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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Nov 23. 2023

나는 나를 상상한다.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42

좋은 폼의 다른 목적

앞서 썼듯이 좋은 자세, 최적의 폼을 익히는 건 운동 효과와 효율면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또 하나, 보기 좋다. 반대로 말하면 보기 좋은 폼이 운동 효과와 효율을 높인다고 볼 수 있다. 농구 동호인들이 스테판 커리의 슛 폼을 연구하는 것도, 축구 동호인들이 손흥민 선수의 감아 차기를 해부하는 것도 그 폼이 최적이자 최고의 폼이거니와 그렇게 던지고 차야 멋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보기에 멋있으면 결과도 좋다. 아니, 이건 반대로 말해야 할까? 운동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선 멋진 폼과 자세는 필수다. 


어떤 스포츠든 초보 때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모른다. 자신의 움직임이나 폼을 대상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 축구라면 공이 오면 차고, 야구라면 공이 날아오면 친다. 농구라면 림을 향해 공을 던질 뿐이다. 수영은 말할 것도 없다. 강사가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선다. 시키는 분량을 다할지 걱정부터 앞서는 마당에 지금 뭔가를 수행하고 있는 나 자신을 이미지화해서 머릿속에서 대상화하는 건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나는 나의 플레이를, 그 플레이 도중에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NBA를 보다 보면 애매한 상황에서 파울이 불리면 선수들이 고개를 들어 경기장 중앙에 달린 대형 전광판에 나오는 리플레이로 방금 전 플레이를 확인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스포츠에선 이런 경우가 드물다. 게다가 리플레이는 엄밀히 말하면 플레이 이후의 확인이다. 그러니까 플레이하는 도중의 내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플레이를 하면서 지금 내가 어떤 플레이를 하고 있으며,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다면 어떨까? 특히 마라톤이나 수영처럼 팀스포츠가 아닌 혼자만의 레이스인 경우, 그 과정에서 자신의 폼에 대해 냉정하게 떠올리고 성찰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나를 상상하는 것의 힘

그렇다면 고칠 수 있다. 수영이나 마라톤을 하는 도중에라도 자신의 폼이 어떤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고, 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잘하는 선수의 동영상을 보면 고칠 수 있다. 눈앞의 이미지와 머릿속의 이미지가 서로의 대조군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많은 초보 수영 동호인들이 그렇게 많은 수영 동영상을 보고도 자세를 고치기 힘든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제대로 된 자유형 폼을 익힌 후엔 수영을 하는 도중에도 내 폼이 어떤지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이건 상당히 중요하다. 몇 세트를 하다 보면 힘들다. 예를 들어 며칠 전엔 부력을 높여주는 풀부이 - 수영장에선 주로 땅콩이라 부르는데 실제로 까지 않은 땅콩 모양이기 때문이다. 스트로크의 교정을 위해 캐치 동작에 집중하는 훈련을 할 땐 이것을 다리 사이에 끼고 수영을 한다. 평영의 경우엔 킥을 찰 때 너무 넓게 차지 않도록 교정하기 위해서 끼기도 한다. -를 끼고 자유형 100미터를 다섯 세트 했다. 이후 잠시 드릴을 연습한 후, 풀부이 없이 자유형 50미터, 열 개를 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지친다. 당연하다.      


지치면 폼이 흐트러진다. 강사가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쳐주고 무수하게 반복해서 몸에 익힌 완벽한 스트로크도, 정교하고 리드미컬하게 차는 킥도, 물속을 찔러들어간 팔을 축으로 부드럽게 돌아주는 롤링도 순간 흐트러진다. 앞사람과 벌어진 것 같은 불안함이 몸을 흔든다. 


턴을 하고 정신을 차린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야. 내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자유형 폼을 만들기 위해 나 스스로를 진정시킨다. 스트로크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킥의 리듬을 되찾는다. 따라가기 위해 허우적 대는 대신 길게 미끄러지는데 집중한다. 호흡을 고른다. 


현실이 되지 않은 상상, 상상하지 않은 현실

내가 상상하는 내가 있었고 있다. 있었던 나를 실제로 본 경우는 몇 번 안 된다. 언젠가는 만나리라 기대했던 상상 속의 나는 어디선가 길을 잃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여정을 애써 달려왔는데 그 나를 만나지 못했다. 많이 그랬다. 그걸 쉬운 말로는 실패라고 한다.      


반면 상상 이상의 나를 만나기도 했다. 현재도 만나고 있다. 열두 살짜리 소녀의 아빠가 된 나는 상상한 적이 없다. 한 여자랑 이십 년 가까이 살고 있는 나를 상상한 적도 없다. 좋아하는 일을 이십 년 넘게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한 적도 없다. 이렇게 상상하지도 않았지만 상상 이상의 나를 만날 수 있다. 상상했던 나를 만나지 못한, 실패라는 굴곡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버티며 살다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경험을 한 적도 있다. 내 능력 밖이어서, 내 상식 밖이어서 내 상상의 영역에 자리 잡을 수 없었던 "나의 모습"이었다. 결국 상상은 임의(任意)적이다. 마음먹은 대로 상상할 수 있다는 건 그 상상이 마음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상상은 그렇게 내 상식과 경험의 틀 안에서 발생한다. 우린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담담히 그리는 나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쉰이 넘어서까지 살아남아보니 그럭저럭 나를 대상화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의 나를 담담하게 볼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미팅을 앞두든, 드문드문 있는 강연에 불리어 가든 대체로 담담하다. 그곳에서 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고 그려볼 수 있기에 그러할 것이다.      


인생이든, 수영이든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이나 막 재미 붙인 사람은 그 열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변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담담히 상상해 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잘 가고 있는지, 그 길을 가고 있는 내 모습이 어떠한지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땐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이미지를 만나라. 막연하게 상상하는 것이 힘들다면 이미 그리 된 사람을, 그 길을 잘 가고 있다는 사람을 직접 만나보라는 것이다.      


내가 그리던 나를 찾아서 

생각보다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의외로 만나자고 하면 만나주는 어른들이 있다. 질문과 고민을 갖고 오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와 감독처럼, 이거 우리 노하우 죽을 때 싸갔고 갈 것도 아닌데, 하는 마인드로 언제든 자신의 인생 경험과 일의 노하우를 나눠줄 어른들이 있다. 뭐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일지도.   


만나기 힘들다면 간접적으로 만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책이나 기사 등을 통해서 말이다. 난 요즘, 자유형을 하다 지쳐, 자세가 흐트러질 때마다 내가 하는 스트로크를 구사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그중에서도 특히 케일럽 드레슬을 떠올린다. 숨을 쉬러 얼굴을 내밀어 옆 레인을 볼 때마다 그가 옆 레인에서 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똑같이 따라 해야지 마음먹는다. 내 꼴사나운 허둥지둥 대는 모습을 냉정하게 보면서 폼을 되찾는다. 


어찌 됐든, 더 나은 나는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나를 싫어하고 만족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더 나아지라는 말이다. 게다가 상상한다고 다 이뤄지는 것도, 애쓴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했던 상상은 내가 원할 때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앞서 썼듯 상상 밖의 나 자신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도래할 수도 있다. 당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환상적인 당신과 만날 수도 있다. 


예전에 내가 알던 목사가 이런 우스갯소리를 했다. 사람이 하는 기도를 신이 다 응답해 줬으면 지금쯤 살아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다시 말하지만, 어떤 바람은 지금 이뤄지는 것이 좋지만 나중에 이뤄지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어떤 상상은 현실로 되는 것이 좋지만 어떤 상상은 내 것이 아닌 경우도 있다. 또, 앞서 말했듯, 당신 인생 안에는 당신이 미처 상상 못 했던 당신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들뢰즈가 말한 주름처럼 말이다. 


내가 열두 살 소녀의 아빠로 사는 것처럼, 이십 년 차 현역 카피라이터로 사는 것처럼, 뜻하지 않게 한 달에 세 편의 칼럼을 정기적으로 쓰는 이로 사는 것처럼, 오늘 저녁엔 한참 제철인 생미역이 먹고 싶으니 시장에서 꼭 사다 달라는 아내와 이십 년 가까이 살고 있는 것처럼. 당신에게도, 당신이 미처 상상하지 못한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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