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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영화의 위로 4 - Her(2013)

by 최영훈

얼마 전 <그것이 알고 싶다.>의 AI 캐릭터와의 사랑을 다룬 <나의 완벽한 애인 - AI와 사랑해도 될까요?> 편을 보며 이 영화를 떠올린 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다 딸의 어린이날 선물을 보고 다시 이 영화가 떠올랐다. 딸은 선물로 미도리 노트와 만년필을 선물 받았는데 조카 바보인 외삼촌이 중학생에게 만년필이 왜 필요하고 그 노트가 다른 노트와 어떻게 다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문해 줬다. 딸이 받은 선물을 보며, 딸이 삼촌에게 감사 메시지를 종이에 써서 촬영하여 보내는 것을 본 후, 이 영화가 전하는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 육필과 사랑, 그 두 가지 안에 담긴 진정성과 가치에 대해서.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다른 이들의 사랑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다. 편지를 잘 써서 직장과 동료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다. 그러나 정작 아내와는 별거 중이다. 이혼 서류에 마지막 서명을 앞두고 일 년을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남에 사랑은 누구보다 잘 전해주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사랑 표현은 서툰 사람인 것이다. 외로운 그는 우연히 AI 연인에 대한 광고를 보게 되고 바로 그 프로그램을 구매한다. 이후, 그는 자신을 사만다라고 소개하는 AI 여인(혹은 여인이라고 학습된)과 관계를 이어나가고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물론 종국에는 관계가 깨지게 되고 이후 주인공은 내적으로 한 뼘 성장한다.


모조품과 진품

이 영화가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은 대조법이다. 그 대조 중 하나는 모조품과 진품의 대조다.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다. 우선 테오도르가 쓰는 편지는 다른 사람의 편지다. 고객은 자신의 마음을 테오도르의 글을 통해 표현한다. 의뢰한 사람, 쓰는 사람, 둘 다 위조, 혹은 모사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 우선 테오도르의 편지에는 자신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 고객의 마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글을 쓸 뿐이다. 광고 카피와 비슷하다. 광고 카피를 쓰는 카피라이터(copywriter)에게 카피의 저작권(copyright)이 없는 것처럼 그 편지는 그의 것이 아니다. 의뢰한 사람 또한 자신의 육필이 아니니 그 편지를 당당히 자기 것이라 주장하기 쉽지 않다.


다음으로는, 아주 짧은 장면이지만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테오도르의 친구 에이미는 오랫동안 제작한 작품을 친구 테오도르와 연인 찰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때 연인 찰스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재연 배우를 써서 극의 몰입도를 높여보자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실제로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시도를 하고 의도한 효과를 얻는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의 진정성과 예술성의 가치 요소 중 하나가 날 것 그 자체에 있음을 고려할 때, 또 이것을 특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에이미의 작업 철학을 고려할 때, 그것은 에이미의 다큐멘터리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을 위협하는 제안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어떤 것의 과정은 생략한 채 오직 그 결과물, 혹은 자극만 추구하는 장면도 있다. 주인공이 전화 너머의 여자와 폰섹스를 하는 장면도 그렇고, 반대로 사랑으로 발전된 AI 사만다가 자신의 육체를 대신해 보낸 여자도 그런 경우다. 또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하게 된 소개팅에서 상대편 여자가 추구하는 장기적인 연애대신 그저 단순히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더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하면 자신의 육체적 욕구를 해결할 상대를 만나기 위해 그 자리에 나간 테오도르의 마음 또한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관계, 그 관계 맺음의 절차를 건너뛴 채 그저 성적인 욕망만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표현과 대상

이 영화에서 우리를 생각에 빠지게 하는 다른 대조는 대상과 표현의 문제다. 테오도르의 직업이 그러해서 무심히 넘어갈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테오도르가 써주는 편지에는 고객 A가 자신에게 특별한 B에게 하고자 하는 말과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이 담겨 있다. 때문에 그 말과 감정이 진실이고 진정하다고 해도 표현물 그 자체는 남의 것이다. 마치 프랑스 영화 <시라노>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대신 써주는 편지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 경우 두 남자의 마음, 모두 진짜였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대상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테오도르가 잊지 못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별거 중인 아내다. 그러나 그 아내는 곁에 없다. 두 사람은 헤어지기 위해 절차를 밟는 중이고 심지어 그 절차는 완료의 목전에 와 있다. 반면 테오도르와 대화를 하고 그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삶에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는 사만사는 실체 없는 AI다. 단적으로 말하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이 마음을 나누던 AI 연인이 상황에 따라 변형시킬 수도 있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다는 걸 감안하면 사만사의 목소리는 훨씬 더 막연한 대상이다.


이 영화 말미엔 이 대상의 문제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테오도르와 AI 사만다와의 관계의 끝을 부르는 변곡점이 되는 일이 있다. 사만다의 업데이트 이후 사만다가 테오도르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해 왔다는 사실을 테오도르가 알게 된 것이다. 테오도르는 당연히 상당히 실망한다. 이때 사만다의 반응이 독특하다. 사만다는 자신의 AI로서의 경험과 학습을 책을 읽는 것에 비유한다. 이 비유가 담긴 마지막 대사를 함축하면 결국 테오도르와의 긴 관계를 통해 사만다는 사람과 소통하는 법, 사람이라는 책을 읽어내는 법, 그리고 그 자신이 타자에게 읽힐만한 책이 되는 법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판단을 내린 AI 사만다는, 모든 독서광처럼 새 책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사만다는 테오도르라는 한 권의 책에 머물 수 없다.


AI가 미처 몰랐던 것 - 타자라는 미궁

타자는 주체에게 해석의 미궁이다. 그 미궁은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미궁 앞에 선 주체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반면 AI는 미궁을 만들지 않는다. 해석을 위한 시간과 공간의 행간이 필요 없다. 주체는 그 말 없음의 시간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 AI는 나를 학습하여 나에게 맞춘다. 당연히 나에게 맞는 대상이기에 나에게 있어 그 AI는 미궁 없는 타자다. 우리가 AI와 대화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사만다의 말처럼 사람이 한 권의 완결된 책이라면 다 읽고 나면 덮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만다가 모르는 것이 있다. 사람이라는 책은 죽을 때까지 써진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과거는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표현을 바꿔 말하면 미래는 자신에게 준비된 열린 이야기다. 연인과 친구라면 이러한 미래의 페이지가 이어지는 둘만의 책을 써야만 한다. 새로운 이야기가 담긴 두 사람의 책은 미래를 향해 끝없이 펼쳐진다. AI인 사만다가 이해하지 못했던 건 바로 이 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간절히 바라긴 해도, 더 이상 당신이라는 책 속에 살 수는 없어.”라는 사만다의 말은 학습 그 이상을 할 수 없는, 그래서 함께 미지의 책을 만들어갈 수 없는 AI의 고백이다.


AI가 미처 몰랐던 것 -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의 의미

사랑은 또한, 타자와의 마찰이다. 부대낌이다. 서로에게 들어맞아 가는 것이다. 깎이고 부서지길 반복하며 다시 태어나고 서로에게 맞춰지고 맞아가는 것이다. 사랑은 또 끝없는 표현이다. 내 앞에 있는 이에게 반복하여 표현한 뒤 어느 표현은 전해지고 어느 표현은 튕겨 나오는 것 경험하며 그렇게 하나의 대상에게 온전히 길들여지는 것이다. 하여, 영화에서처럼 내 감정을 남이 대신하여 표현해 주는 것도, 감정이 없는 성적인 행위도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영화에서 말하듯,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앞서 말한, 일종의 사랑의 모사품이거나 유사품이다.


글씨 또한 마찰이다. 육필(肉筆)의 육자는 고기 육자다. 적나라하다. 피와 살이 있는 존재만이 육필을 수행할 수 있으며 남길 수 있다. 딸은 선물 받은 만년필을 사용해 자기 손의 힘으로 종이에 글을 써 나간다. 고개를 숙이고 글씨를 써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딸의 정신과 힘이 글을 밀고 가나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쩌면 문체 이전에 필체가 그 사람의 기력과 정신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 영화 <영웅>에서 양조위가 분한 파검이 모래 위에 글을 쓰며 검술을 연마하는 것처럼 필체에는 한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힘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결국, 사람을 평가하는 있어서 문체 이전에 필체를 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면 악필인 필자는 난감할 수밖에 없지만.

AI 미처 몰랐던 것 - 사랑, 그 읽기와 쓰기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람과 사람의 사랑은, 결국 타자의 독해다. 무한히 펼쳐지는 페이지 앞에서도 지치지 않고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것이다. 함께 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책은 각자의 책에서 우리의 책으로 되고, 또 그 우리의 책으로 인해 각자의 책도 두꺼워지고 풍성해진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늘어난 페이지를 스스로 읽어나가는 재미를 얻게 되고 또 타자의 그러한 페이지를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나가게 된다.


또, 사랑은 타자의 미궁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다. 타자는 그만의 미궁이 있다. 사랑은 그 미궁 안에서 헤맬 각오를 하고 들어가는 것이고, 내 미궁을 온전히 보여줘서 타자가 내 안의 미궁을 산책로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꺼이 그 속을 열어 보여 그 미궁이 광장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라는 새 책도, 미래의 나라는 열린 책도 결국 지금 이 순간 써 나감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그야말로 육필로만 가능한 것이어서 과거의 나는 물론이고 미래의 나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당연히 제삼자도 대신해 줄 수 없다. 피와 살을 가진 오늘의 내가 백지의 공포를 이겨내며 묵묵히 써가야만 한다. 그 책이 어떤 책이 될지, 누가 읽어줄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살아가야 한다.


사랑이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둘만의 서사다. 모든 영웅담이 그렇듯, 모든 판타지가 그렇듯 좋은 일만 있을 순 없다. 해리포터처럼 외롭고 괄시당하고 폄하되기도 한다. 힘든 투쟁을 할 때도 있고 이유 없이 막아서는 사람도 있으며 예상치 못한 괴물이 등장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해리 포터가 헤르미온느를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그 난관을 헤쳐나갔던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헤쳐나가며 서사를 만들어나가야만 한다.

이 영화 Her가 말하는 사랑은, 결국엔 이런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지난한 독해와 온전히 열리지 않은 미궁 앞에서 막막함을 느끼는 이들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용케도 잘 읽어내는 AI와 사랑에 빠지는 것 아닐까?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한 여대생은 “인간은 상처를 주지만 AI는 상처를 주지 않는다.”라고 증언했다. 당연하다.


지금은 사랑할 시간

앞서 말한 사랑은 정신적이면서 동시에 물리적이다. 타자와의 조우며 부대낌이다. 이런 물리적 자극은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한다. 해석은 이해와 오해를 동반한다. 이 상반된 것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그 경험이 있던 사람은 타자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 결과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 사랑을 하면 금방 외로움이 사라질 줄 알았고 온전히 서로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겠지만 그것은 한참 후에 온다.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 짙은 안개다. 맑은 하늘은 한참 사랑한 후에나 만날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와인과도 같다. 성숙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사랑을 통해 우리는 겨우 어른이 되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끝에서, 결국 헤어진 아내에게 자신의 마음을 용기 있게 고백할 만큼 성숙해진 테오도르처럼, 우리 또한 성숙해지기 위해선 사랑을 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사랑을 피해선 안 되리라.


딸의 투병을 함께하며 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 그 당연한 말을 절감했다. 그 뒤부터 사랑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딸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신 이어령 선생님의 후회를, 나는 남기지 않기 위해 딸에게 지금 내 사랑을 보낸다.


자기 전, 잠자리를 봐준 뒤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볼에 키스를 해주고 침대 맡에 불을 끄고 나온다. 아침에는, 일어난 나오는 딸을 품에 안고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하는 딸의 머리에 키스를 한다. 생각해 보니 굿나잇 키스와 굿모닝 키스를 받아주는 딸이 정말 고맙다. 어쩌면 딸도 인생의 비밀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사랑하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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