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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Nov 02. 2023

금기의 목록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35

후회스러운 저녁 메뉴

저녁에 회를 먹었다. 예정된 메뉴는 아니었다. 하굣길, 딸과 함께 걸으며 저녁 메뉴를 물었다. 며칠 전 아내가 파스타 소스를 사 온 게 기억나서 파스타 어떠냐고 물었다. 딸은 괜찮다고 했다. 딸은 그 길로 집 근처에 있는 영어 학원으로 가고 난 집에 들어가 메신저로 아내에게 물었다. 파스타가 어떤지. 아내는 뜬금없이 호래기 얘기를 꺼냈다. 며칠 전 슈퍼에 갔는데 호래기가 싱싱해 보였다며 말이다. 데쳐서 먹으면 맛있지, 하고 답을 했더니 아내는 그걸 파스타에 얹어 먹자고 했다. 오징어 회는 주말에 먹자면서 말이다. 그러다 불쑥 회 먹을까 하고 묻기에 딸이 좋아하니 그러자고 했다. 파스타에서 시작한 저녁 메뉴를 고르는 의식의 흐름이 호래기와 한치를 거쳐 회에 머문 것이다.     


먹고 나서 후회했다. 매운 고추와 마늘을 먹었다. 부산에선 회를 배달시키면 초장과 간장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집만의 고유한 비법이 담긴 쌈장도 같이 온다. 짜고, 맵고, 달고, 시고... 온통 자극적인 것뿐이다. 백세주 한 병이 오히려 맑고 부담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소화가 잘 안 됐다. 그래도 열한 시 반에 잠들었다.  

    

눈 떠보니 다섯 시, 작은 볼 일을 보고 다시 누우니 배가 아렸다. 이럴 줄 알았다. 결국 옷을 챙겨 입고 거실로 나왔다. 큰 볼 일을 봤다. 다시 누울 기분이 아니다. 공부방에 들어가 책을 펼쳤다. 사사키 아타루와 소설가 엔조 도의 대담이 재미있게 펼쳐졌다. 그러다 불쑥, 금기의 목록이 떠올랐다. 이제 이 목록을 만들어야겠구나 싶었다.      


새로운 리스트가 필요할 때

장바구니는 쇼핑 리스트이자 Wish list다. 사야 할 것과 사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다. Bucket List는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다. 해야 될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야 될 것과 사고 싶은 것들의 목록은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내일의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우리는 오늘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리스트는 줄지 않는다. 젊으면 젊을수록 이 목록이 더 길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이 목록을 줄이는 대신 금기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사지 말아야 할 것, 아니 엄밀히 말하면 버려야 할 것의 목록,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만둬야 할 것의 목록, 좀 줄여야 할 것, 아니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과하게 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이 필요하다. 절제와 검소한 삶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과 돈, 몸뚱이와 체력을 어디에 쓰는 지를 통해 무엇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당연한 얘기다. 물론 이것들이 무한정 많은 사람은 소위 선택과 집중이 필요 없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은 사고 싶은 책 중에서도 뭘 사야 할지 골라야 한다. 그 고름의 행위는 그 사람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기업과 공공기관이 좋아하는 용어를 빌린다면 일종의 핵심가치의 실현이다.      


내 글의 독자라면 알겠지만 난 심플하게 산다. 아내와 딸, 일로써의 글쓰기와 취미로써의 글쓰기(그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긴 하지만), 수영과 독서와 맥주. 이것뿐이다. 적게나마 버는 돈의 대부분은 아내의 관리 하에 가정을 위해 쓰이고 난 약간의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 수영과 독서와 맥주에 쓰고 있다. 이마저도 맥주는 서서히 줄이고 있다. 출고가격이 오른 이유도 있지만 맥주의 무거운 질감이 맥주보다 더 좋아하는 수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

돈을 버는 일이 삶의 중심일 수는 없다. 위와 같이 생각해 보면 돈을 쓰는 일이 삶의 중심이고 그 쓰임새가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이자 가치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명함이 아니라 당신의 카드 명세서가 당신을 더 정확하게 말한다는 말이다.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가 하는 질문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며, 무슨 재미로 사는가 하는 질문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질문들의 대답이 삶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한정된 체력과 시간과 돈을 갖고 있다. 몸뚱이도 하나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싫든 좋든 선택의 삶에서 포기의 삶으로, 소유의 삶에서 덜어냄의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풍경은 간결해지고 절제된다. 두 집 살림이라는 말은 얼마나 초자연적이며 초능력적인 말인가.   

  

나이가 들수록 내가 돈을 쓰지 않는 사물의 소유자와 그 소유를 부러워하는 건 시간 낭비다. 더 나아가 나와 다른 형태의 삶과 라이프스타일을 흠모하는 것 또한 시간 낭비다. 당신의 명함과 함께 당신의 카드 명세서가 당신을 말하니 말이다.


난 Swimmer다. 당신에게 이 단어가 낯설다면 당신은 Swimmer가 아니다. 이 단어는 수영하는 사람들끼리만 쓰는 속어가 아니다. 캠브릿지 사전에도 나오는 단어다. 이렇듯 단어와 단어 사이에도 취향의 장벽이 존재한다. 게이머에겐 그들의 삶과 언어가 있고 스위머에겐 우리의 삶과 언어가 있다. 게이머들이 PC와 의자의 삶을 택했다면 우린 물속의 삶을 택했다. 서로의 삶을 비난할 필요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다르게 살기로 작정하고 선택했을 뿐. 그 작정과 선택 뒤에 만난 여정을 후회 없이 갔고 가고 있으며 갈 뿐이다.

     

그렇게 목록을 만들고 있다. 남은 인생동안 한 여자의 남자로, 한 소녀의 아빠로, 취미와 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그리고 Swimmer로 더 충실하게, 최대한 완벽에 가깝게 살기 위해, 그만하거나 자제하거나 줄여야 하거나 버려야 할 것들의 목록을 만들고 있다. 일단은 음식의 종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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