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주 - 한 뼘 크게 한 경험들
수요일, 학예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은채 등교는 아빠가 책임졌습니다. 엄마는 오전 휴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홉시에 시작하는 학예회 시간에 맞추려면 열심히 집에서 단장을 해야 했기 때문이죠. 아빠도 나름 단정하게 입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넉넉잡고 걸어서 15분. 학교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개방하지 않으니 학보모들은 도보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라고 공지를 받았습니다. 좀 빠듯하게 집에서 나서서 부지런히 걸었지만 약 5분 정도 늦었습니다. 은채네 반 순서는 여섯 번째여서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채의 초등학교 경우엔 학예회가 이렇게 구성됐습니다. 1학년에서 4학년은 강당에서 하고 5학년에서 6학년은 교실에서 합니다. 방과후 교실 발표를 먼저하고 이어서 1학년과 3학년이 발표하고, 2부에 역시 다른 방과후 교실 발표를 먼저하고 2학년이 발표를 했습니다. 은채네 반은 1부의 아홉 번째 순서였고, 은채가 참여하는 바이올린 교실의 발표는 2부의 첫 번째 순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은채는 1부 순서를 마치고 1부 뒤의 여섯 개 순서가 하는 동안 바지를 갈아입고 음악실에 집합해서 마지막 리허설을 하고 2부 첫 순서에 맞춰 다시 강당에 등장해야 했죠.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개의 순서가 지나간 후였습니다. 그야말로 군더더기 없이 수업 시작하는 시간에 바로 순서가 시작됐고 불필요한 사회자의 멘트 없이 순서에서 순서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연습했던 데로 충실히 잘 했고, 은채도 친구들과 함께 노래에 맞춰 열심히 율동을 했습니다. 시작할 때는 셋째 줄이었지만 다들 줄을 바꿔가면서 첫째 줄을 번갈아 가면서 했습니다. 아무래도 사진을 찍으려는 부모들을 위한 배려 때문이겠죠. 또 아이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엄마 아빠들은 강당 양 옆의 계단식 좌석에 자리하거나 파란 안내선 뒤에 서서 아이들의 공연을 봤습니다. 아빠-의외로 그 아침에 온 아빠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었습니다. 저도 물론 열심히 찍었죠.
은채는 1부 순서가 끝나고 옷을 갈아입으러 교실로 갔습니다. 엄마도 뒤 따라 갔는데 긴장했던 탓인지 소변을 살짝 지렸습니다. 엄마는 물티슈로 잘 수습하고 마침 가져갔던 갈아입을 바지로 갈아입혔습니다. 처음 하는 공연이라 그 긴장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2부의 첫 순서로 은채와 친구들이 바이올린을 들고 섰습니다. 초대장엔 세곡이 있어서 이걸 다하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은채가 속한 초보자 1학년들은 <작은 별>한곡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휙 지나갔죠.
그렇게 은채의 첫 학예회는 작은 사고를 남겼지만 큰 무리 없이, 실수 없이 끝났습니다. 이날 은채는 돌봄 교실에 있다가 학원차를 타고 학원에 바로 가는 대신 아빠가 데리러 갔습니다. 수업을 끝나자마자 은채를 데리고 와서 혹시라도 찝찝할까 싶어 씻기고 새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간식을 챙겨주고 좀 쉬게 했습니다. 나름 긴장을 많이 했을 테니까요. 세 시가 넘어서 미술 학원엔 직접 데려다 줬습니다.
은채는 중간에 있던 사고에도 울거나 당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엄마랑 침착하게 해결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아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존심이 센 은채이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저나 엄마나 은채가 했던 실수를 다시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실수 했던 당일에 그 실수에 대해서 얘기하고 앞으로 그런 실수를 어떻게 하면 반복하지 않을지 함께 고민해보고 은채가 그 답을 찾게 하죠.
이제 겨울이 되면 화장실에 더 자주가고 싶어지니까 쉬는 시간마다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행사나 공연 전에는 긴장해서 쉬가 더 마려우니 틈이 나면 꼭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이건 십대 시절부터 삼십대 중반까지 20년 넘게 성가대를 해 온, 그리고 한 때 스쿨 밴드를 했었던 아빠의 경험이라고 말이죠.
아이들은 아주 질서정연하게 입장해서 차분하게 퇴장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다른 순서가 또 있는 아이들은 알아서 약속 장소를 찾아갔고 의상을 갈아입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들만 우왕좌왕하고 아이들 순서가 아닐 때는 수다 떨기 바빴지 아이들은 아주 세련된 매너를 보여줬습니다. 어쩌면 우린 정말 배워야 할 건 초등학교 때 다 배웠던 건 아닌지 새삼 돌아보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