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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되는 사람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30

by 최영훈

한 겨울, 등굣길 딸과의 대화

아이들은 방학 때도 바쁘다. 아빠의 어린 시절처럼 집에서 뒹굴 거리거나 동네를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을 코 앞에 두고 밀린 숙제나 해가면 되는 방학은 이제 없다. 대부분의 학원 방학은 일주일에 불과하고 숙제를 위해서든 눈치가 보여서든 어디로든, 길게든 짧게든 여행을 가야 한다. 게다가 학교의 방과 후 교실도 계속 운영된다. 결국 방학 때도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줬다.


집과 학교 사이에 유엔 로터리가 있다. 여섯 개의 차도가 교차하는 곳이어서 은채가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4차선의 차도이다 보니 이래저래 걱정이 되어서 1학년 때부터 데려다주게 됐다. 3학년을 앞두고 있던 겨울 방학의 어느 날 오전, 두 번째 보행신호 앞에서 딸이 물었다.


"아빠, 나 이제 3학년 돼. 3학년 되면 나 혼자 가게 해준다며."

"그랬지. 근데 저런 미친놈 때문에 안 돼."

마침 노란색 학원 승합차가 보행 신호 무시하고 지나갔다.

"아니. 내가 스마트폰 보다가 저런 차를 못 보겠어? 폰도 꺼서 가방에 넣어서 가잖아."

"넌 믿지. 저런 인간들을 못 믿어서 그렇지."

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불쑥 말했다.

"이게 다 재하 때문이야."

"아. 아빠가 재하랑 같이 보내려고 했었지?"

"응 그 집 형제 다부져서 보디가드 삼아 같이 보내려 했더니만."


두 형제는 교육을 위해 하동으로 이사 갔다.

재하의 형은 은채보다 몇 학년 위에 다녔기에 더 믿음이 갔던 형제였다.

"아빠, 나 1학년 때, 방송 댄스 할 때. 재하가 나 끝나길 기다렸다가 맨 날 괴롭혔다."

"그렇지.. 후후... 그래서 재하랑 보내려고 한 거야."


다부진 재하가 그립다.

재하는 어린이집 시절부터 은채 바라기였다. 은채를 데리러 가면 은채가 나오기 전에 은채의 신발을 찾아 앞에 내놓곤 했다. 데리러 온 날 보면, 어린이집 마당에서 놀다가도 얼른 교실로 들어가서 은채를 불러줬다. 집도 가까웠다. 만나서 함께 학교 가기 딱 좋은 거리였다. 어린이집 행사에서 우연히 재하 어깨와 팔을 만져보니 딴딴함이 느껴졌다. 성격도 몸도 다부진 녀석이었다. 이 형제와 함께라면 초등학교 내내 든든하겠다 싶었다. 그런 형제가 1학년 말에 갑자기 하동으로 이사를 가버린 것이다.

"아빠, 맨날 이렇게 데려다주면 내가 친구 못 사귀어."

"뭔 소리야. 네 친구들은 학교 앞 아파트 단지 하고 길 건너 동네에서 다 오잖아."

"그렇긴 하지. 그렇다고 평생 나 데려다 줄 거야?"

"야. 마음 같아선 평생 데려다주고 싶지. 평생."

이 부분에서부터 딸이 할 말을 잃었다.

"차라리 네가 집에 있으면 아빠가 집중이 되는데 네가 학교 가면 잡 걱정이 생겨서 일이 안 돼."

"아 그래?"


처음 걱정되는 사람

솔직히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걱정해 본 적이 없다. 나랑 사귀었던 몇 안 되는 여성들 대부분이 나보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했고, 잠시 한 눈 팔면 남자들이 접근할 만큼 미녀가 아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내랑 연애할 때도, 결혼하고 나서도 아내를 크게 걱정한 적이 없다. 해외로 세미나와 연수, 출장을 가도 전혀 걱정을 안 했다. 남자 동기가 낀 대학원 동기들과 삿포로 여행을 갔을 때도, 처제 친구들이랑 오사카로 여행을 갔을 때도, 결혼도 하기 전에 나도 안 가 본 미국 어머니 집에 여행 갔을 때도 아무 걱정 없이 흔쾌히 갔다 오라고 했다.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회사 회식이나 각종 모임으로 귀가 시간이 늦어져도 전화나 문자를 기다린 적도 없고, 내가 먼저 연락한 적도 없다. 잠들기 전에 연락만 하면 외박을 하고 온다고 해도 딱히 개념치 않았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자기 돈으로 자기가 자고 오는 건데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도 모양 사납지 않나? 허름한 모텔이라면 또 모를까 보안시설 좋은 깔끔하고 번듯한 호텔에서 잔다면 오히려 두 다리 뻗고 편안히 잠들었을 것이다. 남에 돈으로 자고 와도 마찬가지였을테고.


이게 무슨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사랑의 힘 같은, 고상한 철학 따위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사람 인연에 매달리지 않는 철없는 마음이거나 두 발 달린 짐승이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다 알길 없고, 알 수도 없고, 그것도 지 팔자라는 생각 때문이었거나,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 일 것이다. 물론 아내의 생각은 나와 달라서 난 지난 이십 년간 혼자 밖에서 자고 온 적은 없다.


딸은 다르다. 만약 세상에 사랑의 종류가 하나밖에 없고 지금 딸한테 향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미안하지만 과거의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랑의 종류를 발명해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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