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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 같은 아이를 보며

영화의 위로 - 늑대아이(2012)

by 최영훈

매화를 보며 생각난 영화

올해는 꽃이 늦어서, 필자가 사는 동네에서 가장 빨리 매화가 피는 이웃집 매화도 3월 2일에서야 첫 꽃의 망울을 터뜨렸다. 그 뒤를 이어 한 주에 걸쳐 개화가 이어졌다. 2월 말이면 피었던 매화가 며칠 늦게 피다 보니 부산 인근의 원동이라는 지역에서 열리는 매화 축제는 꽃 없이 치러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자연의 스케줄은 사람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자연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제 멋대로 일정을 잡는 것이리라. 그러니 그 어긋남을 두고 자연의 탓을 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여하간 한 주 정도 늦게 찾아온 매화를 보며 꽃 이야기를, 꽃이 중요하게 나온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어 고른 영화가 바로 <늑대아이>다. 영화를 들여다보니 이 영화는 꽃으로 사랑을 얘기하고 애도를 얘기하다가 결국엔 아이와 인간의 성장에 대해서도 얘기하는 영화라는 걸 알게 됐다.


사랑 이야기다. 고아인 가난한 여대생이 있다. 공부를 잘해 꽤 유명한 국립대학교에 진학하여 학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도 학교생활도 성실하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형 강의실에서 한 남자가 눈에 띈다.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다. 출석 체크도 하지 않는다. 기회가 되어 물어보니 학생이 아니다. 시대에 안 맞게 도강(盜講)이다. 청강도 아닌 도강이라니. 정말 시대에 맞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대학과도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시하고도 어울리지 않는다.


어찌어찌 남자와 말을 트고 마주하게 된다. 남자는 큰 키에 깊은 눈매를 가졌다. 마음도 곱다. 누가 봐도 사회에 적응 못할 사람이다. 그 마음에 끌려 만남을 이어가는데, 어느 날 고백할 것이 있다면서 산에 데리고 간다. 그 산에서 야경을 보던 남자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아한 늑대로의 변신. 여자는 그래도 좋다고 한다. 둘은 함께 살게 되고 딸과 아들을 낳는다. 그러다 남편이 사고 죽게 되고 여자 혼자 도시에서 아이들을 키우다 사정상 시골로 이사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여자의 이름은 일본말로 하나, 꽃이라는 뜻이다. 태어날 때 뒤뜰에 심지도 않은 코스모스가 피어 있어 그리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사는 것이 힘들어도 꽃처럼 웃다 보면 이겨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마음도 담았다고 한다. 남자의 이름은 없다. “그”다. 큰 딸의 이름은 유키, 눈이고 아들의 이름은 유메, 비다. 결국 여름의 비, 가을의 꽃, 겨울의 눈이 사람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름이 없던 “그”의 이름은, 그래서 봄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바람이거나.


의미 있는 꽃들

가족의 이름이 자연에서 온 것처럼, 이 영화엔 꽃이 많이 나온다. 영화 속 꽃은 시간의 흐름을 말없이 보여준다. 이른 봄의 봄맞이꽃과 까치밥, 화창한 봄날의 프리지어와 나팔수선화, 여름날의 도라지꽃과 장마철의 수국과 닭의장풀까지. 꽃들은 때론 남겨진 사람이 견뎌내는 애도의 시간, 그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남자가 죽은 뒤, 그의 면허증 사진을 영정 사진 삼아 차려진 추모의 공간, 그 앞에 놓인 꽃들은 술붓꽃과 봄맞이꽃, 그리고 수국으로 이어진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 아이들도 큰다.


이중 가장 기억에 남는 꽃은 닭의장풀이다. 앞서 바위취와 함께 습한 그늘에 자리 잡고 있는 꽃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두 남녀가 막 살림을 시작했을 때, 창가에 놓인 유리병에 이 꽃이 꽂혀 있었다. 그 꽃을 보면서 ‘아, 누군가에겐 저 꽃이 참 소중한 꽃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소박한 공간은 파랗고 화려하지만, 여름이면 흔한 그 꽃으로 인해 생기가 돌았다. 여자가 뽑아 왔는지, 남자가 그랬는지 알 수 없다. 그 흔한 꽃은 작은 유리병에 정성스럽게 꽂혀 있었다. 누가 뽑아왔든 타박한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어떤 꽃이든 함께 보면 좋았던 것이리라.

사람의 의미

이 영화를 서로 다른 세계에서 다른 철학으로 살아온 두 존재의 만남, 또는 언제나 아웃사이더로 남을 수밖에 없는 세계 밖 존재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존재의 피어남이 무엇에 달려 있는지 묻는 영화이기도 하다. 꽃이든 사람이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 사내아이처럼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의 머물 곳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음을 말이다.


사실 누군가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가 발현되어 나라는 존재의 새 국면을 맞이하는 것도, 자신의 결정을 통해 운명과 미래를 바꾸는 것도, 다 가능하기에, 두 의견 모두 맞는 말이다. 한 인간의 성숙은 저 두 가지의 국면의 쉼 없는 엇갈림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사의 맛>에서 김정선이 말했듯 사람은 낱말과 닮아 있다. 다른 낱말의 도움 없이는 의미를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낱말 또한 자음과 모음의 만남을 통해 의미를 획득하니 애초에 하나의 의미라는 것은 만남과 어울림 이후에나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품, 아이의 경계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하며 새롭게 발견한 의미는 남매에게 있다. 영화 속 남매는 야생과 인간의 경계를 오간다. 유아 시절에는 그 경계의 오고 감을 조절하지 못하여 화가 나거나 흥분을 하면 늑대로 변하곤 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엄마는 전전긍긍하며 야생의 존재를 잘 숨기라고 타이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아이는 야생의 존재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뒤 산으로 늑대로 산으로 들어가고 한 아이는 계속하여 사람으로 남는다.


엄마는 둘 다 사람으로 키우려 했다. 한순간 경계를 넘어 늑대로 변신하더라도 근본적인 삶의 영위는 사람으로 해나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남매는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여 사춘기를 맞이했을 때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선택했다.


어쩌면 현실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이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부모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크길 바라며 자신의 철학이나 신념의 틀 안에서 아이를 키우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그 아이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선택한다. 그 결과 어떤 아이는 부모의 바람대로 살지만 어떤 아이는 바람과는 다른 삶을 선택하고 산다. 영화 속 엄마처럼 다른 삶을 선택한 아이를 둔 부모는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로 간 자식의 앞날과 운명에 밤잠을 설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길을 선택해 가는 자식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라는 걸, 영화 속 엄마처럼 받아들여야만 할 때가 올 것이고 그 이후에야 부모도, 자식도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지도 모른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7세부터 의대 코스를 밟아나가야 한다는 요즘, 이 영화에서 새롭게 발견한 선택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딸과 함께 꽃을 보네>에 실린 글에, 몇 단락을 추가하고 몇 문장은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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