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Nov 06. 2023

결심이 일상이 될 때까지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36

나머진 왜 안 올까?

월, 수, 금. 열한 시 수영의 다음 시간은 할머니들의 아쿠아로빅이다. 열한 시 오십 분쯤 되면 아쿠아로빅 강사가 등장하는데, 수영 강사들이 레인을 치우는 것을 도와준다. 저번 주 수요일이었다. 레인 치우는 걸 도와주는 우리 반 강사에게 아쿠아로빅 강사가 한마디 한다. “이 반은 몇 명 안 되네.”, 강사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한다. “아니에요. 등록은 이번 달에도 스물일곱 명 했어요. 그런데 맨 날 오는 분만 와요.”, “야, 그럼, 뭐 가정 방문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이가?(이곳의 강사들은 학교나 업계의 선후배로 이뤄져 있다.)”, 두 강사는 잠시 웃었다.


“아니, 다른 분들은 돌아가면서 오시는 건지...”, 우리 강사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풀 안, 내 옆에 서 있던 귀여운 글래머 아줌마가 한마디 했다. “등록은 되어 있는데 안 나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거기에 내가 농담을 덧붙였다. “뭐, 여고괴담 같은 거죠. 졸업은 안 하면서 계속 학교는 다니는데, 그게 누군지는 모르는, 뭐 그런.”, 잠시 둘이 웃었다.     


결심 뒤에 따라와야 할 것들

결심이 일상이 되는 건 어렵다. 결심을 일상으로 만드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성실하다고 한다. 아니 그전에 독하다고 말을 해야 하나? 내 처남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뭘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바로 시작하고 꾸준히 한다. 내가 늘 처남에게 헬스를 권하는 이유다. 일단 하기만 하면 정말 꾸준히 해서 몸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처남은 운동에 영 관심이 없다.      


앞선 글에도 썼듯이 수영을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수영장에 등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시간이 나고 돈이 있으면 된다. 수영복을 사고 수모와 수경을 사는 것도 쉽다. 수영장에 들어서는 것도 문제없다.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볼 것 같아 걱정이었지만 다들 물속에 고개를 처박고 앞으로 가느라 정신이 없다는 걸 보고 오히려 안도감이 들 것이다.       


가장 어려운 건, 그렇다, 내일도 오고 그다음 날도 오고, 다음 주에도 오고, 다음 달에도 오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묵묵히 수영장에 오는 것이다. 이것이 제일 어렵다. 이렇게 꾸준한 사람이 드물기에 강사는 맨 날 보던 사람만 보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안 오는 사람도 등록은 한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은 것이다. 다음 달에는 좀 여유가 생기겠지, 잡다하고 번잡한 일들이 좀 적겠지, 일에 좀 여유가 생기겠지, 이런 바람 속에 자신의 게으름을 숨기고 등록을 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 삶이 그렇게 여유가 있던가? 앞선 글에도 썼듯이 1월부터 12월까지 지루하게 넘길 달이 한 달이라도 있던가?      


힘들어도 따라붙어야 한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오늘도 나올 사람은 나왔다. 오늘의 마지막 세트는 자유형 75m에 접영 25m가 한 세트로 두 세트를 하는 것이었다. 그전에 평영의 킥을 위한 다양한 드릴을 하면서 시간을 다 보냈다. 1번엔 고유 1번, 2번엔 새로 합류한 젊은 아빠, 3번엔 원래 2번, 4번엔 이번 달에 등장한 덩치 좋은 30대, 5번엔 날렵하고 실력 좋은 아줌마, 6번이 나였다. 그 뒤로 몇 명이 더 섰다. 첫 번째 세트, 1번이 속도를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뒤늦게 깨달은 자유형 스트로크로 열심히 따라갔다.


한 바퀴(50m)가 끝나고 턴을 하려고 고개를 살짝 들었을 때 날렵한 아줌마와 너무 붙었다는 걸 알았다. 바꾼 스트로크의 효과다. 그렇게 자유형을 끝내고 뒤를 돌아보니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 막 턴을 해서 오고 있었다. 1번은 제법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들이 제법 올 때까지 기다린 후 접영을 시작했다. 내 뒤에 다다른 한 사람이 숨차며 말했다. “와, 너무 빠르다.”, 그래도 다음 세트도 따라붙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내 뒤에 서곤 하는 체력 좋은 엄마였다. 나만큼 꾸준히 나오는 사람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두렵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오랫동안 꾸준히 나온 사람과 수영을 하는 것이 두렵다. 나만 처지는 것 같고 나만 힘든 것 같다. 그래서 쉬고 있는 나를 보는 것이 부끄럽고 두렵고, 이런 나 때문에 전체 반의 템포가 처질까 봐 두렵다.      


미룬다. 무엇을 미루는 걸까? 내일 가도 된다고, 다음 주부터 하자고, 이번 달엔 거의 가질 못했으니 다음 달엔 열심히 하자고, 이번 달엔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다음 달엔 술도 좀 적게 먹고 야식도 좀 적게 먹으면서 몸 관리해서 컨디션을 회복하여 열심히 수영을 하자고 다짐할 것이다. 미룬다기보단 핑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미루기 위한 핑계, 미뤄도 당연한 핑계를 찾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쉽지 않다. 나 또한 그렇다. 일주일에 두 번은 뛰겠다고 조깅화를 새로 샀지만 일주일에 한 번 뛰는 것도 쉽지 않다. 이틀에 한 번 꼴로 하체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일주일에 두 번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술을 줄이고 책을 더 많이 보겠다는 다짐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별 수 없다. 등록을 했다고 해서 수영장에 일주일에 다섯 번을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두세 번 나가면 된다. 돈이 아깝지만, 몇 달째 수영장의 발전을 위해 돈을 태우기만 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 그러니 매일 나가야지 다짐하여 그걸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지 마라. 그저 일주일에 두세 번은 나가야지 마음먹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하다 보면 는다. 오늘, 정규 강습 시간이 끝난 후 작은 풀에서 자유형 스트로크를 다듬고 있는데 중급반의 귀여운 누님이 들어오셨다. 오자마자 하소연이다. “최 선생, 나 평영이 너무 안 돼. 안 나가. 평영만 한다 그러면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니까.”, “저도 그랬어요. 뭐, 지금도 그렇죠. 그런데 하다 보니까 늘더라고요.”, “그래?”, “예, 물 잡는 것 많이 연습하시고, 상체로 꽂아 들어가는 감을 익히시면 점점 좋아지실 거예요. 저도 이제 좀 자유형을 알 것 같은데요. 뭐.”, 이 짧은 대화 후, 누님은 다시 평영 연습에 돌입하셨다.


오늘, 우리 반도 평영 드릴 연습을 했다. 강사가 그랬다. “다른 영법은 하면 됩니다. 막, 깡을 부리고 죽어라 하면 따라갈 수 있고 잘할 수 있어요. 그런데 평영은 좀 타고나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이 정도 수준이면 됩니다. 대신 그저 꾸준히 하시고 발목과 고관절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운동을 같이 해주시면 됩니다. 뭐, 그래도 타고난 사람한테는 안 되는 영법이 평영이에요.”     


반대로 생각하면 평영을 제외한 다른 영법은 열심히만 하면 어느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등록을 했다면 열심히 해라. 지금 잘 안 된다고, 난 물하고 맞지 않는다고 냅다 그만두지 말고 꾸준히 해라. 일주일에 네다섯 번이 어려우면 두세 번 나가라. 두세 번도 어려우면 일단 한두 번이라도 나가라. 그렇게 꾸준히 나가면서 그 횟수도 늘려라. 그러다 보면 그 순간이 온다. 접영에 눈을 뜨는 순간, 자유형 스트로크의 미묘한 차이를 캐치하는 순간이 말이다.


아직 당신이 등록을 하지 않았다면, 등록하면 된다. 등록을 했는데 앞서 말한 사라진, 등장하지 않는 이들 중 한 사람이라면 다음 주부터 자주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성실하여 어느 날 달라진 당신을 만나길 바란다. 당신도 놀라고 나도 놀라게 할 달라진 당신을.

매거진의 이전글 금기의 목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