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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Nov 01. 2023

달라질 결심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34

벌써 11월

달이 바뀌었다.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더라.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기엔 어색한 달이다. 그런가?      

달이 바뀌는 첫날, 수영장에 처음 나온 사람이 있다. 반을 바꾼 사람도 있다. 새달의 첫날이 이렇게 어정쩡한 수요일 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달보다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다. 다섯 레인 모두 대부분 익숙한 사람들이다. 사람이 많지도 않다. 대체로 달이 바뀌면 평소보다 사람이 많이 오는데 말이다. 이 또한 수요일 탓으로 돌려야 할까?     


새로운 시작이 어색한 달

앞선 글에서 썼듯이 자유형 스트로크의 미묘함을 캐치했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큰 변화를 가져오는 포착이었다. 이를 계기로 11월은 체력을 더 높이고 하체의 힘을 더 키우기로 결심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속도 내실을 다지기로 한 것이다. 11월에, 사소하나마 달라질 결심을 하기로 한 것이다.    


뭔가를 시작하기에 어색한 달은 없다. 새달의 첫날이 월요일과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처럼, 월급날이 불타는 금요일과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거의 없는 것처럼 뭔가를 하기 좋은 때를 기다려 시도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새로운 날, 새로운 마음으로 하고 싶으면 그저 다음 주나, 다음 달부터 하면 된다. 다음 계절은 어쩐지 좀 모호하니까.      


수영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기초반에서 몇 달 허우적대고 나면 어느 달 문득 중급반으로 간다. 어제까지 기초반이었던 사람이 달이 바뀐 내일이면 중급반이 되는 것이다. 학교처럼 개학일이나 개강일을 되도록 월요일로 잡지 않는다. 그저 달이 바뀌면 변해야 한다. 마음의 준비는 그전에 이미 했었거나, 아직 못했다면 하면서 다잡아야 한다. 갑작스럽겠지만 별 수 없다.      


당연하게도 모든 운동이 그렇듯 수영 또한 시작하기 좋은 달이나 계절은 없다. 만약 올여름휴가기간 동안 호텔 수영장에서 우아하게 수영을 하는 사람이 부러워 내년엔 수영을 배우겠다고 결심했다면 그냥 이번 달부터 시작하면 된다. 다음 달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러면 된다.      


치욕과 굴욕

일본의 내 또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에서 혁명의 조건으로 치욕을 말하며 이것을 굴욕과 비교했다. 치욕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가, 이것을 용납해도 되는가, 이 변하지 않는 세계를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후 느끼기 시작하는 부끄러움이다. 이후, 계속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이 부끄러움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인식하는 순간, 혁명이 일어난다. 반면 굴욕은 이 부끄러움을 남 탓으로 돌리며 치욕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건 제도 탓이다. 내가 이렇게 살이 찐 건 패스트푸드와 격무와 스트레스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이 이런 것은 계층 구조와 사회와 자본주의 때문이다. 이런 것이 바뀌지 않는 이상 나의 삶 또한, 우리의 삶 또한 바뀔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굴종적으로 치욕을 감내하며 사는 것이 굴욕적인 삶이다.      


좀 이상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얼마 전 우연히 한 영상을 봤다. 이전부터 트위터에서 유명했던 한 일본남자의 영상이다. 그전에, 그러니까 몇 년 전에 우연히 이 남자의 사진을 보고 도대체 이런 놈은 무슨 재주로 이렇게 여러 여자를 매일 바꿔가며 잠자리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남자의 영상을 보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남자, 몸매가 좋았다. 테크닉도 좋았고. 뭐 얼굴도 잘 생겼으려나? 그건 모르겠다. 그 영상을 보다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하고 싶으면, 뭐 별 수 없지 운동이라도 더 열심히 하자.      

뭐,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침대에서 힘이 드는 것도, 아내의 사인을 모른 척하는 것도 용납할 수 있다. 사회적 스트레스와 풀리지 않는 카피와 훌쩍 커버린 딸의 눈치를 보느라 그렇다고 핑계를 대도 괜찮다. 약간의 굴욕감을 느끼겠지만 치욕적이진 않다. 그러나 그걸 용납할 수 없다면 침대에서의 낭패는 치욕이고, 치욕을 느꼈다면, 별 수 없다. 뭐라도 먹던가, 운동을 더 하던가, 술과 담배를 줄이던가. 달라질 결심이 섰다면 뭐라도 하는 수밖에 없다.    

   

뭔가 시작하기에 좋은 달은 없다.

어째, 이야기가 좀 심각해졌다. 다시 수영 이야기로 돌아가자. 안다. 11월은 수영을 시작하기에 좋은 달이 아니다. 온화했던 10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 주부턴 거짓말처럼 추워질 것이다. 출근 전, 새벽 밖에 시간이 없다면, 당신은 따뜻한 이불을 걷어내고 나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퇴근 후 밖에 시간이 없다면 많은 술 약속을 뒤로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낯선 물에서 허우적대야 할 것이다. 이래저래 불편하고 민망한 시간들일 것이다. 춥고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의 연속일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12월은 11월보다 더 바쁘고, 1월과 2월은 부산하며, 3월은 개강과 개학 준비로 바쁘고, 4월은 꽃놀이를 가야 하고, 5월은 가정의 달이며, 6월에는 다가온 여름휴가에 깜짝 놀라 급하게라도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거나 급 다이어트라도 해야 한다. 7월, 8월, 9월, 10월.... 우리 앞에 모든 날과 달과 해와 세월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완벽한 변명을 허락한다. 아니, 그 변명의 완벽한 공범이다.   

  

그러니 어느 달, 어느 날을 지렛대 삼아 새로운 도전으로 뛰어들 생각이랑 아예 말아라. 수영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달이 11월이다. 물에서 허우적대며 수영을 배우기에 딱 좋은 계절이 겨울이다. 달라질 결심이 섰다면, 다음 달, 수영장에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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