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식당/인생 메뉴 - 히든 피겨스(2016)
올해 중학생이 된 딸이 생전 처음 수학 학원에 다니고 있다. 투병이 끝나고 몇 주 후, 딸의 진지한 요청에 따른 것이다. 종종 말하곤 했던 딸의 진학 목표는 내가 상상해 본 적 없는 수준이어서 무심히 듣고 넘겼는데, 딸은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학력이 필요한지 스스로 알아보고 분석하여 파악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수학학원의 필요성을 부모에게 제시했다.
나와 아내는 수포자인데, 내 경우는 여러 사정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자격을 얻었기에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그나마 대학에 들어가 약간의 통계학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기숙사 학우들 중에서 건축학과와 도시공학과, 통계학과와 수학 및 수학교육과 학생들이 없었더라면 수학이 여러 분야에 요긴하게 쓰이는 도구이자 학문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요 근래 IT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처남과의 대화가 없었다면 첨단 산업 전반에 수학이 얼마나 요긴하게 쓰이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최근엔 수학의 일상성을 최근 딸의 수학 문제집을 보면서 더 깊이 느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학의 정석에 담긴 문제들은 선 몇 개, 도형 몇 개, 기호와 숫자와 알파벳만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딸의 교과서와 참고서에 실린 문제에는 이런 단순한 수학문제와 함께 일상에서 마주할 법한 상황들이 그야말로 삶의 문제, 그 자체로 제시된다. 분배의 문제, 속도의 문제, 거리와 이동 수단과 시간과의 관계, 미래에 대한 예측 등이 문제 속에 단독, 또는 혼합되어 들어가 있어 학생들에게 복합적인 사고를 요한다. 결국 요즘의 초ㆍ중등수학은 현상에 대한 파악 및 분석이 공식의 정립과 해답 제시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국어를 못하면 수학도 못하는 난감한 문제들을 풀고 있는 딸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이 영화가 생각났다.
<히든 피겨스>는 보는 이의 입장이나 성향에 따라 그 성격이 달리 부여되는 영화다. 인종 차별과 성차별에 주목하는 사람에겐 그 모든 차별을 극복한 흑인 여성의 휴먼 스토리로 보일 테고, 과학과 기술의 진보와 그 힘에 주목하는 사람에겐 그 초석을 다진 이들의 노력과 열정이 보이는 과학 영화로 보일 것이다. 그 해석의 분분함을 논하기 전에, 이 영화는 상당히 유쾌하다. 물론 당시 미국 사회와 공공 조직, 학계 등에 만연해 있던 성차별과 인종 차별의 현상이 도드라지게 보이지만 그 차별의 피해자로서만 주인공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그 차별의 벽을 막 넘어서는 흑인 여성들의 노력과 그 노력에 기꺼이 도움을 주는 백인 남성들의 모습을 아우르며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노력과 협력의 중심에는 우주를 향하는 열정과 그 열정을 현실로 만들어줄 공학 기술, 그리고 이 영화의 핵심 소재인 수학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달 탐사 유인 유주선 하나 띄웠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오게 하는 데 수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몰랐다. 우리가 익히 봐왔던 우주 탐사 실화를 다룬 영화나 우주선이 나오는 SF 영화를 보면 다들 몇 개의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위치를 향해 고도와 방향을 설정하여 날아가고, 또 그렇게 갔다가 잘만 돌아오지 않았던가.
심지어 먼 미래를 다룬 SF 영화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은하계 저너머의 별까지 슉~하고 날아가고 <마션> 같은 실감 나는 영화에서 조차 낙오된 우주인을 구하기 위한 그 복잡한 계산들이 며칠 만에, 컴퓨터로 이뤄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모든 첨단 기술이 있기 전, 마치 포병 부대 장교가 대포가 단순히 대포에 대한 지식만 갖추고 있는 것만 아니라 탄도학과 삼각법도 알고 있는 것처럼, 기술이 있기 전 그 기술을 가능케 한 수학이 있었음을,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됐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이들의 수학 계산은 정말 끝이 없다. 발사하는 날의 달과 지구의 변화, 그리고 그날의 기상조건도 고려해야 한다. 영화에서는 지구 귀환 시 하나의 판이 떨어지는데, 그 무게 변화로 인해 궤도를 어느 정도 수정해야 하는지도 계산한다. 그런데 이 복잡한 계산보다 더 중요한 건, 그리고 필자를 놀라게 했던 건 이 수많은 과제를 처음 해본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그전에 우주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처음 해보는 일이다. 처음 해보는 계산이니 당연히 어떤 공식이 적합한지 모른다. 그러니 자신이 공부한 수많은 수학 공식 중에서 상황에, 이 문제해결에 가장 적절하고 적합한 공식을 찾아내는 것부터가 난관인 시대였고, 그 과제를 그 흑인 여성 수학자와 기술자들이 해냈던 것이다.
이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을 것이다. 대학 시절,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던 건축학과와 토목학과, 도시공학과 학우들도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와 마주할 때마다 가능성의 검증을 위해 계산에 계산을 거듭했을 것이다. 건축가라면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타워와 싱가포르의 마리나 샌즈 베이, 그리고 동대문의 디자인 플라자가 그런 경우일 것이고, 토목공학 기술자라면 필자가 늘 보는 광안대교와 부산항 대교, 북항대교, 그리고 해저터널 구간이 3.7Km나 되는 거가대교 같은 프로젝트가 그런 경우일 것이다. 이 외에도 자율주행자동차의 변수 계산, 빅 데이터의 활용, AI의 활용 등 앞으로 더 많은 문제들이 수학을 비롯하여 많은 순수 이공계 학자와 전공자들 앞에 놓일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이론으로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한 딱 맞는 공식과 답을 찾아나갈 것이다.
사실, 필자의 딸은 이공계를 희망하지 않는다. 언뜻 비치는 뜻으로는 법조계 진출을 원하는 것 같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이고, 난 그냥 건강하게 자기 앞가림이나 하고 살면 충분하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무사태평한 아빠의 시선으로, 요즘 수학에 재미를 붙이는 딸을 보면서 인문학과 이공학문의 지식이 잘 어우러진, 미래에 필요한 인재가 되길 바라는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나에, 이 소박하다면 소박한 욕심이 현실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알아보니, 공부하는 이의 문제보다는 가르치는 대학의 문제가 제법 심각했기 때문이다.
인문학 분야에서는 철학과의 폐지가 당연한 것처럼 된 지는 꽤 오래됐지만, 수학과 물리학 같은 순수 이공계 학과의 폐지도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수학과 박종인 교수는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이미 지방대학에서 수학과 폐지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걱정을 하며, 미래 산업을 위한 산업수학이 절실히 필요할 때 정작 관련 인재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와 우려를 동시에 나타냈다. 최근의 한 기사에서는 수학과를 비롯해서 철학과, 사회학과 등 기초학문 전공 학과들이 줄줄이 폐지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는 IBM 컴퓨터의 등장과 그 적용의 첫 순간이 나온다. 그전까지 거대한 칠판 위에 분필로 쓰면서 계산했던 계산원들은 IBM의 등장 이후 퇴직 위기에 봉착했으나 재빨리 기술 도입의 속도를 따라잡은 리더 덕분에 직종을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잠시 후, 귀환의 새 궤도의 계산을 맡긴 IBM이 지속적으로 다른 답을 제시한다. 이렇게 오류가 나자 천재적인 계산원에게 그 궤도와 착륙 위치의 계산을 다시 맡긴다. 현재는 이런 오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수학자의 계산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점이 하나 있다. 인류는 과거가 남긴 문제에 답을 찾기도 하지만 미래의 과제를 새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수학을 비롯한 기초 학문은 인류의 삶의 개선과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기술의 창조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인류 앞에 새롭게 놓일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기술 발전의 한계도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그 기술의 발전 뒤에 등장할 문제 또한 짐작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근본이 되고 본질이 되는 뭔가를 공부하는 이들은 우리가 미래에 마주할 문제의 해답을 자기도 모르게 만들고, 심지어 틀어쥐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 미래의 열쇠를 만들고 손아귀에 거머쥘 누군가를 위해, 그 누군가 중 한 명이 될지도 모르는 필자의 딸을 위해, 대학의 그 학과들이 계속 남아 있었으면 한다. <히든 피겨스>라는 제목의 중의적인 뜻 그대로, 숨어 있는 숫자를 찾아낼 잠재적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학과들이 계속 남아 있길, 학부모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커버 사진은 딸이 공부하며 메모한 것이다. 관련 기사를 아래에 첨부한다.
https://www.newsis.com/view/NISX20250605_0003203357
https://economychosun.com/site/data/html_dir/2023/01/16/202301160001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