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카는 주체의 폐허화를 이미지로 막아 내려는 부단한 노력이다. 우리는 나이 들어 변하고 늙어가고, 언젠간 죽는다.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 그 과정을 기록하는 건 귀족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초상화로 변화를 기록했고, 그 기록은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돈 주는 사람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셀카는 이 특권을 없앴다. 왜곡은 자행(自行)된다. 스마트 폰의 각도를 바꾸고, 셀카봉을 이용해 거리를 바꾸고,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눈의 크기와 피부의 색을 바꿔가며 자신을 최대한 미화해 기록한다. 가장 저렴한 성형 수술이다. 그 셀카와 셀카 사진이 올라간 SNS를 통해 우리는 어제의 나를 확인한고 오늘의 나와 소통한다. 당연하게도, 미래의 모습은 볼 수 없기에 주체의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오늘의 나를 열심히 기록한다. 그 오늘의 나에 대한 기록이 주체의 불안, 오늘 살아내는 불안, 뿌리 없는 존재의 불안을 반감시키고 잊게 한다. 살아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며 살아나갈 힘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를 미화시켜 기록하지 않으면 무너져 버릴 만큼 위태롭고 불안한 세상을 살아내고 있다. 셀카를 통해 나라는 존재는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으며, A와 있고 B와 있으며,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공부를 하고 여행을 가며,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살아내고 있음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다. 기록하지 않으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반복되는 삶이다. 이 삶을 지치지 않고 버티기 위해, 우린 어제와 오늘의 다름을 기록해 스스로에게 내일을 살 이유를 증명한다.
다름의 차이는 없다.
생각해보면 어제와 오늘의 그 다름은 보통의 다름이다. 남과 다르게 살고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기 위해 셀카를 찍지만 그 다름은 시대의 상식, 무리의 상식, 사회의 상식, 보통의 삶이라는 상식의 범위 안에서 행해진다. 그래서 다름의 척도는 리커트 척도처럼 그 범위가 정해져 있다. 척도 밖의 더 좋은 것도, 더 나쁜 것도, 심지어 아예 가치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것도 표현할 수 없는 리커트 척도처럼 우리는 그 좁은 범위 안에서만 다름을 선택하라고 강요받는다.
그 범위를 벗어난 다름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 범위를 벗어난 다름은 셀럽의 SNS, 공중파와 케이블 종편 채널의 여행 프로그램과 여행 가서 밥하고 밥 먹고 식당 하는 프로그램의 몫이다. 그러나 그 속의 다름조차 일상을 가장한 일탈이고 일탈을 가장한 일상일 뿐이다. 시청자도 그 가능성을 감지한 채 그 “조금 다른" 일상을 소비한다. 언젠간 나도 저렇게 “조금 다름”을 실천하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 다짐이 실현되기까지 보통의 우리는 일상에서 자잘한 “다름”들을, 범주 안의 “다름”들을 부지런히 만들며 산다.
새로운 길과 카페들, 레스토랑, 모던한 건물들은 이들의 욕망을 잘 알기에 재빠르게 다름을 제시하고 함께 소비했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다른 다름을 제시하고 함께 소비한다. 유행은 이것의 반복이다. 이 제시와 사라짐의 반복이 유행의 파동을 만들고, 보통의 우리는 이 파동 위에서 일상을 살아낸다.
가짜 고고학자들과 폐허들
그 파동이 미치지 않는 유행의 심연에 가라앉아 무던히 세월을 버텨낸 공간들은 그 견고한 이미지로 인해 역설적으로 셀카를 찍는 이들에게 사랑받는다. 그 견고한 공간은 마치 유적과도 같아서, 사람들은 관광지 스폿처럼 그곳에서 유적과 유물을 담듯이 사진을 찍는다. 진짜 박물관의 유물은 유리 밖에서 사진 찍지만 유적 화 된 폐허는 가림 막이 없다. 찍는 이도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곳의 주민과 주인은 청춘들의 폐허와 노포 촬영을 이해할 수 없다. 노포에 대한 청춘들의 기록은 관련 방송을 만들어 냈고 생활의 달인이나 저녁 정보 프로그램에나 출연했던 노포의 주인장들은 그들의 카메라가 자신이 아니라 점포와 음식, 테이블에 향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리둥절해한다.
그렇다. 청춘의 노포 인증 숏엔 그 장소와 음식을 지켜낸 역사의 주인공이 부재한다. 그곳의 주인공은 그곳을 발굴한 고고학자, 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고학자는 금방 그 유적에 싫증을 내고 다른 곳을 찾아 떠난다. 진짜 고고학자가 하나의 유적에 몇 달, 몇 년, 심지어 평생을 받치는 것과는 달리 이 유행을 따라가는 고고학자는 다른 폐허를 찾아 떠난다. 지난 폐허는 버려지고 폐허가 된 주체 또한 여전하다.
인증샷
인증샷은 자신을 위한 사물과 타자의 이기적 포획이다. 그 사진 안에 타자와 사물의 의미가 설 여백은 없다. 그 어떤 험난한 곳이든, 오래된 곳이든, 진귀한 음식이든, 식인종이 나오는 무인도든지 간에 인증샷 안에는 사진을 찍는 이의 실적만 존재할 뿐이다. ‘내가 거기 있었다.’, ‘내가 이것을 했다.’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의 불안은 그렇게 셀카에 이어 인증샷으로 기록되고 지워진다. 사유를 통해 존재를 확인받던 데카르트의 시대는 그렇게 자연스레 소멸되고-어차피 그럴 시간도 허락되지 않지만-행함이 가득한 존재 확인만 연이어진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자 죽은 것인 것처럼 청춘들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함이 없는 주말과 여행, 일상 속 “행함”의 기록 없음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지 않음에서 존재의 부재함이 발생한다.
무엇을 행하든 기록해야 행한 것이다. 행함이 없는 삶을 넘어 기록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그래서 앞선 글에서 말했듯, 무엇을 기록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무엇을 기록하지 않을지 고민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모든 기록엔 레퍼런스가 있다. 즉 준거와 근거가 있다. 바로 타인의 SNS. 거기에 기록된 것이라면 나도 기록해야 한다.
모두 하기에 한다.
이것은 승자 없는 영원한 레이스다. 누가 먼저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찍히고 있는 그곳, 그것, 그때를 나도 기록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아마추어 마라톤 대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기록대의 풍선을 달고 뛰는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무리를 지어 뛰는 것처럼 모두 같이 가고 있다는 안도감만 가질 수 있으면 된다.
1등? 어차피 아마추어다. 우린 요리사도, 디자이너도, 예술가도, 사진작가도 아니다. 그저 기록하는 대중일 뿐이다. 그러니 그 대중 속에 적절한 위치만 차지하고 있으면 된다. 그 레이스가 싫으면 뒤로 처져 뛰는 펭귄-아마추어 마라톤계에서 뒷줄의 천사라고 불리는 존 빙햄의 별명-이 되면 된다. 그러나 인증샷을 찍는 사람들은 1등을 바라진 않아도 뒷줄의 펭귄이 되는 건 싫어한다. 그러려면 차라리 SNS를 안 하고 말지.
SNS는 실시간 일상 중계이기에 레이스에 참여하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일 뿐 적당히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일단 하기 시작하면 스트레스다. 물론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좋아요.’와 타자의 SNS 훔쳐보기로 해결된다. 결국 인증샷은 레이스를 함께하는 사람들 간의 격려이자 압박이다. 낙오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상호 부축이다. 일상의 스트레스로 지쳐가는 동료에게 '좋아요.'라는 모르핀을 때려 넣어주며 계속하라는 격려다. 결국 이에 의지해 우리는 뭐라도 찍어 올린다. 하다못해 다이소에서 새로 산 탕진 아이템이나 만원에 네 캔, 심지어 여섯 캔, 열 캔 하는 맥주 자랑이라도 해야 한다. 아니면 잘 끓인 라면이라도.
관광지의 단체 사진
인증샷은 8,90년대, 그리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단체 관광의 축소판이다. 단체 관광이 '관광지'에서의 사진에 의해 그 업적과 실적을 평가받듯이 오늘의 인증숏의 기능도 그렇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대부분의 관광지는 군사정권 시절에 의도적으로 개발된 곳이 많다. 그것은 의도적 조성이자 형성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71년에 경주관광개발 1단계 사업계획을 수립했고, 다음 해에는 제주도, 그다음 해에는 설악, 부여, 공주 관광개발을 계획 실행했다. 그 후 70년대 내내 경주, 제주, 설악산 등지는 꾸준히 개발됐고, 80년대 신혼 여행지로 이 세 곳이 자리 잡게 된다. 그가 정권을 잡고 서둘러한 일 중 하나가 1962년도에 한국관광공사의 전신인 국제관광공사 설립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군사정권의 관광정책은 알다시피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으로, 노태우 정권의 해외여행 자유화로 이어졌다. 맛집이라는 개념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의 전두환 정권의 국풍까지 가야 한다. 사회 현실에서 눈을 돌려 의도적으로 사적 즐거움에 몰두하게 하고, 인증샷에 열을 올리게 한 역사는 이렇게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인증샷엔 정말 기록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삶의 증거로 무엇을 남겨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살아냈고 살아간다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다. 살아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또 무엇인가?
2차, 3차를 가야 했던 이유
80년대, 90년대는 노동과 관광, 노동과 유흥, 노동과 가족(가정)이 양립되면서 삶과 일상의 증거로 작용했다. 이 시대, 대부분의 청춘은 노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사회로 나갔기에 선배들의 노는 법을 그대로 답습해야 했다. 정권이 만든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고, 취사가 허락되던 계곡에서 밥 해 먹고 술 마시고 노래 몇 자락 하는 것이 다였다. 일본조차 먼 나라였고, 중국은 갈 수도 없는 나라였다.
결국, 그 시절, 우리의 유희는 딛고 서 있는 땅과 일상의 범위 안에서 해결되어야만 했고, 유흥은 도시라는 공간이 가진 낮과 밤의 극단적 이중성 속에서 공간과 공간의 이동의 연쇄를 통해 그 가치를 평가받았다. 우리만의 2차, 3차 문화는 이렇게 제한된 지리적 범위 안에서 다양한 실내 공간을 옮겨가며 최대한 다양한 유흥을 실천하려 했던 우리네 선배, 엄마 아빠들의 최대한의 노력, 20세기적 인증샷의 실천이었다.
인증숏을 대신했던 무용담
그때의 청춘들, 노동자들은 3차 끝에 간 집창촌에서의 성경험을 다음 날 아침 인증샷과 같은 무용담으로 떠들었고, 그 무용담은 인증샷보다 더 생생한 감흥을 전달해서 새로운 소비자를 생산해 냈다. 그 간판 없는 유흥의 장소에서 그 업소들은 구전을 통해 인증되어 브랜드 명성을 쌓아 갔다.
한때 군대 가기 전에 총각 딱지를 떼던 것이 어른의 인증이던 시대가 있었다. 회식 때 몇 차까지 갔고, 얼마나 유명한 술집, 룸살롱에 갔으며 얼마나 유행하는 유흥업소에 갔는지 자랑하던 시대-물론 지금도 그런 기업 문화, 회식 문화가 남아 있는 곳이 있다-가 있었다. 그것은 시기 구분이 가능한 유행이었고, 일종의 노동의 연장이자 남성 중심적 과업의 전시적 행위였다.
우리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지금은 바뀌었을까? 더 해졌다. 유행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주기는 찰나이며, 그 와중에 과업 완수를 해야 한다. 관광지는 도처에 있고, 우리 곁에 있으며 그만큼 찍어야 할 곳도 많고 기록해야 될 일상도 많다. 그곳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일상을 관광 상품화해서 전시해야 한다. 잘 전시할수록 본인의 일상, 본인 스스로의 상품성이 높아지고 결국엔 개인방송으로까지 발전된다.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가 기록하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인가?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누구에게 인정받고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는 걸까? 살아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주체의 흔적은 무엇인가? 아니, 그 흔적이 굳이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