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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01. 2023

경력이 곧 실력은 아니고, 나이가 벼슬도 아니다.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26

고정 멤버    

매달 마지막 날엔 단축 수업을 한다. 정규 강습은 30분 정도하고 나머지 20분은 자유 수영을 한다. 예전엔 모든 회원이 참여하는 수구 비슷한 놀이도 하곤 했는데 요즘엔 이렇게 바뀌었다. 언젠간 말했듯이 수영장의 인원은 매달 첫 주에 가장 많고 둘째 주에 정점을 찍은 뒤 서서히 줄어든다. 오늘도 한산했다. 고급 B반의 2번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오늘 막 날인가?”     


결국, 아무리 사람들이 들고 나도, 늘 오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무자비한 1번과 2번, 부녀 사이인 3번과 4번, 날렵한 5번 아줌마, 6번인 나, 7번엔 체력 좋은 아줌마, 귀여운 글래머 아줌마가 8번, 우리 반에 올라온 지 석 달이 된 젊은 엄마가 9번이다. 여성이라면 피할 수 없는 그날로 인한 부득이한 결석 일을 제외하면 이 멤버는 고정이다. 그래서 내 번호는 4번에서 6번을 오간다. 내가 딱 중간인 것이다.      


단축 수업이 끝나고 레인 반대쪽에서 8번, 9번과 잠시 대화를 했다. 대화의 단초는 1번의 잠영 거리였다. 수업이 끝나고 운동량이 모자라는 1번은 자유형을 몇 바퀴 돌았다. 우리는 그의 숨겨진 비밀이라도 알아낼 요량으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자유형 스트로크와 킥의 피치는 평범해 보였다. 우리와 가장 다른 점은 턴을 하고 난 이후의 잠영 거리였다. 우리보다 배는 더 길었다.      


경력과 실력의 상관관계

그의 잠영 거리를 시작으로 어떻게 우리가 앞선 주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약간 백 분 토론 비스름한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말했다. “일단 1번과 2번은 열외로 하고,”, 다들 웃었다. “3번, 4번 부녀도 만만치 않아요. 일단 3번 아가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영을 한 데다가 이제 이십 대 초반인가 그래요. 그리고 4번 아저씨는 수모를 보니, 왕년에 바다 수영도 많이 했던 모양이에요. 알죠? 바다 수영하는 사람들의 체력은 어나더 레벨인 거.”,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5번 아줌마가 남는데, 이 양반 킥 속도가 또 장난 아냐.”, 그러자 옆에 있던 9번이 거들었다. “며칠 전에 안 나오셨을 때, 제가 그분 뒤에 섰거든요. 와, 저 따라가다 죽는 줄 알았어요.”, 우린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도 알게 모르게 실력하고 체력이 늘었어요. 우리 반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늘어요.”, 그러자 8번이 동의했다. “맞아요. 이 반에 처음 왔을 때 속도가 너무 빨라서 깜짝 놀랐는데, 몇 달 하니까 적응되더라고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가 그래서 예전에 강사에게 그랬어요. 1번한테 강습료를 주고 싶다고. 누가 이렇게 책임지고 우리를 운동시켜 주겠어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진짜, 우리 반이라도 가끔 나오는 사람은 힘들어서 못 해요. 어제(핀 수영하는 수요일) 나온 그 아저씨 있죠. 그 사람, 제가 B 반에 있을 때부터 A반에 있던 사람이에요.”, 두 여자가 깜짝 놀랐다. “에? 진짜요?”, “네, 그런데 한 달에 댓 번 나올까 말 까니까 체력이 안 되잖아요. 어제 핀 끼고 발차기 열 바퀴 돌 때, 그 양반, 한 반은 쉬었을걸요.”     


샤워장에서 2번 아저씨와 잠시 대화를 하면서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 수영 오래 하신 분들 많거든. 뭐 십 년 이상 된 분도 수두룩하지 아마. 나도 한 십오 년 됐나? 그런데 내가 처음 이 반에 왔을 땐, 맨 끝에 있었거든요. 그때는 맨 날 돌면 잡히고 그랬지. 그런데 한 3, 4년 열심히 했나? 2번을 하고 있더라고. 오래 해도 가끔 나오면 실력 안 늘어.”     


수영을 한 경력과 수영장에서 보낸 시간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곧 공부 시간이 아닌 것과 같다. 학교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자연스레 지식이 쌓이는 것도 아니고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지식의 깊이가 깊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오래 산 세월이 곧 금슬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사실과도 비교한다면 좀 매정하려나?     


시간의 양과 질

들인 시간이 경력이 되려면 시간이 결과로 드러나야 한다. 수영을 2년 했으면 1년 한 사람보다 잘해야 하고, 십 년을 했으면 오 년 한 사람을 압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다. 아마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네에 공원이 많고 달리기 좋은 길이 많다 보니 아침, 저녁으로 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매일 열심히 뛴다고 해서 마라톤 대회에 나갈 수는 없다. 일 년 내내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거리를 뛰면 체력과 건강은 좋아질 수는 있어도 속도도, 달리기 기술도 늘지 않는다.


나아지기 위해선 관련 사이트도 들락거리고 전문 서적도 보고 고수들이 있는 동호회에 들어가 함께 훈련해야 한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5킬로미터, 10킬로미터를 뛰어봐야 하고 하프와 풀코스도 뛰어 봐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수준을 가늠해봐야 한다. 수준이 가늠되면 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디, 다른 글에도 썼지만 난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지향한다. 그러나 일과 돈을 써가며 하는 수영이라는 운동에서만큼은 날 괴롭히고 있다. 하면 할수록 잘하고 싶기 때문이다. 오래 했다고 자연스레 잘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실력이 늘고 월급이 올라가는 취미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여러분의 일과 취미, 그리고 심지어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     


시간의 무게와 가치

시간, 그 자체엔 무게가 없다. 그 시간을 제대로 쓴 사람에게만 시간은 그 고유의 무게를 얹어준다. 그렇다. 오래된 물건이 다 박물관에 가지는 않는 것처럼 나이 든 사람이 다 존경을 받는 건 아니다. 한 회사, 한 직종에 오래 있었다고 무조건 존경을 받고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간의 무게는 내 수고와 노력으로 만들지만 실감은 타자가 하는 것이다. 그 전달된 느낌이 세월에 대한 존경과 존중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세월은 스스로 자신의 무게를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박물관을 찾아 들어가는 문화재가 없는 것처럼. 그러나 종종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꼰대 소리를 듣는다. 몇몇 수영장에서 텃세를 부리는 중년 아줌마들도 꼰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실력으로 세월을 입증해야 될 공간에서 소위 짬밥과 나이를 앞세워 초보자와 신참을 다스리려 한다. 더운 여름날 삼계탕 식당 앞에 줄을 서기 위해 받아 든 번호표처럼 자기가 선 자리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긴다. 수영장에선 나이와 상관없이 체력이 없고 느리면 뒤로 가야 한다. 반면 나이가 어려도 실력이 되고 체력이 되면 앞으로 간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 서는 60대의 어른처럼 말이다.      


시간의 누적과 나이를 계급이나 연공서열로 착각 해선 안 된다. 그런 인식이 착각이 되지 않는 공간, 그런 착각조차 너그러이 받아들여지는 공간 - 예를 들어 교회나 시골 청년회, 노인정 같은 곳 - 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간에선 그런 인식과 착각은 당연하지 않다. 나이를 대접받고 싶으면 나잇값을 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절실히 깨닫는 명제다.      


대접받는 시간, 대접받는 어른

어떤 어른이 세월의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수영장을 예로 들어보자. 수영을 오래 한 것이 실력으로 드러난 사람이 그 첫 번째 어른이다. 수영을 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자기보다 뒤에 온 사람에게도 배우려 하는 어른이 두 번째다. 새로 올라온 반이 낯설고 다른 회원들의 실력에 부대껴 좀 쉬운 반으로 가려하는 이를 격려하여 계속 머물게 하는 어른, 그래서 언젠간 자기보다 잘하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어른이 세 번째다. 나 또한 이런 어른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오늘, 수영장에 들어가 루틴을 위한 스트레칭을 하러 작은 풀로 걸어가는 데 기초반에서 중급반으로 옮긴, 이전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귀여운 띠동갑 누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최 선생, 핀 끼고는 턴을 어떻게 하는 거야. 원래 하던 데로 하는 거야? 난 자꾸 미끌리던데. 좀 가르쳐줘.”


아직 체조 전이었지만 누님이 운동하시는 레인에 들어갔다. “평영 턴처럼 하시면 돼요. 평영 턴 배우셨죠?”, “아니.”, “아~ 자, 우리가 보통 턴 할 때는 한 손만 짚고 몸을 휙 뒤로 누이면서 턴을 하잖아요. 그런데 개인 혼영을 할 때, 원래 정석대로라면, 평영 턴을 할 때는 두 손이 다 터치 보드에 닿아야 돼요. 여기선, 이제 끝에 홈을 두 손으로 다 잡아야 되는 거죠. 그러고 나서 판을 살짝 밀면서 엎드린 상태에서 몸을 180도 돌려, 앞을 본 뒤, 차고 나가는 거죠. 이 동작을 응용하는 거예요.” 난, 아직 수경도 끼지 않았기에 선 상태로 간단하게 동작으로 보여줬다. 누님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체조를 하는 동안 누님은 몇 번 연습을 했다. 체조를 대충 끝내고 레인에 다시 들어가 수경을 끼고 직접 동작을 시범 보였다.  “자, 두 손을 대신 후, 엉덩이를 뒤로 휙 돌려보내면서 몸을 앞으로 돌리시고, 그다음에 시선을 약간 앞을 보셔도 돼요. 핀 성능에 따라 앞에 사람이 확 잡힐 수도 있으니까 좀 여유를 가지시고, 거리도 보면 좋죠. 그리고 판을 차고 나오실 때 발끝이 아니라 약간 발뒤꿈치로 차고 나온다는 느낌으로 차셔야 돼요. 핀 앞은 부드러워서 힘을 못 받으니까요. 한번 해보세요.”, 누님은 내 설명을 찬찬히 듣고 몇 번 연습을 했다. 잠시 후 강사가 앞에 등장해 전체 체조를 이끌기 시작했다.


사족...

난 있어서 그냥 서점에 남겨 놓은 들뢰즈의 책 두 권은 아직 팔리지 않았다. 역시 두 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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