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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ug 23. 2022

과잠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일상/하루

내가 겪은 대학의 변화

우리 또래는 본의 아니게 다채로운 경험을 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글 문서는 두 종류의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했다. 음반 시장은 카세트테이프와 LP, CD가 공존하고 있었고 오디오들은 이 서로 다른 세 개의 미디어를 생산할 수 있는 기기를 한 몸에 장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맨 위에는 턴테이블, 가운데 토막엔 카세트 더블 데크, 맨 하단엔 부드럽게 앞으로 튀어나오는 CDP가 장착되어 있는 모양새였다. 그 결과, 지금 현재 우리 집엔, 옛날 말로 컴포넌트 오디오(이 기기들이 떨어져 있다.)나 뮤직센터 오디오(하나의 박스 안에 분리되어 있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개의 음악 미디어가 있다. 물론 다른 칼럼에도 썼지만 음악을 듣는 건 대체로 이십 년 가까이 된 MP3플레이어로 하지만 말이다.      


대학에 몰려오던 변화의 순간도 제법 겪었다. 돌아보니 그때, 대학 문화는 엄청난 격랑을 겪고 있었다. 신입생 때, 다른 과 선배들이 지난여름 농활 때 입었던 단체 티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거 외에는 자기 과를 드러내는 상징은 없었다. 어쩌다 전교생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총장배 축구 대회나 단과대 축구대회 때 유니폼을 맞춰 입는 정도였다. 그러다 세기말이 다가오면서 각종 MT나 단체 행사 때도 티를 맞춰 입기 시작했고, 거기엔 자주, 민족, 애국, 민중 같은 이념이나 사상을 드러낼만한 문구 대신 단출한 로고나 학과의 영문 표기가 자리했다.      


그러다, 서울로 대학원을 가니 이스트팩을 닮은 백팩에 학교 로고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사립대학들은 판매용 단체티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러저러한 기념품도 제법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 또한 대학원 시절, 대학 로고가 새겨진 가방이 두세 개 있었다. 이 당시 우스갯소리로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면 어지간한 대학의 가방은 다 볼 수 있고, 자신의 대학보다 유명한 대학의 가방이 보면 슬그머니 칸을 옮긴다고 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추석 때, 이런 가방을 메고 티셔츠를 입고 고향에 내려가곤 했다. 총학생회에서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지역별로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추석 전 학교 운동장에 그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후...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인지, 아니면 21세기 들어서인지... 어느 해부터인지는 명확하게 모르겠지만 과잠, 학과 점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과잠이 언제부터 유행했는지 의견은 분분하지만 대략 90년대 후반으로 보고 있다. 이전에도 물론 단체복은 존재했다. 특히 한국의 사립대학은 한국의 대형 교회와 상호 간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필자가 중학생 때인 80년대 중반부터 교회에서 수련회를 갈 때마다 단체티를 맞추는 건 상식이었다. 같은 시기 대학에서도 단체 티가 유행했고 민주화 운동과 맞물려서 단체 티는 운동권의 연대의식의 표현의 주요 상징물이 됐다. 그러나 이 티는 그야말로 티의 역할을 할 뿐이어서 여름 한철에나 잠시 보여 지거나 농활이나 시위와 같은 특별한 행사, 또는 연고전 같은 특수한 자기들만의 리그에서나 입었을 뿐 사시사철, 또는 겉에 큼직한 로고가 드러난 채 입지는 않았었다. 필자도 90년대 초반 우연히 연세대학교 맨투맨 티를 기념품점에서 샀었지만 거기에 점퍼는 없었다.      


미국 대학의 스포츠 패션

반면 미국의 웬만한 대학들은 대학 상징 패션으로 짭짤하게 돈을 번다. 주립대학이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립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미국에 만연한 낮은 대학 진학률로 인해, 오히려 역설적으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할뿐더러 지역 내에 여러 대학교가 있어서 대학끼리 라이벌 관계가 치열한 탓에 대학의 상징 패션은 자존심의 표현이자 투쟁심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필자의 어머니가 사는 텍사스에는 텍사스 주립대학이 있다. 이곳은 갈색의 롱혼, 그러니까 소가 마스코트인데 미식축구 시즌이 되면 주립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오스틴 시내, 대학의 풋볼 경기장-부산 월드컵경기장만 한-과 심지어 텍사스 주요 도시의 마트마다 이 황갈색 옷이 뒤덮는다. 물론 베일러 대학이 있는 웨이코 인근은 베일러 대학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당연히 녹색으로 물든다.


이렇게, 텍사스 내의 웬만한 대학들, 또 소위 말해서 바이블 벨트, 서던 밸리라고 하는 남부 지역의 주요 대학들은 미식축구를 잘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늦가을에서 1월 사이에 여행한다면 그 지역을 대학의 상징색이 물들이고 있는 걸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현상은 일종의 대학-대학 구성원-지역 커뮤니티 간의 상호작용이고 이를 통한 동일시 현상이다. 그래서 실제로 한 논문에서는 주말에 벌어지는 미식축구 경기에서 자기가 다니는 대학의 팀이 이길 경우 다음 주 월요일 수업에 더 많은 학생이 대학의 티를 입고 등교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미국 대학의 스포츠 패션은 PR의 도구다. Public Relationship말이다. 우리가 아는 홍보니 선전의 도구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관계를 이어주고 그 관계의 연대를 공고히 해주는 도구다. 또 그 관계의 망을 넓혀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국의 대학 스포츠 패션은 교수를 포함한 학교 교직원, 학생, 학교가 속한 지역 사회, 그리고 동문을 아우르고 통합하는 도구이다. 그리고 이 연대를 통해 내부 구성원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애교심과 애향심까지 고취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이라는 연방제 나라에서 각 주의 정체성과 자긍심의 뿌리 중 하나가 각 지역의 대학과 그 대학의 스포츠 팀의 분발인 것이다.     


과잠의 기원과 변화

그러나 우리의 과잠 문화는 이것과는 결이 다르다. 미국의 대학 상징 패션이 지역색, 스포츠 마케팅, 지역 간-지역 내 라이벌 구도, 미국 특유의 상징과의 동일시 문화가 작용한 것이라면 한국의 과잠 문화는 이런 요소가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일단 우리는 대학 스포츠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한국의 과잠은 그 외형과 상관없이 스포츠와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저기 검색하면 과잠의 기원이 서울대학교 스포츠 동아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건 기원이다. 물론, 실제로, 처음엔 다른 학교도 체육학과만 과잠을 입었었다. 그래서 다른 학과가 이런 점퍼를 맞춰 입으면 체육 관련 학과와 학생과 마찰을 빚고는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마도 21세기 접어들어서, 그런 마찰은 사라졌다. 


그렇게 과잠은 체육대회 단체 티만큼 흔한 것이 됐지만 80년대 단체 티에 새겨졌던 메시지는 사라졌다. 대신 정보 전달에 충실한 "간판"역할만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의 과잠은 차이와 구별, 차별, 혐오, 배척의 도구가 됐다. 그러나 그 도구로 쓰일 뿐, 그것 자체는 아니다. 과잠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워선 안 된다. 그 조짐은 그전부터 있어왔다. 


80년대 후반부터 학생운동의 상징이었던 써클이라는 말 대신 동아리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고 그 정신과 더불어 써클의 높은 문턱 역할을 했던 이념이나 사상이 소멸되어가는 자리에 신자유주의 물결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대학과 단과대학, 학과들, 교수와 학생은 학문 공동체에서 연대하는 구성원이 아니라 대립과 경쟁, 상호 간 평가와 실적을 위한 대상으로 전환됐다. 


이 전환기의 변화를 94년부터 시작된 언론의 대학 평가가 더욱 부채질했고, 97년에 터진 IMF 사태, 2천 년대 초반을 장식한 서브프라임 사태, 그리고 대학 구조조정을 위한 대학과 교수의 지속적인 평가 등이 심화시켰다. 대학과 교직원, 교수와 학생은 대학 조직을 이루는 구성원이 아니라 교육 서비스 기업의 직원과 소비자, 교육 서비스 제공자와 그 서비스를 누리는 소비자로 전락됐다.


그 결과, 21세기 초입의 대학과 교수, 학생들은 대학과 학문에 대한 가치가 변했음을 절감했다. 대학을 향한 외부의 가치 평가 기준의 변화로 인해 내적인 가치관 또한 변화됐음을 절감했다. 나 또한 그 시절, 그러니까 2천 년대, 대략 십여 년 간 강사 노릇을 하면서 교수들과 동료 강사들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8,90년대 대학을 다녔던 이들은 이제 대학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이 기업이 된, 취업 사관학교가 된 대학에선 난해한 인문학 교양 강의 대신 <와인 상식과 와인 마시기 예절>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 시기부터 학생들은 과잠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잠에 새기는 문구는 점점 더 많아졌다. 과잠이 차별의 전광판 역할을 한 건 현상일 뿐, 그 징후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는 법

과잠에 새겨지는 건 이미지나 상징이 아니라 정보다. 학교, 학과, 학번, 심지어 출신 고등학교까지. 그것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옷 색깔이 정해져 있던 왕조 시대의 장치와 같은 것이다. 비단은 어떤 계급 이상만 입을 수 있고, 어떤 색은 특정 계급만 사용할 수 있기에 그 옷을 입고 그 색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존재고,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지를 나타냈던 것을 21세기 청춘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비판할 수 있는 어른은 없다. 사실 이들은 그런 방법 말고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말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자신의 내면을 무엇으로 채운 뒤에 표현-말과 삶으로-을 통해 내면을 드러내는 법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는데 긴 시간이 걸리고 타자 또한 자신과 같은 사람이어야 해석이 가능한, 그런 식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이런,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와 상호작용, 말과 글, 해석과 이해 등을 가르치는 것은 인문학의 몫인데 그 인문학은 점점 대학의 교양 과목에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고 관련 학과는 폐지되거나 통합되고 있다. 그 대신 예능 프로그램, 시청과 주민 센터, 쉬운 돈벌이를 위해 대학들이 앞 다퉈 개설한 평생교육원의 강좌를 위한 ‘고상한’ 상품이 됐다. 


그 결과, 청춘들은 오직 스펙과 성과주의의 함정 속에 줄 세우기의 당연함과 자기 과시와 현시, 표현만 배웠다. 객관적 정보의 나열 말고는 자신을 세상에 소개하는 법을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즉 사물화 된 세상, 사물화 된 대학에서 청춘, 대학생은 스스로 정보의 요소로 전락하게 됐다. 학생은 과잠과 함께, 취업률을 구성하는 퍼센트이며, 공무원, 회계사, 변리사 등 몇몇 시험을 통과해 학과와 학교의 실적을 높이는 존재다. 그 존재들은 그 실적으로 인해 플래카드로 전시되고, 그 플래카드는 후배들에게 과잠처럼 작동된다. 


결국 과잠은 명함의 역할을 한다. 아니 대학 자체가 명함이고, 학생 스스로가 명함의 역할을 자임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불안, 그리고 이념과 사상의 공백이 이들에게 과잠을 입혔다. 이것은 IMF 이후 대학과 학생이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명함이고 운동권 이후의 정신적 무정부 상태, 아노미가 불러온 현상 중 하나다.      


지난 십여 년간 지속된 취업난과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분은 오찬호의 표현대로 학생들로 하여금 ‘차별에 찬성’하게끔 했다. 그 차별은 미래의 불안을 기반으로 하고, 그 불안은 스펙과 학벌, 취업으로만 치유된다고 언론과 사회는 말해 왔다. 또 자칭 타칭 인문학자, 심리학자들은 TV에 고급스럽게 설계된 무대에 나와 손쉬운 위로를 남발하며 이들의 정신적 공허를 위한 새로운 시장을 형성했다. 


청춘에게 치유와 생존의 확인-물론 그것은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것-은 현상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 현상의 표상들이 과잠과 SNS다. 살아남은 자는 그 스스로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약자를 규정해야 하고 희생양과 약자의 선명함은 그들의 생존을 빛나게 만든다.


결국 21세기 대학과 대학사회, 학생,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한민국 사회는 지방대라는 단어에서 더 나아가 수도권 대학, 지잡대, 인서울이라는 단어들을 생산해냈고, 결국 과잠으로 학과의 위계까지 가시화시켰다. 이건 백화점에서 하는 명품의 서열화, 몇 년 전 유행했던 노스페이스 다운 점퍼를 통한 십 대들의 서열화와 다를 게 없는, 주체의 사물화를 넘어선 속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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