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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2. 2023

젊고 능력 있는 회원을 대하는 자세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32

젊은 능력자의 등장

새로운 회원이 합류했다. 매달 중순, 다음 달 등록이 시작되는데, 어떻게, 한 회원이 그 기간을 이용해 시간대를 바꾼 모양이다. 젊은 남자다. 관상부터 일단 수영을 잘할 관상이다. 응, 그런 게 있다. 피부는 하얀데(실외 운동을 전혀 안 했다는 얘기다.) 복근은 쫀쫀하게 잡혀있다. 키는 나보다 5센티미터는 커 보이는데 몸무게는 나보다 최소한 십 킬로그램 이상 적어 보인다. 호리호리한 근육질의 몸매, 전형적인 고급반 총각의 몸매다.      


이 청년을 처음 본 건 수요일, 핀 수영을 하는 날이었다. 마침 이 날, 2번 아저씨가 오지 않았다. 이 청년이 2번을 섰다. 1번은 이 청년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싶었는지 자유형 에스컬레이트 세트의 속도를 바짝 댕겼다. 50미터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까지 갔다가 세 바퀴, 두 바퀴, 한 바퀴로 줄이면서 마무리되는 세트다. 청년은 뒤처지지 않고 1번을 쫓아갔다. 그 이후, 다른 세트에서도 잘 따라갔다. 1번은 그 청년이 대견했는지 운동이 끝난 후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주로 어느 시간에 운동을 했는지, 속도는 괜찮았는지... 괜찮을 리가 없잖아.     


젊은 회원은 언제나 환영

이 청년을 제일 반긴 건 2번 아저씨다. 목요일, 체력 훈련을 하는 날, 이 청년이 3번을 섰다. 4번에 날렵한 아줌마, 내가 5번이었다. 청년은 무리 없이 모든 세트를 소화했다. 운동이 끝나고 샤워를 하고 몸을 닦는 동안 2번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야, 난 이제 3번 해도 되겠던데. 이게, 1번 쫓아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2번 하고 3번 하고 차원이 달라.”, “그렇죠. 이제 총각들한테 맡기고 좀 편하게 하시죠.”, 함께 잠시 웃었다.      


금요일, 스타트 연습이 있는 날, 새로운 청년이 나왔다. 아직 1번은 나타나지 않았다. 체조가 끝나고 몸 풀기가 시작되려 할 때, 2번 아저씨가 새로 나온 청년에게 물었다. “1번 할랍니까? 1번 하이소.”, 청년은 얼떨결에 1번을 섰다. 몸 풀기 킥 세트가 끝나자 1번 아저씨와 3번 아줌마가 등장했다.


순서가 다시 정리됐다. 1번은 1번, 2번 아저씨는 3번으로, 대신 새로운 청년이 2번, 날렵한 아줌마가 4번, 그리고 마침 때맞춰 등장한 해경을 준비하는 청년이 5번, 덕분에 난 6번을 맡았다. 아, 여유로워. 내 뒤로는 젊은 엄마와 체력 좋은 아줌마, 그리고 이 반의 여장부 역할을 하는, 가끔 나오는 검은 수영복의 아줌마와 한 달 만에 수영장에 등장한 아가씨가 자리를 잡았다.      


세트는 가열 찼다. 몸 풀기가 끝난 후, 강사는 1번에게 “다 끝나셨어요?” 질문을 한 뒤, 1번의 끄덕임을 확인한 후 “그럼 자유형 50미터 열 개 하시고 올라오실게요.”하고 말했다. 마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새로 나온 청년은 “오, 50미터 열 개요?”라고 잠시 놀라는 듯했지만, 1번이 어디 그런 놀라움에 신경 쓰는 사람이던가. 1번이 휙 하고 출발했다. 그렇게 다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킥을 하고 스트로크를 하면서 열 개를 소화했다.     

 

스타트 연습을 하기 위해 물 밖으로 나와 섰다. 강사의 주문은 저번 주와 같았다. 접영 네 개, 평영 네 개, 자유형 네 개. 도착하면 물 밖으로 나와서 스타트 지점으로 걸어오셔서 다시 출발하셔라. 새로 나온 총각이 잠시 화장실 간 사이 접영 세트가 시작됐다. 맨 뒤에 있던 총각은 평영 세트가 마무리될 즈음 내 뒤에까지 따라붙어 걸어왔다. 그를 먼저 보내며 말해줬다. “자, 이제 자유형 네 개.”, 청년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내 앞으로 갔다.   


힘들 땐 언제든 말해라.   

그렇게 운동이 끝나고 난 작은 풀에서 몸을 식힌 후 샤워장에 갔다. 마침 총각 두 명이 샤워를 하고 있었다. “야, 우리 총각들 덕분에 오늘 좀 수월하게 했네. 다들 빠지지 말고 잘 나와요. 늦게 오지 말고.”, 총각 두 명이 나란히 미소를 지었다. 난 새로 나온 총각 옆에서 샤워를 시작했다. 그 총각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야, 잘하시던데요.”, “하이고, 이제 좀 따라 갈만 하지. 한 6개월 걸렸나?”     


샤워를 끝내고 몸의 물기를 닦아내면서 2번 아저씨까지 합류해서 세 남자의 토크가 이어졌다. 새로 나온 총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자유형 할 때, 몇 번째 바퀴인지 모르겠는데, 오, 약간 쳐진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와, 쫓아가려고...”, 그때 내가 2번 아저씨를 보며 말을 받았다. “아니 그럴 땐, 얼른 터치를 해주셔야지. 힘들어서 안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자 새로 나온 총각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을 이었다. “뭐, 돌아가면서 쫓아갑시다. 빠지지 말고 잘 나와 주세요.”     


능력자를 대하는 자세

조직이나 기업, 동호회나 동아리, 심지어 교회나 절 같은 곳에 여러모로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새로 나타나면 어떤 기분이 드나?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나? 괜찮다. 아직 젊다는 증거다. 경쟁심도 있고 투쟁심도 남아 있다는 증거다. 대신 자기혐오나 자기 멸시에만 빠지지 마라. 상대방의 약점을 찾으려 혈안이 되지도 말고 그 사람보다 뭐라도 나은 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도 마라. 그건 열등감에 불과하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내가 속한 조직에 쓸만한 인재가 들어오고 출중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새로 들어오면 “우리”의 가치가 높아진다. 물론 내부적으론 엄청난 경쟁이 발생할 수 있지만 그 경쟁 속에서 함께 성장하는 건 분명하다. 그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그 사람 또한 새로운 환경과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그리고 자신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따라 잡히지 않고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우리”는 함께 성장한다.     


우리 수영장의 어벤저스 

젊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시기는 끝났다. 시기나 질투 같은 것도 없다. 슬슬 그런 친구들의 도움을 기대하는 나이가 됐다. 더 나아가 그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선뜻 도와줘야 할 나이도 됐다. 이제 고급 A반에서의 수영도 할만해서 인지 여유가 생겼다. 내 뒤의 회원들이 지쳐서 마지막 랩을 포기하려 할 때, 박수를 쳐주고 구호를 외치며 독려하는 것이 우리 반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다. 다들 힘들어할 때 가벼운 농담으로 새로운 원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내 역할이다.


이런 역할을 자임한 건, 이 나이를 먹고 보니 이런 시간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숨이 턱에 차도록 운동을 하고, 서로를 독려해 가면서 한 바퀴라도 더 가기 위해 애를 쓰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      


모처럼 1번에겐 자극이 되지 않을까? 젊고 속된 말로 “얄쌍”한 외모와 몸매를 가진 데다가 수영 체력과 실력도 만만치 않은 회원의 등장이 말이다. 그 회원도 이렇게까지 시간을 꽉 채워 숨 쉴 틈 없이 수영을 하는 반은 처음이라고 했다. 직업 때문인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여러 시간대를 옮겨가며 수영을 해 온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흘려듣지 않았다. 본인도 이 반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정확히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비유를 하기에는 좀 이상할 수 있지만 회사든, 조직이든, 교회나 절이든, 그리고 수영 클래스든 맘에 안 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박차고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오래 산 부부도 이혼하는 마당에 그런 데서 뛰쳐나오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우리 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운동량과 템포가 힘들어서 고급 B반으로 다시 가서 운동하는 사람도 많다. 시간대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은 즐겁게 하고 있다. 자신들의 실력과 체력이 나아지는 걸 체감하고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에 젊은 실력자가 합류했다. 그야말로 반의 뎁스(Depth)가 깊어지는 순간. 환영할 일이다. 내 뒤의 아줌마들은 그가 등장한 첫날, 맨 뒤편에서 템포를 조절하며 쭈뼛대는 그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보냈다. 딱 봐도 잘하게 생겼으니까. 그런 그는 우리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며 요 며칠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제 슬슬 가을로 접어든다. 수영장에 진짜 수영에 미친 사람만 남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안 그래도 우리 반엔 수영에 미친 사람뿐인데 누가 봐도 미친 “젊은 놈”이 새로 합류했다. 가을의 수영장이 기대되는 건, 나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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