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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K군에게

영화의 위로 무삭제판 4 - 01 : 러브레터(1995)

by 최영훈

K군의 고백

올 한 해, 재미있었던 일, 흥미로웠던 일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코 “딸의 소년들” 사태다. 올봄, 필자의 딸은 같은 반의 두 명의 소년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둘 다 딸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어서 친구로 지내기로 합의를 봤기 때문이다. 두 소년 중 흥미로운 친구는 K 군이다. 이 친구, 엄청난 독서광인 데다가 과학과 수학에만 푹 빠져 있다. 그러니 당연히 딸이 좋아하는 영어나 국어, 사회와 같은 인문 과목엔 그야말로 젬병이다. 성격도 딸과 상극이다. 딸은 감성이 풍부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데 반해 이 녀석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이 소년이 감성이 풍부한 소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후, 시니컬하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널 좋아하기는 하지만, 연애는 효율적이지 않아서 연애를 할 생각은 없어.”라고(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몇 분은 어쩌면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지만, 그 친구는 정말 얼굴색 하나도 안 변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태가 일단락 됐다면 가을 내내, 저녁 식사 시간마다 그 친구 덕분에 박장대소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친구를 측은히 여기 지도 않았을 테고 차이고 들어오곤 하던 대학 시절 기숙사 선후배들의 모습도 생각나지 않았을 것이다. 딸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 소년, 같은 반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딸의 곁을 맴돈다. 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 간다. 도서관도, 방과 후 교실도, 심지어 체험학습도 같은 조를 했다. 수학여행은 말할 것도 없다.


표정관리라도 잘 되면 좋으련만, 열두 살 소년이 그게 될 리가 있나. 이 학교의 특수학급 교사인 어머니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그 친구의 마음을 안다. 심지어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조차 K군이 내 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얼마 전, 체육 시간, 체육 선생님은 딸을 보고는 “그 놈아 그거, 니 좋아하는 거 티 다~ 난다. 니 있는 곳에 그놈도 있더라. 선생님들도 그놈이 니 좋아하는 거 다 안데이.”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저녁 시간, 한참을 아내와 함께 웃은 후, 문득 <러브레터>가 생각났다. 이 영화에 담긴 이야기가 언젠간 K 군에게 어떤 힌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 영화, 사랑 영화였나?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봤다.


사랑 영화가 아니었다.

잊을만하면 재개봉하는 30여 년 전의 이 영화를 당신은 어떤 영화로 기억하고 있나? 필자는 로맨스 영화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알콩달콩 데이트를 하며 사랑을 속삭이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는 그런 영화로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룬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흔한 로맨스 영화는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건 데 <러브레터>는 분명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사랑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주 소재인 영화이긴 하나 연애라는 행위 자체는 없는 영화다. 그럼 도대체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결론을 말하면 이 영화는 “시작”에 관한, 더 엄밀히 말하면 그 “시작”을 위해 꼭 필요한 “문턱 넘기”가 주제인 영화다. 사랑을 향한 문턱을.


이쯤 해서 <러브레터>에 나오는 동명이인인 후지이 이츠키와 여주인공 히로코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같은 반이었던 소녀 후지이 이츠키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소년 후지이 이츠키는 그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소녀의 주위를 맴돌며 자신을 인식시키려 애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등장하고 짓궂은 장난도 치고 자신의 -또 소녀의 이름이기도 한- 이름을 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책 안의 대출 카드에 남긴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급작스레 전학을 가고 소녀는 오타루에 남겨진다.


다른 주인공, 성인이 된 후지이 이츠키의 약혼녀(였던) 히로코는 산악 조난 사고로 죽은 그를 잊지 못한다. 사랑하는 그가 떠난 지 몇 해나 지났건만 그녀의 마음엔 여전히 그가 살아 있다. 꺼지지 않는 비애의 감정을 등불 삼아 그 사람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급기야 남자의 중학교 졸업 앨범에서 찾아낸, 소년 시절 그가 살았던 오타루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게 되고, 그 편지는 그와 동명이인인 과거의 그 소녀에게 배달된다. 그 뒤로 두 여자 간, 몇 번의 편지가 오간다.

문턱을 넘기 위한 의지

이렇게 오가는 편지는 히로코의 비애와 그리움의 표현물이다. 그 사람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며 슬퍼하기 위해, 그 사람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써지고 보내진다. 그렇게 한참 동안 편지가 오간 뒤 어느 날, 히로코는 그가 죽어간 산과 마주 선다. 그 산을 앞에 두고 그녀는 마지막 비애를 쏟아낸다. 그 사람을 데려간 산을 향해 절규처럼 비애를 쏟아낸 뒤 비로소 애도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럼, 비애와 애도는 뭐가 다를까?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티인 조앤 디디온은 남편을 잃은 뒤 쓴 <상실>에서 비애와 애도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비애는 수동적이었다. 비애는 저절로 생겨났다. 그러나 비애를 다루는 행위인 애도는 주의를 집중해야 할 수 있었다.”


그렇다. 비애는 자동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즉시 발생하는 감정이 비애다. 비애가 오는 건 불가항력적이다. 오면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약혼자를 잃은 후, 히로코가 보낸 시간은 그런 속수무책의 시간, 비애의 시간이었다. 이 시간을 끝낸 뒤 슬픔을 직시하고 떠난 자의 빈자리를 응시하며 그 사람을 선선히 마음속에서부터 보내주는 것이 애도의 시간이다. 영화에 나오듯 그 사람의 기억을 나누고 유품을 정리하고 그 사람이 최후를 맞이한 산을 마주하는 고통을 스스로 선택한 뒤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애도의 시간인 것이다. 그제야 힘껏, 의지적으로 그 사람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에야 새로운 삶과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들

사랑이 살아 숨 쉬는 동사가 되기 위해서도 그만한 의지가 필요하다. <시라노>를 소재로 썼던 칼럼에서 말했듯 사랑은 자기 세계의 붕괴를 결심한 뒤에나 행해지는 무엇이다. 이 영화에선, 이와 더불어, 사랑이 동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두 개 더 말하고 있다. 하나는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 순간의 깨달음이고, 다른 하나는 부재한 사람과는 사랑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받아들임의 문턱 중 하나가 앞서 말한 애도의 순간인 것이다.


이중 우선, 사랑을 받는 순간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때 그것은 사랑이었어,라는 깨달음이 늦게 도착하면 사랑이 찾아온 순간엔 이뤄질 수 없다. 당연하게도, 그 깨달음이 늦으면 늦을수록 사랑의 성취, 그 확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영화에서처럼 전학을 갈 수도 있고 연락이 끊길 수도 있으며 심지어 한 사람이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게다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랑의 감정이 사라질 수도 있다. 사랑의 사라짐과 존재의 소멸은 때론 불가역적이다. 소년이 어른이 되면 다시 소년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산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올 수 없는 것처럼.


뒤늦은 해석, 후회의 눈물

사랑과 사람이 사라지면, 그 과거의 사랑은 반복될 수 없다. 뒤늦은 해석의 가능성만 남을 뿐이다. 해석을 통해 과거의 사건과 감정과 사람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뿐이다. 사건은 십 년 전, 이십 년 전에 벌어졌는데, 그 의미는 뒤늦게 해석되고 부여되는 것이다. 소년이 전학을 가기 전 소녀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인 이유가, 그 책의 의미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말했듯이 어떤 의미는 뒤늦게, 불현듯 찾아온다. 하나의 사소한 사물로 인해 과거의 그것이 새로운 의미를 입고 다시 찾아온다. 그 의미의 발생 후, ‘그때는 왜 몰랐을까.’ 하고 후회를 남긴다.


영화의 후반부, 성인이 된 “소녀” 후지이 이츠키가 흘리는 눈물은 결국, 후회의 눈물이다. 후배들이 찾아 준 대출 카드 뒤에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흘리는, 이제 성인이 된 “소녀” 후지이 이츠키의 그 눈물은 그때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깨달음과 그로 인한 기쁨 때문이 아니라, 그 깨달음이 너무 늦게 왔음을, 더 나아가 그 사랑을 준 대상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그 사랑에 대한 감사도, 뒤늦은 사랑의 시작도 불가능함을 알기에 흘린 것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후자의 애도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 보자. 후자의 주인공은 당연히 히로코다. 동사될 수 있는 사랑의 진실 하나, 사랑이 연애가 될 수 있는 조건 하나가 이 깨달음에 담겨 있다. 세상에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사랑”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연예인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 사랑은 엄밀히 말하면 혼자 하는 사랑이다. 각각의 혼자들이 엮어지고 연대하여 팬이라는 그룹이 되어 스타와 하는 사랑이다. 분명 이 사랑 또한 동사이긴 하지만 연애의 차원은 아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면 그 사랑도, 연애도 종결된다. 애석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진실이다. 그리고 그 종결을 위해선 비애에서 애도로 감정이 진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체와 조력자

사랑의 깨달음도, 애도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도 주체의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으면 그 문턱을 좀 더 쉽게, 빨리, 훌쩍 넘을 수 있다. 재미있는 건, 이 영화에도 두 사람에게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성인이 된 “소녀” 후지이 이츠키에겐 할아버지다. 물론 후배들도 남자 선배가 여자 선배를 사랑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 끝에 그 선배를 직접 마주하고 자신들의 상상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오히려 손녀의 사연을 듣자마자 단박에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망설임 없이 얘기해 준 건 할아버지다.


히로코에게 진실을 얘기해 준 사람은 산에서 죽지 않고 돌아온 사람, 오랫동안 히로코를 흠모해 온 선배인 아키바다. 그는 본능적으로 죽은 사람의 애도가 완결되지 않으면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의 현장을 직면하고 그곳에서 이 편과 저 편의 단절을 체감해야만 비애가 끝나고 애도가 시작되며, 그 후에야 그 모두가 끝나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랑을 미루는 K군에게

<러브레터>는 결국, 주체의 도약, 사랑을 향한, 상처의 극복을 향한 도약, 그 직전에서 방황하는 이들에 관한 영화다. 그렇기에 종종 그 목전에서 방황하곤 하는 우리에게도 잊히지 않는 영화로 남아 있는 것이다. 때문에, 딸과 K군의 사연을 들으며 이 영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건져낸 삶과 사랑에 관한 당연한 진실이 K군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K군에게 몇 마디 말을 남길 차례다. 중학생이 되면 서로 한동안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잊고 살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다가 감정이 메마른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돌아봤을 때 나도 누군가를 좋아했음을, 그 소녀와 함께 공부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는 기억을 떠올려 그 마음에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감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살면서, <러브레터>의 주인공들처럼, 우리 또한 사랑을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 않고, 사랑이 떠났을 때 그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좋아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좋은 친구로 지내는 K군도 언젠간 사랑이 찾아오고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떠나보낼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을, 그 오고 가는 사랑을 당연시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님을 말해주고 싶다. 더 나아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건 더 흔치 않은 기적 같은 일임을 말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다시 또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날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오걸랑 그 사랑을 다른 이유로 물리치거나 뒤로 미루지 않길 바란다. 영화가 말하듯 사랑이 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사진은 2009년 12월, 아내와 북해도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오타루의 풍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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