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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ug 08. 2022

사랑은 우주만큼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70

사랑은 무한대

크리스마스가 3일밖에 남지 않았던 저녁, 주방에서 어묵 탕을 준비할 때 거실에 있던 딸이 뜬금없이...

"아빠 솨뢍해." 했다.

"응. 아빠도." 답했다. 

그러자 "얼마나?"하고 역사상 가장 어려운 반문을 던졌다.

"글쎄?" 그냥 무심히 답했다. 

그러자 "아빠, 이럴 때 하는 좋은 답을 알려줄게." 하며 주방으로 왔다.

"이럴 때는 무조건 우주만큼 이라고 하는 거야."

"왜?"

"아빠, 생각해 봐. 우주는 끝이 없지? 무한대지?"

"뭐... 그렇지."

"우주만큼 사랑하는 건, 무한대로 사랑하는 거야."    

 

흠... 이렇게 쉬운 대답을 이십 대 때 알았으면 연애를 몇 번 더 했을 텐데 안타깝다. 물론 요즘엔 사랑은 무한대로 있는 게 아니고 그렇게 쉽게 재고를 쌓아 둘 수 있는 게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는 나이고... 그리고 사랑도... 그만두자.


짝남의 등장

아빠에게 사랑에 대해 훈수하는 은채는 요즘 두 번째로, 짝사랑 비스름 한 걸 한다. 같은 반, 주현이라는 녀석인데 뭐, 제법 귀여운 놈인 듯하다. 은채가 먼저 "커플 할 래?" 하고 운을 띄웠더니만, 이 놈이 엄마한테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엄마가 그냥 친구로 지내라고 해서 그 뒤로 묘한 관계로 지낸다고 한다.     


은채와 여자 친구들은 주현이를 그냥 짝남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게 짝사랑하는 남자인지, 짝인 남자인지 알 수는 없다. 주현이가 엄마한테 물어봤다고 말하자 반 여자애들한테 잔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야, 넌 애가 왜 그렇게 눈치가 없냐. 응?”,“그래서 우리 예쁜 은채랑 사귈 수 있겠냐.."등등. 

애나 어른이나 남자는... 똑같다. 새삼.     

다음날, 오늘은 도서관에 들렀다 올 테니 좀 늦게 데리러 오라 했다. 코로나 때문에 도서 대출을 학년별, 반별로 시간을 정해서 하는데 자기 반 순서가 온 날이었다. 방학을 대비해서 여러 권의 책을 미리 대출했다. 최대 다섯 권까지 빌릴 수 있었다.  빌려 온 책을 훑어봤다. 동물이 주인공인 로드 무비 같은 소설, 환경 문제, 별자리로 엮은 신화 이야기, 헝겊 고양이가 주인공인 소설, 미스터리한 동화까지. 나도 참 잡다하게 읽는데 딸도 만만치 않다. 애초에 권장도서목록은 무시하고 살아온 아빠 입장에선 이 버라이어티 함이 맘에 든다.     


그날 저녁, 딸이 말했다. 결국 주현이하고 커플이 됐다고, 종이 반지를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반에서 영화를 보여줬는데 팔짱을 끼고 봤다고 했다. 한마디 했다. “너 내일부터 방학이야."

주현이는 집에 가서 엄마한테 물어볼 거라고 한다. 흠~ 역시... 남자들이란...     


크리스마스이브는 금요일이었다. 방학식이 있었다. 이번 학기 마지막 등굣길. 규랑이는 또 총총 뛰어 건너왔다. 감귤 양은 언제나 그랬듯 90도로 인사했다. 돌아서 가는 두 소녀에게 “둘 다, 오늘 건강하게 보내, 조심하고.” 어제와 같은 멘트를 보낸다. 듣는 둥 마는 둥, 두 소녀는 손을 꼭 잡고... 총총총..     


이 전 날, 미국에서 딸 선물이 카드와 함께 도착했다. 운동을 많이 하고 편한 걸 좋아하니 운동복 보내시라 했더니 그렇게 왔다. 녹색 계열 운동복이 몇 벌 왔는데. 아무래도 미국에서 유행하는 색인지도 모르겠다. 이 중 두툼한 건 벌써 입고 갔다.


지금, 행복하면 됐어

방학식이 있던 날, 등굣길, 집에서 나와 산성교회쯤 다다랐을 때 딸이 내게 물었다. 

"아빠, 만약에 아빠가 집도 좋고 막 인터넷도 되고, 가난하지도 않고, 그런 집에서 살았으면 어떤 학생이 됐을 것 같아?"

"글쎄, 아주 평범한 학생... 이런 카피라이터는 안 됐을 거야. 너 네 엄마도 안 만났을 거고, 부산도 안 왔을 거고, 그럼 너도 안 태어났겠지. 인생에 만약에... 같은 건 의미 없어. 지금이 중요한 거지."     


한 해, 카피라이터로서는 전성기를 보냈다.

글 쓰는 사람으로도 조금 더 나아진 것 같고...

공부하는 사람으로도 조금 나아진 것 같고...

아빠로서도 조금 더.... 그냥 사람으로서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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