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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Nov 10. 2023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38

접영의 벽 앞에서

며칠 전 일이다. 강습이 끝나고 마무리 운동을 위해 연습 풀로 가던 도중, 우리 레인 끝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옆 레인, 기초반에서 한 아가씨가 접영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잘 안 됐다. 내가 서있는 끝에 다다랐다. 레인을 사이에 두고 있다. 숨을 고르고 있는 아가씨를 가까이서 보니 잘해야 대학교 1, 2 학년쯤 되어 보인다.      


“잘 안 되죠?”, 무심히 물었다. 아가씨가 허탈하게 웃으며 답한다. “네, 뭔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유튜브로 영상을 보긴 봤는데... 잘 안 되네요.”, “너무 서둘 필요 없어요. 영상만 보고, 벌써 접영이 잘 되면 우린 뭐가 되겠어요.”, 아가씨가 웃는다. “일단 팔부터 쭉 펴고... 접영이 뭐, 수영의 꽃 아니겠어요? 폼이 나야지. 그러니 일단 팔부터 쭉 펴야죠. 뭐 앞으로 가는 거야,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거고. 결국 리듬을 찾게 돼요.”     


이후, 몇 가지 팁을 알려줬다. 물속에서 몸을 억지로 꺼낼 생각하지 말고 팔로 물을 뒤로 보내는 힘으로 몸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느껴보라고 했다. 그 느낌을 잡아내는 방법도 알려줬다. 풀에 서서 큰 절을 준비하듯이, 가슴쯤에 두 손을 포개어 올린 뒤 그대로 물을 밑으로 쭉 내려 밀어 보라고 했다. “어때요?”, “아, 물이 밑으로 내려가네요.”, “그렇죠? 이제 쭉 밀어내면서 살짝 점프해 보세요.”, “오~”, “느껴지죠? 그걸 엎드려서 뒤로 물을 밀어내면 상체가 나오는 게 접영 할 때 물 밖으로 나오는 동작의 기본이에요.”     


나하고 물이 안 맞나?

안 되면 막연하고 두렵다. ‘도대체 강사가 하라는 대로 하는 데 내 접영은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이건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손을 흔드는 거랑 별 차이 없잖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옆 레인, 고급 A반에서 접영을 한다. 1번이 날아가고, 2번이 날아가고, 3번과 4번도 날아간다. 그 뒤에 나보다 나이 많은 아줌마들도 휙휙. 슬슬 자괴감에 빠진다. 이거 나한테 접영이 안 맞는 거 아냐? 애초에 수영하고 나하 곤 상극인가? 엄마가 말해준, 정초에 듣고 와 전해 준 점쟁이 말도 생각난다. “딸하고 물 하고 안 맞아.”    

 

물론 접영엔 다른 영법보다 근력이 더 필요하다. 당연히 남자가 여자보다 잘한다. 골반이 유연한 여성이 남성보다 평영을 잘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접영의 차이는 평영의 차이보다 크다. 앞서 썼듯이 남자들은 골반의 뻣뻣함을 상체의 근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반면 여자들에겐 접영의 근력 차이를 좁힐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 회원들 중 일부가 강사가 접영을 시키면 겁부터 집어먹는 이유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접영을 위해 틈틈이 근력 운동을 한다. 무거운 뭔가를 들지는 않고 다이소에서 구할 수 있는 탄력 밴드를 사서 가볍게 팔 근력을 유지하고 높이는 운동을 한다. 이렇게 운동을 해도 몇 세트 후에는 팔을 물 밖으로 꺼내는 것이 쉽지 않다. 결국 견갑골의 힘을 빌려 팔을 띄운다.   

  

극복하지 못한 두려움

금요일, 스타트 연습을 하는 날이다. 고급반이 되어도 스타트를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들을 위해 강사는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스타트의 기본자세를 가르쳐줬다. 다리의 위치와 무게 중심의 이동에 대해서 섬세하게 짚어줬다. 두 발을 나란히 놓든, 두 발을 앞뒤로 놓는 크런치 자세든 결론은 무게 중심을 뒤에서 앞으로 이동하면서 그 힘으로 자연스럽게 물로 뛰어드는 것이다. 이걸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소위 배치기를 하거나 수경이 뒤집어지거나 심지어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기도 한다. 너무 긴장해서 말이다.    

  

수영을 배우다가 그만두는 사람 중에선 접영이나 평영에 좌절해서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 수영을 오래 한 사람 중에서도 플립턴(선수들이 하는 한 바퀴 휙 도는 턴)이나 스타트를 못하거나 안 하는 사람이 있다. 접영과 평영이라는 벽을 만나 수영을 그만두는 사람도, 플립턴과 스타트를 못하는 고급반 사람도 이유는 같다. 두렵고 힘들다. 힘들고 두렵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법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묘수는 없다. 마법 같은 노하우도 없다. 우선은 뭔가를 잘하고 싶다면 포기하지 않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좀 쉽게 하고 싶다면 다니는 수영장에서 그 영법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나 연습 풀에서 연습하는 나 같은 고급반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폼을 봐달라고 말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런 용기를 내야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더 발전된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다. 먼저 간 사람에게 길을 묻는 것이다.     


내가 연습 풀에서 마무리 운동을 할 때, 그 풀에서 운동하는 기초반 사람이나 앞서 등장하곤 하는 귀여운 누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곤 하는 것도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배운 거라도 제대로 해내고 싶어서 연습 풀에서 연습할 때 내게 조언을 해주던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습과 동행

물론 꾸준한 연습은 어렵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감독의 말을 들어보면 요즘 영상 기자재 중고 사이트에 제법 고급 사양의 카메라들이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조명이나 촬영용 드론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고 한다. 어느 날 감독이 찾던 카메라와 드론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구매를 위해 통화를 했다고 한다. 통화 도중 왜 파시냐고 물었더니, 판매자가 말하길 편집을 하는 것이 너무 귀찮고 힘들고 어려워서 영상을 그만두기로 했단다.


카메라도 흔하다. 작동법도 익히기 쉽다. 이런저런 노하우를 담은 책과 영상도 넘쳐난다. 당장 카메라만 있으면 그럴듯한 영상을 촬영할 수 있다. 여기에 조명까지 있으면 더 좋고, 드론까지 있으면 표현의 영역은 넓어진다. 그러나 편집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가 글을 배우는 것이라면 후자는 글을 쓰는 것과 같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누구나 다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장면을 포착하고 많은 영상을 카메라에 담아도 그 영상을 배열하여 의미를 증폭시키는 건 편집이다. 그래서 영상 편집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일종의 말투나 문체와 같다. 자신만의 시선과 고유의 리듬이 있어야 한다. 편집 프로그램은 그저 요리사 손에 쥐어진 칼과 같은 것이다. 결국엔 그 칼이 제 구실을 하려면 요리사의 솜씨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단계를 뛰어넘기 위해선,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각고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분야가 있다. 그 넘는 것이 쉽지 않아 먼저 간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인 분야가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써야 겨우 그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수고와 노력과 시간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타고난 두뇌나 신체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는 두려움이 아니라 무한정일 것 같은 수고와 노력과 시간의 부피가 주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의 가장 손쉬운 해결은 포기다. 난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나 또한 그럼 경험이 있다. 그러나 정말 잘하고 싶고 좋아하는 분야라면 그 두려움을 무릅쓰고 나가야 한다. 몇 달만 참으면 접영으로 훨훨 날 수 있는데, 그걸 못 참아 수영을 그만둔다니... 아쉽지 않나?      


혼자 가기 힘들면 함께 가달라고 하면 된다. 먼저 간 사람에게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봐도 된다. 어디든 나 같은 오지랖 넓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안 그런 척 하지만 사실 내 또래 남자들은 묻기만 하면 자기 노하우를 술술 분다. 미인계도 필요 없고 뇌물도 필요 없고 전기 고문이나 물고문도 필요 없다. 그저 “아, 접영이 정말 안 되네요.”나 “자유형 할 때 물을 어떻게 잡는 거예요?” 같은 질문만 던지면 아주 그냥 술술 풀어낸다. 자기는 몇 달, 몇 년에 걸쳐서 터득한 노하우를 아까운 줄 모르고 말이다. 왜냐고? 내 나이 정도 되면 다들 ‘이거 뭐, 죽을 때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하는 마인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혼자 하다, 하다 힘들면 손을 내밀고 도움을 청해라.      


그렇게, 함께 차가운 물에서 이 시린 겨울을 버텨보자. 힘들어도 버티면서 함께 수영장의 물을 데워보자. 차가운 물이 슬슬 미지근해질 봄이 오면, 한 마리 돌고래처럼 휙휙 날아가는 당신을 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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