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우연 : 세 번째 서랍 - 일상/하루
1999년에서 이천 년대 초반까지 스타벅스를 비롯한 무수한 프랜차이즈 커피 브랜드들은 1999년 스타벅스 오픈을 기점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문을 열었다. 이들 브랜드들은 대부분 주요 상가의 일층을 차지하면서 거리의 풍경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필자 역시 스타벅스를 처음 접한 것이 이즈음이었다. 다니던 대학원 강의가 그 대학이 소유하고 있던 명동의 한 호텔의 세미나 실에서 열렸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이유는 당시 명동에서 유행하던 2천 원 정도 하던 매운 라면을 먹고 커피를 마시자고 해서 따라간 곳이 스타벅스였는데 라면보다 비싼 커피를 보고 어이없어했었기 때문이다.
심심치 않게 카공족과 코피스족 때문에 개인 카페 창업자들이 힘들다는 하소연이 기사화된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처럼 공간이 넓은 것도 아니고 테이블도 많지 않으니 몇 사람이 공부를 한답시고 몇 시간씩 앉아 있으면 작은 카페 주인으로써는 당연히 고역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21세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스타벅스가 한국에 진출한 건 1999년인데 카공족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건 그 뒤로도 한참 뒤인 2015년 봄부터이니 말이다. 그럼 그동안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어떤 역할을 했던 걸까?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 위계, 위계적 상징 역할을 했다.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명품 열풍, 김영삼 정부의 95년 5.31 교육개혁안, 그로 인한 대학의 급격한 증가와 100퍼센트에 육박하는 대학 진학률, 그리고 94년부터 시작된 중앙일보의 대학 평가와 뒤를 이은 유명 일간지의 대학 평가, 이를 통한 적나라한 대학 서열화. 이런 대학으로의 시장 경제적인 자율 경쟁 도입은 IMF를 맞아 오히려 더 심화됐고 대학들은 대학평가와 취업률에 더 목 메달 게 된다. 이런 현상이 커피 브랜드와 무슨 상관일까?
앞서 말했듯 우리 대학들은 9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이념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에서 지적한 일본의 70년대가 한국에선 90년대에 재현된 것이다. 86 아시안 게임과, 87년 민주화, 88 올림픽과 함께 들어온 글로벌 패션, 스포츠와 캐주얼 브랜드, 패스트푸드 브랜드들은 서서히 대학 문화의 진영을 바꾸어 놨다.
민주화 이후 민중 문화 운동과 그 일환으로 축제 대신 대동제라는 말을 써오면서 존재의 의미와 명분을 생산해내며 버텨오던 학생 운동 진영, 속칭 운동권이라 불리던 진영은 90년대 초반부터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후 불어온 대학의 양적 성장과 IMF 사태가 맞물린 90년대 후반부터 대학은 이념과 학문의 전당에서 자본과 사물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그 상징적 사건 중 하나가 바로 2003년 한양대 학생회의 한총련 탈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사실상 대학은 대동제에서 축제의 시기로 넘어갔고 이념이 없는 학생회는 학생 생활 밀착형 정책을 펼치거나 과시형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사물의 시대를 견뎌내기 위해 청춘들 스스로 사물이 되어야 했고, 그 사물의 가치를 만들어낼 적절한 사물로 자신을 무장해야 했다. 이 맥락에서 스타벅스는 2천 년대 초반 된장녀라는 오명을 무릅쓴 청춘들이 스스로 사물화를 완성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용한 것이다. 지금은 철수한 야후 코리아에서 된장녀를 그 해의 신조어로 선택한 것은 2006년이다.
그 이후 스타벅스와 프랜차이즈 커피점 논쟁은 과시적 상징에서 다시 공부의 상징으로 접어들었다. 왜 거기서 공부하는 걸까? 수많은 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제시했다.
‘상호 간 안심을 위해서다.’
‘백색 소음이 집중이 잘 된다.’
‘서로 보면서 공부하면 경쟁의식이 생긴다.’
여전히 그 대답은 모호하다. 그러나 대학이 사물화 되고 상품화됐다는 것. 그리고 학생은 그 사물화 된 대학의 일원이자 스스로 사물화 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대를 산다는 것. 이런 관계를 들여다보면 스타벅스에서의 공부도 그 연장선상에 볼 수 있다.
공부도 사물화 된 것이다. 공부는 더 이상 학문이 아니고 자기 정진이 아니다. 이제 대학에서의 모든 공부는 스펙으로 이어지며 그 스펙으로 귀결되는 모든 공부는 사물 화 된 인간, 시장에서 더 높게 평가받기 위한 주체의 사물화, 그 사물화를 위한 모든 과정에 불과하다. 이제 모든 공부의 과정은 SNS로 기록되어야 하고, 그 기록은 보여야 하며, 심지어 1인방 송이나 팟캐스트 등을 통해 모두에게 감시되고 평가받아야 한다. 공부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표현이며 그 결과는 그 표현의 종합체에 불과하다.
공부의 과정이 쌓인 책으로, 들인 시간으로, 스스로 선택한 유배의 시간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우리의 80년대 학번 선배들은 종종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를 했으며 전직 대통령이나 검찰의 고위 관료들 중에는 사법고시를 위해 스스로를 사찰이나 암자에 가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또는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 구석방 하나 잡아 놓고 하기도 했다. 아니면 하숙을 하면서 하거나 말이다. 입신양명, 즉 몸을 빳빳이 세울 정도로 높을 자리에 올라 태양을 정면으로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은둔과 유배, 잠적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사가의 학자들처럼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공부를 해야 했다. 그렇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공부는 침묵과 고독이 동반되는 고행이었다.
그럼 언제부터 공부는 전시된 행위가 됐을까? 그 공부의 결과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물화 된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면서부터는 아닐까? 취업 준비를 위한 공부, 공무원이 되기 위한 공부, 스펙 쌓기를 위한 영어와 자격증 공부. 이들 공부들은 자신이 선택한 전공이나 학문의 세계와는 상관없이 일종의 세상으로 나가는 하이패스에 불과하다. 카드가 자동차 어딘가에 부착되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하이패스 톨게이트처럼 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것이 사물화 된 학문, 대학, 그리고 공부를 불러왔고, 사물화 되어가는 방법을 학습하는 공간이 대학과 노량진, 그리고 스타벅스인 것이다.
난 여전히 카페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경우도 거의 없다. 아이의 일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카페에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카페에 오래 앉아 있지도 않는다. 대부분 카페에서 오래 앉아 있는 경우는 업무상 미팅이거나 동종 업계 선후배를 만나 서로의 안부를 주거니 받거니 할 때뿐이다. 그리고 맛있는 디저트를 보며 풍경 보는 걸 좋아하는 딸과 아내와 함께 카페에 갈 때뿐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다방 문화나 살롱 문화, 유럽의 살롱 문화나 공론장의 성장을 다룬 텍스트를 보면 카페는 대화를 하는 곳이었다. 물론 카페를 사랑했던 프랑소와즈 사강 같은 문인들은 그곳에서 글도 쓰고 집필 구상도 했지만 대부분의 이들에게 그곳은 대화와 토론의 장이었다. 아니 솔직히, 천재적인 문학가들은 그곳이 술자리이건, 수다를 떠는 자리이건 상관없이 영감이 찾아오면 아무데서나 글을 쓸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카페를 고집했다기보다는 그곳이 영감이 찾아오는 장소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찌 됐든, 주변 청춘들 중에도 카페가 아니면 공부가 안 된다는 이들이 있다. 거의 소음 없는 집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카피를 쓰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지만, 그들 또한 내가 이해가 안 갈 테니 이 또한 서로 그러려니 해야 하는 부분이리라. 다만 그런 카페에서 공부를 한답시고 옆 좌석에서 떠드는 이에게 눈치를 주는 유치한 짓은 안 했으면 한다. 거긴 원래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커피와 위스키를 마시면서 영감을 기다리던 곳이고, 창밖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갈 때 불쑥 스쳐가는 감정을 사로잡아 냅킨에 짧은 글을 쓰던 곳이었다. 그 글을 친구들에게 낭송해주던 곳이었고, 그 글을 소재로 열띤 토론도 불사하던 곳이었다. 이론과 이념, 이상과 현실, 나와 너와 우리, 오늘과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얘기하던 곳이었다. 그곳의 주인은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담론이었고 대화였다. 박제된 사물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