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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된 에미넴을 보며

영화의 위로 4 - 8마일(2002)

by 최영훈

에미넴의 과거를 담은 영화

얼마 전 우연히 짧은 영상 하나를 봤다. 미국의 힙합 아티스트 에미넴이 딸이 건넨 사진을 무심히 보다가, 그 사진이 임신한 딸의 초음파 사진인 줄 알고 울컥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다. 영상을 본 뒤, 에미넴이 벌써 할아버지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나이를 알아봤다. 필자와 동갑이다. 그가 초음파 사진을 보고 울컥했던 때가 언제인지 찾아보니 작년 10월이다. 올여름쯤이면 에미넴이 손자, 손녀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기대 뒤에, 두 가지 지점에서 약간의 놀라움이 찾아왔다. 언제나 반항적인 청년이었던 것 같은 에미넴이 벌써 할아버지가 됐다는 점, 그리고 그가 나름 평범하고 일상적인 아빠 역할을 해내며 살아왔다는 점이다. 이 “평범함”이 그에게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이었는지, 그가 출연한 자전적인 영화 <8마일>을 다시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공장 노동자인 백인 청년이 있다. 힙합 음악가를 꿈꾸며 가난한 삶을 견뎌내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철없는 엄마는 술과 마약에 절어 있고 엄마의 동거남은 자신과 같은 또래다. 매일 가사를 쓰고 랩을 연습하지만 음반 제작은 고사하고 녹음 기회도, 무대에 설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친구의 권유로 동네에서 랩 좀 한다는 이들이 참가하는 랩 배틀 대회에 나가지만 긴장한 탓에 무대에 오르기 전 토하고 무대에선 랩 한 마디를 못 뱉고 내려온다. 그렇게 좌절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공장에서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계속 가사를 쓰고 비트를 만들고 랩을 한다. 그러다 다시 얻은 랩 배틀의 기회, 그는 완벽하게 상대를 압도하고 승리한 뒤,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


영화는 그가 스타가 되기 전, 그가 지나온 인생의 여정을 토대로 한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 이미 그는 영화 속 자신이 바랐던 소망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었고 스타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삶은 영화 주제곡인 <Lose Your Self>의 가사처럼 음과 양이, 화려한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와 일상의 어두운 그늘이 공존하는 삶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긴 투쟁 중이었으며 결혼 생활도 원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주인공이 그랬듯, 그는 계속해서 음악 작업을 했고 꾸준히 앨범을 냈다. 그 결과, 현재 그는 그야말로 힙합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그의 이 지속성이, 이십 대 후반이 된 에미넴의 딸이 평범한 직장을 갖고 동종 업계 동료와 결혼한 뒤 임신까지 하여, 에미넴이 손자를 볼 때까지 자신의 삶과 아티스트의 명성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 한 편으로 놀랍고 한 편으로 고마웠다.


나이 든 스타를 보며 드는 감정들

돌이켜 보면 미국의 힙합 아티스트들의 삶이 갱단의 삶과 큰 차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2 Pac과 노토리어스 BㆍIㆍG도 총격을 받고 사망하지 않았던가. 사망 당시 두 사람의 나이는 각각 스물다섯, 스물넷이었다. 이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이 젊은 나이에 총격으로 인해 사망했다.


총격이 아니어도 그 커리어와 삶을 에미넴처럼 쉰이 넘을 때까지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에미넴에 앞서 백인 힙합의 장을 열었던 비스티보이즈의 애덤 요크는 암 투병 끝에 47세의 나이에 죽었으며 BTS 앨범에도 참여했던 젊은 힙합 신성이었던 주스 월드는 21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필자가 좋아하는 일본의 힙합 아티스트인 Nujabes의 경우엔 서른여섯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팝계에는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요절하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오죽하면 스물일곱의 나이에 죽은 아티스트를 모아 부르는 소위 스물일곱 클럽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좋아하던 배우나 작가의 부고를 듣는 경우가 많아진다. 더 나이를 먹으면 그 부고는 더 가까운 사람에게 올 것이고 더 자주 올 것이다.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라고 고백한 김훈 선생님의 <허송세월>의 첫 문장처럼 죽음의 소식과 기척은 더 빈번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각자의 문 앞에 오기 전까지, 내가 사랑하는 스타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오랫동안 활동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커지고 있다.


이 바람 끝에, 내가 사랑했던 스타가 나와 함께 나이가 들어 인생의 새로운 장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나이에 맞춰 적당한 위치에서 알맞은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결코 쉽지도, 흔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이 때문인지 동년배 연예인이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반갑다. 어린 시절 좋아하고 동경했던 연예인이 칠순, 여든, 구순을 넘겨서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의 세상이, 한 시대가 여전히 견고하게 버티고 있다는 기분까지 든다.


최근, TV를 보다 찾아온 뭉클함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4월 10일 목요일 저녁, 필자는 애청하는 <한국인의 밥상>의 본방송을 챙겨 봤다. 700회를 맞은 그 방송의 호스트가 최불암 선생님에서 최수종 씨로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불암 선생님은 여전히 정정하시다. 다만 때가 되어 최수종 씨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신 듯하다. 담당 PD의 말을 빌리면 그야말로 밥상의 대물림이다. 이 또한 그 나이에 걸맞은, 그 나이의 어른만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이리라.


이 방송을 보면서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방송에는 강부자 선생님과 이정현 씨, 그리고 박찬일 셰프가 출연했다. 세기말의 테크노 여전사였던 이정현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이런 프로그램에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성숙한 여인이 됐고, 최수종 씨는 최불암 씨의 자리를 대신해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수십 년 간 경력을 이어온 60대의 배우이자 건강하고 성실한 가장으로 살고 있으며, 여든이 훌쩍 넘은 강부자 선생님의 그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눈빛도 여전했기 때문이다.

굽이진 인생길을 걸어온 에미넴

영화 제목 <8마일>은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와 부촌을 가로지르는 도로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던 젊은 시절의 에미넴과 같은 이들이 이 길의 이 편에서 저 편으로 넘어가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이 쪽과 저 쪽을 확연히 나누는 그 길, 그 선택의 기로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한다. 정말, 진정한 관건은 그 어떤 길을 선택하든 인생이라는 길을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살아내면 낼수록, 이 길의 저 편과 이 편을 오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질 테니 말이다. 그러니 우선은 살고 볼 일 아닌가. 살아내야, 살아야 만날 수 있는 저 편이 있지 않겠나.


에미넴은 인생의 이 편과 저 편을 다 경험하고, 어지간한 굴곡은 다 넘어온 뒤 딸을 시집보내고 할아버지가 됐다. 그와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당시 가장 촉망받던 여배우였던 브리트니 머피가 2009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요절한 것을 생각하면 에미넴의 나이 듦이, 그가 살아내어 오십 대를 맞이했다는 것이, 그리하여 할아버지가 됐다는 것이, 팬의 한 사람으로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딸과 사위를 보면서, 그들의 결혼과 출산 준비를 도우면서, 그 스스로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삶이 이뤄졌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루고 싶었던 안정적인 가정이라는 꿈을 실현한 딸을 보면서, 그 가족을 돕는 할아버지가 되어서 말이다.


그렇게 살아내어 할아버지가 된 에미넴의 뉴스를 접한 뒤, 팬의 입장에서 갖게 된 하나의 바람이 있다. 나와 동갑인 에미넴이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의 손자를 안고 무대에서 랩을 하는 모습을, 그 손자가 커서 할아버지와 함께 무대를 꾸미는 걸 볼 수 있길 바란다. 기왕이면 그 증손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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