돌이키기엔 늦었다. 그렇게 평생 면 요리 동반자가 생겼다.
결국, 딸은 나만큼 면 요리를 좋아하게 됐다. 그건 또 왜 아빠를 닮았냐는 엄마의 타박이 신경 쓰여 되도록 밀가루 음식을 안 먹이려 노력하지만 그게 또 쉽지 않다. 여름만 되면 밀면 먹으러 가자고 조르고, 선선해지면 집 근처에 있는 물총 조개 칼국수 집에 가자고 한다. 해산물이 흔한 동네니 마트에서 싱싱해 보이는 바지락이나 새우를 보면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해달라고 한다. 초여름에 나온 햇마늘을 아내가 정성스럽게 얇게 썰어 건조기로 말리는 냄새가 집안에 진동하면 은채는 또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떠올린다.
외할머니가 물김치를 맛있게 담가 보내주시면 얼른 익어 그 국물에 소면을 말아먹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여름엔 메밀국수를 잔뜩 삶아 간 무와 고추냉이, 잘게 썬 파를 시중에서 파는 가다랑어 장국에 넣은 뒤, 면을 푹푹 적셔 먹는 것도 좋아한다. A4 용지보다 더 큰 접시를 덮을 만큼 수북이 면을 쌓아 놔도 부녀의 쉴 새 없는 젓가락질에 금세 사라진다.
“아빠, 우리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냐?”
“야, 면은 돌아서면 배 꺼져.”
이것이 여름날, 부녀의 단골 대화다.
그렇게 딸 때문에 면을 삶고 라면을 두 개 끓이는 날이 많아졌다. 십 년 전엔 없던 사람이 “아빠, 내가 면치기 보여줄까?”하면서 후루룩 거리며 국수와 파스타를 먹는다. 나랑 마주 앉아 드라마를 보며 라면을 먹는다. 김치 한 조각과 면을 정성스럽게 말아 들어 올려 맛있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