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우연 : 다섯 번째 서랍- 1인 라이프
탕진잼/템은 다이소와 같은 생활용품 매장, 유니클로 같은 SPA 브랜드 매장과 연동되는 단어다. 값싼 생활용품, 없어도 되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사게 되는 그래픽 티셔츠들.
이들 탕진잼은 SNS에 올릴 수 없는 탕진이다. 누구도 다이소나 유니클로에서 산 제품을 인스타그램에서 자랑할 수는 없다. 정말 아무런 무늬도 없고 오직 브랜드 로고만 등판에 넓게 있는 60만 원이 넘는 발렌시아가의 다크 네이비 티셔츠라면 올릴 수 있다. 그것을 사는 것 자체가 진정한 탕진이고 사치이기에.
몇만 원 안 하는 실용적인 러닝화는 인스타그램에 올리긴 좀 그렇지만 모양새부터 무슨 용도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렇지만 가격은 백만 원이 넘는 명품 어글리 슈즈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다. 아니 올려야만 한다.
탕진잼/템, 그리고 소확행은 SNS로 인해 점점 더 멀게만 느껴지는 삶의 이상향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청춘들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값비싼 위스키나 세계 각국의 와인 대신 네 캔 만 원짜리 맥주를 마시면서, 이케아나 한샘몰의 비싼 생활용품 대신 다이소의 생활용품을 사면서, 이들은 손에 안 잡히는 미래를 포기하는 대신 오늘 가능한 사치, 행복, 물건을 손에 소유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소위 “카페인 우울증”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남에 SNS를 보면서 “왜 나만 이 모양 이 꼴로 살지.”하며, 자기 멸시와 우울을 느끼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말이다.
하루키적인 소확행은 그의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일정한 파트너와의 주기적인 섹스, 적당한 수입, 수영과 같은 적당한 운동, 음악과 문학 등에서의 나름의 취향, 조용한 맛집, 소박한 저녁 식사, 날씨와 상황에 맞는 옷차림과 그 옷차림을 구성하는 옷에 대한 섬세한 이해 등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부자나 그저 그런 직장인이나, 심지어 백수나 대학생이라도 이런 일상을 살고 있다.
하루키의 소확행은 자신만의 성곽 구축이고 세계의 구성이다. 히어로 영화들이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여 <00 유니버스>로 불리는 것처럼 모든 개인들이 이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을 어떤 상황에서도 나름 지켜내며 사는 것, 이것이 하루키의 소확행이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영화가 어쩌면 한국 영화 <소공녀> 일지 모른다. 위스키와 담배, 남자 친구만 있으면 다른 건 어떠해도 상관없는 삶. 영화 속 주인공 미소는 하루키의 소확행의 조건을 아주 압축, 추려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를 위해 주거비를 포기할 정도로 말이다.
미소에게는 일상적인 섹스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또 대부분의 청춘들은 연애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한가로운 청춘들 같은 소확행의 한두 개는 이미 시도할 수 없는 영역이 돼 버린 것이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소확행이란 이런 것뿐이다. 일상적 실천, 어쩌면 정상적인 실천의 범주가 아마도 네 캔 만원 맥주와 탕진잼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양극화 현상이 어느 분야에서나 보이는 것이다. 누군가는 초호화 호텔이나 풀빌라에서 묵으며 인증샷을 올리고 누군가는 조촐하게 자신의 원룸을 꾸미고 맥주를 마시며 OTT로 영화를 보고.
<공공의 적 2>에서였던가? 정준호가 이런 대사를 한다. “이런다고 누가 상 줄 것 같나? 공공의 행복을 위해서? 세금 몇만 원 깎아주고 월드컵 축구나 계속 보여주면 돼, 누가 몇천 억을 어떻게 하든 그런 인생들하고는 상관없는 문제잖아! 니들은 니들끼리 살란 말이야, 버러지 같은 인생끼리!”
지금 들으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대사다. 2005년에 나온 영화인데, 그동안 세상은 그렇게 많이 안 변한 것 같다. 누군가, 소소한 즐거움을 통해 일상의 고통과 사회의 병리를 잊으려 할 때, 그 고통과 병리 속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는 누군가는 진정한 탕진을 하면서 어딘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이 사회가 중간이 없어지면서, SF 영화 <엘리시움>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주 극단적으로 보호받고 안락하게 사는 상류층과 그 상류층이 사는 그야말로 공중에 떠 있는 엘리시움을 보며 부러워하는, 그러나 갈 수는 없는 황폐해진 지구에 사는 하류층의 삶만 존재하는 그런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감이 들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