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 요정 은채

11월 셋째 주- 부쩍 싫어라는 말을 자주한다.

by 최영훈

은채는 요즘 부쩍 “싫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은채야. 숙제 해.”, “싫어.”

“은채야. 이제 자야지.”, “싫어.”

“은채야. 저녁에 그냥 밥 먹자.”, “싫어.”

그러나 은채의 “싫어.”에는 부정의 의미와 함께 중요한 일의 순서 결정을 아직 못 했다는 싸인, 그리고 어떤 일을 조금만 뒤로 미루고 싶다는 싸인이 포함 되어 있는 듯합니다. 또 자신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 달라는 표현도 포함되어 있죠. 그래서 막상 “싫어.”라고 말해 놓고 몇 분 안에 하라고 했던 일을 하거나 아빠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 그저 그 생각할 몇 분을 줄 뿐이죠.


“그래? 그럼 은채가 먹고 싶은 거 생각해서 말해 줘.”

“그래? 그럼 언제 잘 건데? 내일은 스포츠 홀릭 데이라 체력 충전해야겠던데?”

이렇게 말을 건네고 기다리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부탁을 했을 때 은채가 싫다고 하면 전 종종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은채야. 서로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이 가족이야. 은채가 아빠 부탁을 안 들어주면 아빠도 은채 부탁을 들어주는 게 좋을까?”

결국 은채는 아빠의 이런 반 협박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보니 애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바쁘고, 아는 게 많아지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집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졸업하자마자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아이들은 그때그때 나름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만 하죠. 방과후 학교는 뭐로 하면 좋을지. 친구들이 다니는 태권도(를 포함한 다양한 운동), 미술, 피아노, 발레 학원들엔 나도 가고 싶은데 도대체 어딜 가면 좋을지. 수학, 영어, 국어 등 친구들은 이런저런 학습지를 한다는데 난 뭘 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먹고 싶은 건 많은데 주말 외식엔 뭘 먹으면 좋을지 등 그 선택의 범주는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어쩌면 은채의 “싫어.”라는 대답은 “잘 모르겠어.”나 “아직 결정 못했어.”, “함께 결정해줘.”와 같은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요즘도 전 은채와 함께 등교 패션을 코디합니다. 티셔츠를 고르고 바지를 고르는 게 전부지만 은채와 저는 나름 심사숙고를 하죠. 그러나 어떤 것들은 은채 스스로 결정을 합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오는 것도 철저히 자신이 선택해서 빌려 오죠. 요즘엔 제프 키니의 <웜피 키드> 시리즈와 마크 패리시의 <마티 팬츠의 사건일지>를 빌려 옵니다. <엉덩이 탐정>에서 시작한 추리 탐정 모험 장르 독서가 계속 이어지고 있죠. 물론 엄마는 위인전을 읽어야 한다고 걱정해서 조만간 위인 전집을 사줄 것 같지만 말입니다.


은채에겐 어떤 결정, 특히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늘 아빠가 생각했던 것 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듯합니다. 그 시간을 버는 단어로 “싫어.”를 선택하는 것 같아서 아빠는 조금 더 시간을 줍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은채 스스로 결정할 시간을 줘야 스스로도, 또 아빠도 후회가 없겠죠. 그러면서 자신의 세상이 조금 더 견고해질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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