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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17. 2023

라인인지 썩은 동아줄인지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43

현재 우린 두 개의 프로젝트를 거의 동시에 진행하고 있고 다른 IT 기업과의 협업도 진행 중이다. 앞선 두 개의 프로젝트 중 하나는 4월에 계약을 해서 제작 중이고 뒤의 프로젝트도 카피와 콘티 시안을 놓고 담당 주무관 및 계장과 함께 회의를 했다. 발주부서에서 30초 캠페인과 함께 1분짜리 홍보 영상도 만들어줬으면 해서 감독이 금액과 제작 기간을 놓고 협의 중이었고 그 사이 시안이 정해져서 1분 영상을 위한 멘트를 더 채워 넣는 중이었다.      


갑자기 날아간 프로젝트

이번 주 월요일 오전, 감독에게 1분짜리 시안을 보내고 수영을 하고 나오니 카톡이 와 있었다. 감독이 전화를 한번 해달라고 했다. 점심을 먹고 통화를 했다. 내용은 이랬다. 계약 부서에서 계약을 틀고 다른 회사랑 그 프로젝트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 프로젝트는 그 정책이 입안 됐을 때부터 장기적인 3단계 PR 플랜을 수립하고 그 단계별 플랜의 목적과 기대 효과에 따라 영상을 제작해 왔기 때문에 연속성이 중요했다. 담당 주무관이 바뀌었지만 그 사안이 인수인계 됐고 계장도 바뀌었지만 계장도 PR 기획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영상을 만들어 온 업체랑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 하에 일을 진행했던 것이다. 다른 업체랑 일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기초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감독에게 건너 들어보니 계장이 바로 계약부서로 뛰어갔던 모양이다. 그 계장님의 외모나 성품상 책상을 뒤엎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름 언성을 높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 결과를 어찌하지 못했기에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하고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감독이 “혹시, 000 라인 타고 들어온 겁니까?”하고 물었더니,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하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라인 없이 계약 직전의 일이 엎어지진 않는다.      


감독은 우리가 현재 제시한 콘티는 오픈하시지 마시고 작년에 수립하여 제출한 PR 전략 기획서와 1차와 2차 영상에서 사용했던 CG 등도 오픈하지 마시라고 했다고 한다. 감독의 말을 듣고 난 담담히 말했다. “이제, 감독님 라인도 좀 돌려 봅시다. 우리도 이제 아쉬운 소리 좀 하고 다니지, 뭐.”, 그러자 감독은 “하~ 내는 그런 게 싫은데, 이제 마, 골프도 배우고 동문회도 나가야 하나? 안 그래도 예전에 구청장 했던 00 형님이 한번 보자카던데. 가봐야 되나.”, “그럽시다. 아쉬운 소리는 내가 할 테니 같이 움직입시다. 저쪽이 지저분하게 나오면 뭐, 우리도 그래야지.”, 그렇게 통화를 끝냈다. 감독은 야경을 찍기 위해 조감독을 데리고 촬영 스폿을 갈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칼럼을 수정하고 있는데 오후에 다시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작가님, 주무관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어. 계약 부서에서 그냥 우리랑 진행해도 된다고 했다카데. 이기, 뭐 아들 장난도 아이고, 이 뭐 하는 짓인지 몰라.”, “뭐, 일 준다고 다 할 수 있겠어요? 누군지 몰라도 엄두가 안 났겠죠.”, “그러니까, 이 쌩 양아치 쉐이들, 콱 마, 누군지 걸리기만 걸리뿌라.”, “마, 놔둡시다. 촬영 조심하시고. 내일 봐요.”, “알겠십더.”     


양야치는 라인을 타고 온다.

작업실에 출근해 감독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라인 타고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관공서도, 거기랑 일하는 업체들도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고 한다. 감독의 중학교 친구 중에 디자인 전문 업체가 있는데 거기도 그런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 회사는 시청, 구청뿐만 아니라 산하 공공 기관의 인쇄물 디자인, 로고, 브랜드 디자인 등 다양한 디자인 작업을 해 왔다. 일도 잘할 뿐만 아니라 그 사장이 지역에서 제법 알아주는 뼈대 있는 집안사람이라 거미줄 같은 이런저런 인맥이 지역의 다양한 분야에 깔려 있다. 그런 사람도 정권이 바뀌면서 제법 일이 날아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일을 가져간 업체에서 못하겠다고 포기해서 그 일이 다시 그 사장한테 온 경우가 여러 번이라고 한다.      


결과의 책임은 누가 지나

관공서나 공공기관, 지자체와 일을 하다 보면 라인의 영향을 받는다. 일정 금액 이상은 공공 발주를 통해서 하니 라인의 영향력이 거의 없지만 그 금액 이하는 담당 부서와 그 부서를 총괄하는 실무국장, 심지어는 지자체장의 판단에 의해 업체가 결정되기 때문에 라인의 힘이 작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검증과 결과다.      


주무관이 영상 관련 업무를 해본 경험이 없으면 그 경험이 많은 부서에 물어보거나 주변 직원, 전임자에게 물어본다. 그렇게 추천받은 업체를 불러들여 미팅을 해보고 작업했던 샘플 영상을 보고 견적과 의견을 듣고 일하는 방법을 파악해서 업체를 선정한다. 검증의 과정이다.      


그러나 위에서 오더가 내려온 업체에 대해선 검증의 기회가 없다. 설령 검증한다고 해도, 그 검증한 뒤에 그 업체의 실력과 수준이 영 못 미더워도 안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느 조직이나 상사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 상사가 내 인사권을 가진 사람이거나 공직 사회와 지역 사회에서 계속 봐야 될 사람이라면 더 그러하다. 말이 광역 시지 부산이나 울산은 물론이고, 창원이나 경남 같은 지역의 인력 풀의 크기는 상상 이상으로 협소하고 관계의 망 또한 아주 짧고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결과다. 어떻게 일을 따 왔든지 간에 결과물을 잘만 내놓으면 사실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물론 신생 기업이나 연줄이 없는 기업의 입장에서 불합리한 부분이지만 담당자 입장에선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렇게 일을 가져간 업체들은 경험도, 실력도 없다. 그런 경험과 실력이 있었으면 라인을 움직였겠나? 결국 납기일 내에 결과물을 받아야 하는 주무관은 죽이 됐든 밥이 됐든 결과물을 받아줄 수밖에 없고 그 결과물의 책임 또한 온전히 자기 몫이 된다. 결국 공직 경력에 작은 오점이 남게 된다.    


얼굴 도장 찍기에 바쁜 사람들

우리 업계에도 본업보다 외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능 단체, 이익 단체, 봉사 단체, 연합회, 동문회, 종친회, 향우회, 계모임, 청년 단체, 시니어 단체, 라이온스 클럽, 로터리 클럽, 경제인 단체, 리더십 포럼, CEO 포럼, 최고 경영자 과정.... 이런 곳에 쉴 새 없이 드나들면서 명함을 뿌리고 인맥을 만들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골프를 치고 등산을 하면서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의외로 많다.


이런 모임엔 구의원과 시의원도 흔하고 예비 단체장 후보들도 많다 보니 이 사람들이 당선되기만 하면 일이 잘 풀릴 거라 기대를 하며 부지런히 얼굴 도장을 찍고 다니는 것이다. 또 어떤 사업을 하든 다른 업종과의 협업이 필요할 때가 있다 보니 “기왕이면 아는 사람”이라는 심리에 기대어 얼굴 도장을 찍는 것이다.   

   

나야 원래 고향도 없고 학연도 없는 사람이서 이런 모임과는 인연이 없다. 반면 감독은 지역 토박이인 데다가 친구들 사이에 신망도 두터운 편이라 이런저런 모임에서 나오라는 재촉이 많다. 한 십 년 전까진 그러지 않았는데 다들 먹고살만한 나이가 되고 선후배들이 정관계를 포함하여 지역의 각 분야에 적당히 자리를 잡은 나이가 된 후부터 이러한 재촉이 더 심해졌다. 감독도 결국 한몇 년 전부터 겨우 초등학교 동창회에는 나가고 있다. 그러나 무슨 협회니 단체니 하는 곳엔 일절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시간도 없다. 무슨 경영자 단체나 리더십 포럼 같은 곳에서도 전화가 오는 모양이던데 그런 곳에 쓸 돈도 시간도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른 척하고 있다.      


이번 일을 겪고 난 후, 감독은 골프를 배워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돈도 돈이지만 거의 하루 종일을 잡아먹는 스포츠라 망설이는 모양이다. 라인을 돌려야 하는지도 고민하고 있다. 한번 찾아오라는 선배들을 찾아가 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가게 되면 나도 데리고 가라고 했다. 덩치 큰 사람이 혼자 가서 아쉬운 소리 하면 모양 빠지니 나도 데리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럴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 일을 따오는 것과 그 일을 하는 것, 그 일을 하는 것과 잘하는 것, 잘하는 것과 아주 탁월하게 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으니까.      


다들 눈이 높아졌다. 좋은 영상은 이제 차고 넘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정보도 많고 비교도 쉽다. 라인 깔 시간에 실력을 다지는 것이 훨씬 낫다. 지금이 아니라 훗날을 위해서, 그 편이 훨씬 낫다. 십 년, 이십 년 내다보고 묵묵히 경험과 실력을 쌓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베테랑이 되는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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