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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편지는 결국 도착한다.

영화의 위로 - 라스트 레터(2018)

by 최영훈

늦어도 여섯 시 십분 쯤에 일어나 온수 한 잔을 하고 커피를 내린 뒤, 딸과 아내의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대단한 메뉴는 아니고 떡이나 빵, 때에 따라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형태의 덮밥을 준비한다. 두 여자가 부은 얼굴을 핑계로 가끔 과일과 샐러드만 주문할 때도 있다. 그렇게 부지런한 두 여자의 출근과 등교를 도운 뒤, 돌아서도 여전히 일곱 시 반이다. 보통은 바로 서재로 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데, 가끔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다 좋아하는 영화를 또 보거나 보고 싶었던 영화를 뒤늦게 볼 때가 있다. 얼마 전, 제법 많은 비가 늦더위의 열기를 식힌 후 맞은 9월의 어느 아침에도 그랬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난 꼼짝없이 앉아 끝까지 다 봤다. 중간에 나오는 광고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채널을 고정하고 말이다.

한 사람을 향한 편지, 그리고 소설

이 영화는 영화 <러브 레터>의 연작이라면 연작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이 같고 편지가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하며 궁극적으로 사랑과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출연하는 배우 중에 <러브 레터>에 출연한 배우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 배역은 작지만 말이다. 전작인 <러브 레터>는 편지의 본질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특히 발신인과 수신인의 엇갈림, 편지 그 자체의 물성(物性), 그 물성으로 인해 견고하게 현실에 닻을 내리고 있는 기억과 추억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 <라스트 레터> 또한 전작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더 슬프고 안타까우며, 더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한 여자에 대한 소설 <미사키>, 딱 한 권만 쓴 소설가가 있다. 이 소설로 문학상도 받았지만 그 이후로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에만 집착하다가 신작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동창회에서 그녀라고 착각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연락처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그녀로 보였던 사람은 미사키의 동생이었고, 동생은 소설가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편지를 받은 소설가는 답장을 쓰려 하지만 발신인의 주소가 없는 탓에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있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는 고향집에 살고 있는 미사키의 딸과 조카가 보게 되고 편지 왕래는 두 소녀와 소설가 사이에서 계속된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 오가는 편지 속에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과거에 엇갈렸던 사랑, 전달되지 못했던 마음, 그 때문에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 한 사람의 부재(不在)를 견뎌내며 살아가는 남은 이들의 아픔에 대해 담담히 말하며 이어진다.


사랑의 발신인, 수신인, 그리고 배달부

이 영화의 이야기의 핵심 키워드라면 엇갈림이다. 그 첫 번째 엇갈림은 사랑이다. 편지는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다. 사랑이 이와 같다면 실패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종종 발신인과 수신인이 다를 때가 있다. 심지어 발신인만 있고 수신인이 없을 때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받아야 할 사람이 미처 자신이 수신인인지 모르는 경우 이리라. 더 최악은, 수신 거부, 혹은 수신 실패일 경우다.


이 영화에 나오는 고등학생 시절의 사랑은 수신 실패의 전형이다. 그 실패의 모든 조건을 안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수신에 실패한 편지가 반송되는 것과는 달리 이 영화에선 편지와 그 편지에 담긴 고교 시절의 사랑은 반송되지 않는다. 대신 엉뚱하게도 배달을 맡은 동생의 마음이 발신인인 소년에게 도착한다. 그렇다. 우린 잠깐 잊고 있었다. 우린 수신인이면서 동시에 발신인 일수도, 심지어 배달부이면서 수신인이자 발신인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로 인해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더 괴롭고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을.


다시 말하지만, 발신인과 수신인이 일대일 매칭이 되어 편지든 마음이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 오배송은 발생하지 않는다. 사랑을 해도 지들끼리 하고 싸움을 해도 왕래하는 편지 속에서 불탄다. 그러나 사랑과 인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마음을 받아줬으면 하는 이는 내 마음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내가 그 마음을 보내는 사이 나도 모르던 어떤 이는 내게 열심히 그 마음을 보내고 있는 걸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혼란이 막장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삼자대면으로 해결되진 않는다. 그렇게 해결될 거였다면 그 많은 사랑이 도착도 못한 채 지상에서 흩어지는 일은 없었으리라. 우리의 첫사랑이 오해와 무지라는 서랍에 갇혀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편지는 늦었고 받는 이도 없다.

만약 편지가 초대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도착이 늦으면 안 된다. 수신인의 명확함만큼이나 도착 시기도 중요하다. 지금이야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메일이 날아가지만 편지에겐 가는 날들이 필요했다. 거리가 멀면 오래 걸렸고 바다를 건너면 더 오래 걸렸다. 그러니 특정 날짜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다면 편지가 날아가는 시간과 그 편지를 받은 뒤 그 사람이 오는 여정까지 고려하여 편지를 보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사랑이 한 통의 초대장이라면 우선 받아야 될 사람이 정확히 받아야 한다. 더불어 받은 사람이 초대에 응할 수 있어야 한다. 때와 상황이 다 맞아떨어져야 사랑이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 소설가는 고교 졸업반 시절의 연애편지 수신인이자, 대학 시절 잠시 사귀었던 미사키가 자신이 보낸 소설의 원고를 읽고 또 읽으며 팍팍한 결혼 생활을 견뎌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그녀의 딸이 본가를 찾아 추모를 끝낸 소설가에게 직접 말해줬다. 그 말끝에 소녀는 소설가가 엄마에게 좀 더 일찍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내비친다. 그 말을 들은 소설가는 잘 못한 것이 없는 데 눈물이 흐른다. 가슴이 아프다. 내 탓인 것만 같다.


그의 탓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대학 시절 헤어진 후, 무려 이십 년 가까이 미사키에 관한 이야기만 써 왔다면, 하다못해 소설 소재를 찾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찾아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그러지 못했고 지금은 그러했다. 하필 우연히 들른 동창회에서 그녀의 동생과 마주쳤을 때, 그때는 이미 그녀가 죽은 뒤였을 뿐이었다. 마음은 한결같았고 그리움은 더 깊어졌는데 그 마음과 그리움이 담긴 발걸음이 느렸을 뿐이다. 늦게 온 편지의 수신인이 없을 뿐이다. 편지는 늦었고 받는 이도 없다. 그뿐이다.

수신 거부를 거부한다.

사랑은 도착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뒤늦게 도착한 사랑을 죽은 미사키를 대신하여 나누며 그녀를 애도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마음에 깊이 남아 그 사람의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아왔음을 알고 감사해한다. 이만한 축복이 또 어디 있겠나. 죽은 이는 모른 채 죽었지만 남은 이들은 그 축복을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안타깝다. 살아 누릴 사랑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감사하다. 엄마의 불행한 나날들만 봤던 딸도, 눈부셨던 언니의 청춘의 한 자락을 간직하고 있던 동생도, 그래서 불행한 결혼생활 속에서 시들어가던 언니를 보며 더 슬퍼했던 동생도 겨우 위로를 받는다. 사랑받았었고 계속 사랑받아 왔다는 사실이 그의 영전에 꽃다발처럼 놓인다. 사랑의 주인은 없으나 그 늦게 도착한 사랑으로 인해 모두의 마음에 살얼음처럼 남아 있던 아쉬움이 녹아내린다. 죽은 자의 앞에 놓이는 장례식의 꽃이, 그 풍성함으로 살아남은 자에게 안도감을 주는 것처럼 없는 이를 향한 현존하는 사랑은 그렇게 남은 이들을 위로한다.


영화의 주요 촬영지는 감독의 고향인 미야기 현의 센다이 시와 시로이시 시다. 촬영은 디지털카메라로 했는데, 정작 주인공인 소설가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미사키의 동생에게 앨범을 만들어 선물한다. 그리운 것을 찍는 데는 도구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 아닐까. 무엇으로 찍든 그리운 것이 찍힐 계절이다. 좀 있으면 고향도 가고, 그래서 옛사랑의 흔적도 더듬어 보는 이도 있으리라. 이 계절에 차분히 볼만한 영화다. 숏폼에 중독되어 긴 영화를 못 보는 사춘기 딸도 끝까지 볼 수 있는 영화이지 않을까. 아빠와 딸이 함께 본다면 편지처럼, 사진처럼 오래 기억에 남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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