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일상/하루
아싸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건 2007년쯤이다. 한 대학의 교수와 대화 중에 그 교수가 요즘 학생들에 대해 푸념하면서 아싸라는 말을 썼다. 그래서 내가 반문했다. “아싸가 뭐죠?” 그게 아웃사이더의 줄임말이라는 걸 그때 안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아웃사이더는 영화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아웃사이더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보수적 권위와 편견의 울타리 밖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아웃사이더는 혼자다. 일본의 은둔형 외톨이처럼 말이다 이들은, 바우만의 빌리면 관계와 네트워크를 혼동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학과 내에서의 관계보다는 사물화 되어버린 주체의 성장을 위한 광범위한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물론 우리 세대도 다른 의미의 네트워크, 소위 연이 중요한, 학연, 지연, 혈연의 시대를 살아냈다. 이중 특히 학연은 해방 이후의 산물로 한국 근대사의 다양한 분야에 얼룩을 만들었다. 그 얼룩은 정계, 재계, 학계는 물론이고 군대와 공무원을 비롯한 사회의 전 영역으로 파고 들어와 물들였다.
그 시대는 7,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90년대 고속 성장 이후, 그리고 대학의 숫자가 팽창한 이후, 결정적으로 IMF사태라는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 이후 네트워크는 더 짧아지고 더 극단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위해 더 복잡하게 연결됐다. 명분, 의리, 우정, 사제지간의 정이라는, 그나마 이 연이라는 네트워크를 장식해주던 미사여구조차 21세기 들어오면서 사라졌다. 겉치레를 위해서라도 입 밖으로 꺼내놓기 어색해졌다. 이미 모든 인간관계는 효율성으로 평가됐고, 자신의 길이 학과 내의 관계로 인해 도움받는 길이 아니라면 대학생은 서슴없이 아싸의 길을 택했다.
90년 대 후반, 늦어도 2천 년대 초반부터 한국의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회는 비운동권 학생회가 차지하게 된다. 그들은 먼저 학과 학생회를 차지했다. 이들의 정체를 뭐라고 규정할 수 없다. 단지 이 시기부터 학생들은 학과 일에 관심을 끊게 되고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로 나뉘게 된다. 인사이더들은 소위 ‘과 생활’을 하는 친구들로 이들은 선후배 간에 얼굴을 익히고 돈독함을 쌓아 간다. 반면 아웃사이더, 즉 아싸들은 수업이나 열심히 참여하면서 자신만의 학점 획득과 스펙 구축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결국 학생회는 이 소수의 인싸들이 후배들을 키워내면서 독특한 형태로 대물림 되게 되는데 이 현상은 아싸, 즉 ‘학과 생활’에 무관심한 학생들로 인해 더 견고해진다. 이 시기부터 총학생회의 축제에 소위 말해 아이돌과 유명 가수들이 초대되게 된다. 축제의 낭만은 축제를 준비한 학생회의 역량을 측정하는 가치로는 충분하지 않고, 너무나 추상적인 개념이었기에 바쁜 축제 기간에 얼마나 유명한 스타를 섭외했는가 만이 결국 학생회의 역량 판단 기준이 된다.
그렇다. 학생회의 교체와 축제의 형질 전환, 이 현상의 근본엔 아싸와 인싸가 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엔 취업률이라는 불안한 화두가 자리 잡고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엔 취업률과 같은 시장친화적인 척도만으로 대학을 평가하는 신자유주의가 버티고 있다.
그 결과,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이 나라의 대학은 성향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종류의 청춘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다. 갈등과 타협이 공존하는 학과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학과에 관심 없고 학생회의 불합리함이나 그릇됨을 알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학생회와 학과와 학교의 문제를 자기화하지 않고 탓이나 책임에서 자유로운 아싸 생활을 경험한 학생과 의견의 합일치를 반복해서 생산하고, 그 생산을 바탕으로 꾸준히 학생회를 재생산해 온 인싸를 경험한 학생, 이 상반된 청춘들을 사회에 내보내고 있다.
그로 인해 이 사회엔 조직의 룰과 문화에 순순히 적응하는 인간, 즉 속칭 사회생활 잘하는 부류와 그 조직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는, 또는 무관심한, 사회성 떨어지는 부류로 극명히 나누어진다. 아니 사회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눠지는 걸 원했기에 대학에서부터 그렇게 나눠졌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의 이분법적 청춘의 반복 생산 및 배출은 결국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서로를 혐오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 대학에서 아싸와 인싸가 서로를 혐오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업을 비롯한 많은 조직들 역시 소위 과생활의 연장선에서 해석될 수 있는, 속칭 사회생활을 잘하냐 못 하느냐로 사람을 평가하면서 조직원의 피곤함을 가중시키고 서로의 혐오를 부추기면서 충성 경쟁을 유도한다. 그것이 직원, 조직 관리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다양성 확보가 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무는 현상은 대학에서의 아싸와 인싸의 탄생과 고착에 기인하고 있는지 모른다. 당연한 것 아니겠나? 침묵하는 고독한 자의 존재 가치와 수다스럽고 활달한 자의 존재가치의 다름과 그 다름의 가치의 동등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다양성 확보는 이래저래 어렵지 않을까?
딸은 요 며칠 루리 작가의 <긴긴밤>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제 다 읽고, 독서록을 썼다고 하기에 그 내용을 물었다.
"음...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태어난 동물들이 서로에게 의지해서 여행을 가는 거야."
"어디로?"
"자신과 어울리는 곳으로."
딸의 말이 맞다면, 이 소설은 우리 생의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는 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태어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인생 자체가 낯선 것이다. 다 한번뿐이니까.
그렇게 살면서 나와 어울리는 곳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 도달의 불가능함을 깨달은 뒤에도 묵묵히 앞을 보며 살 수 있는 것은 저 긴긴밤을 함께할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동사의 맛>에서 김정선이 말했던 것처럼 낱말이 서로에 기대어 의미를 생산하는 것처럼 사람도 그러해야 한다. 혼자인 삶은, 낱개의 삶은 이도 저도 아니다. 얼마 전 보낸 칼럼에 그런 내용을 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