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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08. 2023

서로의 눈물로 죄를 씻어낸다.

영화의 위로 - The Whale(2022)

명색이 영화를 소재로 글을 쓴다는 사람이 너무 예전 영화만 다룬다 할까 싶어 한 달에 한두 편 정도는 비교적 최근 영화를 보기로 했다. 물론 그것도 가입된 OTT나 넷플릭스를 통해서지만... 그렇게 본 영화가 앞서 쓴 <NYAD>고 두 번째 영화가 이 영화다. 메뉴를 넘기다 보니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 들어 있었다. 여기 감상의 파편들을 두서없이 남긴다.             


이 영화는 중의적이고 다의적이다. 영어 Whale의 사전적 의미는 당연히 고래다. 이 외에도 여러 뜻이 있는데 우리에게 술고래라는 표현이 있듯이 그들도 어떤 분야에 전문적이거나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 친구 그 분야의 고래야."와 같은 표현을 쓴다. 또 거대하거나 뚱뚱한 사람에게도 이 단어를 쓴다.      


찰리는 이 모든 뜻에 어울리는 고래 같은 사람이다. 그는 온라인으로 글쓰기 강의를 하는 대학 강사다. 나름 그 방면의 전문가이니 고래라 불러 무방하다. 또 그는 고래만큼 거대하고 뚱뚱하다. 그러나 그가 진짜 고래라고 불릴 수 있고, 불려 마땅한 것은 그가 짊어진 상처와 죄책감의 무게 때문이다. 그는 그저 사랑을 선택했을 뿐인데 가족을 버린 사람이 되어 버렸고 사랑하는 이를 자살에 이르게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는 회개와 애도를 동시에 하며 그 방법으로 폭식과 은둔을 택했다. 그 결과 육체적으로도 고래가 됐다.     


선택과 상처, 그리고 피해자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들은 근본적으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타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또한 이기적인 의도와 목적이 없는 순전한 이타성은 아니다. 이타적인 선택으로 얻는 주체가 얻는 심리적 만족이 전무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은 선택조차 상처를 유발한다. 그 선택은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상실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우린 내 앞에 주어진 가능한 선택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선택하지 않아서 실현되지 못한, 다다르지 못한, 만나지 못한 미래의 나 자신이 있다. 그 또 다른 나에 대해서, 그 가능성에 대해서 주체는 일종의 상실감과 함께 책임감도 느껴야 한다. 결국 주체의 선택 안엔, 레비나스의 맥락에선, 그 선택으로 인해 상처받았을지 모르는 타자에 대한 윤리와 실현 가능했으나 미처 실현되지 못한 주체 B의 무게가 동시에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순전한 가해자도, 순전한 피해자도 없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넘나 든다. 우리의 존재와 삶 자체가 그렇다. 얼핏 관객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 속에서 기나긴 애도의 시간과 자기 환멸의 시간을 겪고 있는 찰리만 가해자이자 피해자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집에 등장하는 이들 중에 죄 없는 자가 있는가? 죽은 이도, 산 자도, 아내도, 딸도, 찰리도, 어설픈 선교사와 피자 배달부도, 죄 없는 이는 없다. 그리고 이들은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 양면성이 찰리의 공간 안에서 위태롭게 공존한다. 마치 고래라는 단어 안에 담긴 여러 뜻처럼.      


모두가 죄인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사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선택으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에게도 영향을 준다. 그 영향이 상처가 될지, 기쁨이 될지는 그 영향의 당사자만 안다. 결국 우리의 행위와 선의와 심지어 존재 자체가 악인지 선인지에 대한 판단은 타자에게 있다. 여기서 존재의 윤리가 발생한다. 이 역시 레비나스적인 맥락이다.      


고래의 은유

이런 맥락에서, 영화 속, 찰리의 딸 엘리의 모비딕에 관한 에세이가 말하듯, 고래를 향한 에이허브의 증오는  슬프다. 고래는 자신의 행위가 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자신의 행위의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존재에게 증오를 품는 것은 부질없다. 바꿔 말하면 그런 판단이 없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고래와 같은 하등 한 존재,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인격이 없는 존재다. 즉 자신의 행위가 타자의 증오와 분노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존재는, 그 존재의 물리적/정신적 부피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사람"이 될 수 없다.      


결국 이런 이유로, 고래와 같은 육체적 부피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죄책감과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상실감을 안고 사는 찰리는 가장 사람다운 사람일지 모른다. 또, 그 고래와 같은 부피로 인해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한 찰리에게, 그의 찰나의 행복을 위해, 먹는 행위 외엔 행복과 자기 파멸이라는 속죄의 도구가 없는 찰리를 위해 치킨이 가득 찬 바구니와 치즈가 추가된 미트볼 샌드위치를 포장해 온 리즈 또한 사람다운 사람일지 모른다. 상실감과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가진 존재들. 어느 누구도 따져 묻지 않았지만 스스로 짊어져야 할 타자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다.      


위선, 신의 공백

모두의 짐을 짊어질 것 같았던 "새생명 선교회"의 선교사는 자신의 짐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철부지였다. 그런 인간이 고향을 떠날 때 지은 죄를 속죄받은 후 찰리에게 회개를 종용하고 하나님을 만나라고 권한다. 교만하다. 아직 젊기에 그 한 번의 속죄 뒤에 이어지는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알게 모르게 지을 것이며, 어떤 죄는 스스로에게 짓기도 할 것이라는 것을, 그 죄 중 어떤 죄는 용서받지 못하여 무거운 인생의 짐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젊은 영혼의 교만이다.


더 나아가 종교의 위선, 나만 선하게 구별된 존재라 착각하며 사는, 소위 바리새인 같은 인간들의 교만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와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죄악과 타자에게 입힌 상처에 대해 용서를 구할 방법조자 모른 채, 거짓 순례자로 떠도는 인간이 저지르는 만행이다.      


용서의 가능성

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대사는 "미안해"다. 찰리의 친구이자 간호사이며 찰리의 연인이기도 했던 오빠를 잃은 아픔을, 그래서 상실의 아픔과 애도를 찰리와 함께하고 있는 리즈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다시는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표면적으론, 미안하다고 말을 해서 미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이 필요하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미안한 상황을 기꺼이 받아주는 사람 앞에선 그런 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미안한 상황을 함께 헤쳐 나간다. 미안한 상황에 부재한 사람에겐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 사람은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 삶과 운명을 나누어 짊어지는 타자에게 건네는 감사의 표현이다.   

   

결국, 용서는 “미안해”라는 말을 들은 사람으로부터 주어진다. 신도,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사람. 그래서 구약에 나오다 시피 사죄를 반복해서 들은 사람은 용서를 해야만 한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만이 사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은 모두 죄인이어서 재판관의 위치에서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서로의 죄를 고백하며 서로의 죄를 서로의 눈물로 씻어줘야 한다.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말하는 진리다.


사족...     

브렌단 프레이져의 연기에 찬사를...     


이 영화는 연극 같다... 고 생각하며 봤다. 연기는 물론이고, 공간도 하나, 인물의 등장과 퇴장 또한 그렇다. 심지어 조명까지. 엔딩 크레딧을 보니 희곡이 원작이다. 찾아보면 연극 무대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주인공은 작문 강사다. 마침 에세이를 잘 쓰도록 독려한다. 써진 글은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살아버린 삶은 돌아가 고칠 수 없다. 사람의 원죄 - 타자와 나 자신에게 지은 죄 - 의 기원은 여기서 발생한다.     

 

죽는 순간 사람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인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축복 속에서 죽지 못하는 인간만큼 불쌍한 인간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의 그늘이 큰 사람은 고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고래다. 예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은 다 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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