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 4- 파인딩 포레스터(2000)
한 달 전쯤이었나, 대치동에서 유행한다는 소위 7세 고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온 가족이 함께 봤었다. 개그우먼 이수지 씨가 자신의 콘텐츠에서 다뤘듯이 저 7세 고시를 위해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는, 그야말로 똥오줌도 못 가리는 서너 살의 아이들이 4세 고시라 불리는 시험을 치른 뒤 관련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내용에 우리 가족 모두는 기겁을 했다. 아이의 공부 욕심에 맞춰, 또 자기가 정한 미래로 가는 여정에 동행하며 지원해 주는 부모인 나와 아내 입장에서는, 우리가 너무 나태한 건 아닌지 하는 말도 안 되는 반성 끝에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어떤 것이 올바른 자녀 교육인지, 약간의 심란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 하나를 겪으면서 그때 봤던 다큐멘터리 내용과 함께 이 영화가 생각이 났다. 별 일 아니었다. 중학생이 된 딸은 초등학교 시절 자신의 독서량이 너무 부족했음을 아쉬워하며 독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있기에, 먼저 읽은 필자는 꾹 참고 150페이지까지 읽으면 극적인 반전에 깜짝 놀랄 것이라며 완독을 독려했다. 독려를 하면서도 내심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 아닌 의심을 했다. 그러나 딸은 며칠 만에 다 읽었고 다 읽어낸 딸과 함께 그 책에 담긴 삶과 사람의 의미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후, 딸은 이 책의 독서록을 썼다. 학교에선 독서와 독서록 제출을 장려했고 독서록을 제출하면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어 고교 입시에 도움이 되기에 잘 쓰려고 작심한 듯했다. A4 용지 한 장 정도의 분량으로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 나한텐 선뜻 보여주는 걸 망설였던 딸은 엄마에겐 흔쾌히 보여줬다. 아내는 제법 긴 시간, 진지하게 읽어나갔다. 이후 서평의 평을 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른이 쓴 서평을 여기저기서 가져와 짜깁기한 것 같다. 학교에서 배우고 제시한 독서록의 틀이 있을 텐데, 그걸 지키지 않은 것 같다.”였다.
이에 대한 딸의 반박은 이랬다. “난 평범하게 쓰고 싶지 않다. 다른 친구들과 비슷하게 쓰는 건 더 싫다. 내가 진학을 원하는 학교에 가기 위해선 수준 이상의 글쓰기 실력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그걸 연습해야만 한다.”였다. 아내는 딸의 말에도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고 딸은 엄마의 말에 서운함과 억울함을 동시에 느끼며 눈물이 그렁댔다. 줘보라고 했다. 딸에게 받아 읽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쓴 것이라고 보기엔 수준이 높았다. 단어의 선택도 문장의 구성도 글의 구성도 그랬다. 상투적이지 않았고 전형적이지 않았다. 아내의 평이 이해가 갔다. 두 사람의 옥신각신은 이 영화의 내용과 겹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농구 특기생으로 유명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한 한 월레스는 우연히 위대한 소설 한 편을 세상에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진 포레스터라는 작가와 인연을 맺게 된다. 포레스터는 월레스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세상에 알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낸 뒤 그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 그렇게 그의 가르침이 담긴 에세이를 제출한 월레스에게 문학 교수인 크로포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이후, 크로포드는 월레스에게 에세이 대회에 참가해 글쓰기 능력을 입증해 보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하게 되는데, 농구 훈련과 학업으로 시간이 부족했던 월레스는 포레스터의 미발표된 글 중 하나를 다듬어 콘테스트에 제출한다.
그러나 이 글로 인해 월레스는 학교 이사회에 출석하게 되는데, 크로포드 교수가 포레스터가 월레스가 제출한 글과 유사한 글을 출판한 적이 있다는 걸 알아냈기 때문이다. 월레스는 작가의 허락을 받았다는 걸 증명해 보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포레스터와의 약속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결국 크로포드는 반성문을 써서 친구들 앞에서 읽으라고 압박한다. 이 압박을 거절한 월레스는 전액 농구 장학금이 위험해지고, 학교에서는 자말이 농구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 표절 혐의를 철회하겠다고 했지만, 월레스는 마지막 자유투를 고의로 실수하여 우승을 놓친다. 이 경기를 TV로 지켜보던 포레스터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서 교사와 이사들 앞에서 월레스가 쓴 편지를 낭독하여 월레스의 글 솜씨를 확인해 준다.
영화는 얼핏, 한 소년의 성장기로 보인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이 <굿 윌 헌팅>에 이은 차기작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전작인 <굿 윌 헌팅>과 함께, 재능이 피어나기 위한 조건을 탐구한, 이란성쌍둥이 같은 영화다. 한 인간의 재능과 미래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요소 중에서 전작은 한 개인의 과거를 다뤘고, 본 작품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선입견과 위계와 권력을 다루고 있다. 결국 이 두 영화는 한 인간이 자신의 재능을 알고 발견한 뒤 자신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하기 위해 어떤 장애들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재능은 저마다 다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의 재주만 있지만 어떤 사람은 월레스처럼 여러 재주가 있다. 자신의 재주를 표현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다. 어떤 이는 숨기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재능을 과대 포장하여 세상에 내놓기도 한다. 재능 또한 타인과의 다름이지만 그 표현 또한 다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딸과 같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재능을 인식하고 그 재능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사회에게도 중요하다.
자신에게 여러 다른 재능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 인지를 통해 자신의 인격의 다름을 형성하고 그 형성을 통해 독자적인 자신감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 각자가 그 나름의 고유한 미래를 그리며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결국, 재능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의 발견과 표현이다. 어떤 재능과 또 어떤 표현은 또래와 학교의 통념과 상식을 벗어날 수도 있고 아내와 같이 보수적인 사람에겐 예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청소년들이 그 예외가 되는 것이 두려워 이미 사회가 “재능”이라고 인정할 법한, 소위 교과목을 잘하는 것 자체만을 재능으로 인식하고 살고, 학교와 제도가 제시하고 수용될법한 방법으로만 그 재능을 표현하면, 우리는 진정한 재능,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 상실은 이 사회의 다양성의 상실, 발전 가능하고 도래 가능한 수많은 미래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그 상실에 대한 생각이 한 소년을 떠올리게 했다. 얼마 전 <유퀴즈>에 출연한 이지섭이라는 중학생 소년이다. 말벌을 애완견처럼 다루고 곤충의 도감을 자체 제작하는, 그야말로 곤충 덕후이자 박사인 친구였다. 이 친구의 거의 전문가 수준의 탐구 생활을 부모가 적극 지원해주고 있다는 것이 필자에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어서 어린 시절, 이 소년만큼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던, 필자가 구독하고 있는 채널의 주인인 “새덕후 어진”도 떠올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탐조(探鳥) 생활에 빠져든 끝에, 현재는 관련 전문가와 함께, 심지어 관련 기업과 지자체의 협조까지 받아 우리나라의 텃새와 철새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수준에 다다랐다.
두 명의 순수한 마니아에 대한 생각이 의대 진학을 목표로, 7세 고시에 내몰리는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학원 차에 실려 다니는 아이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도 이어졌다. 얼마 전 딸에게 들었는데, 반장은 학원을 다섯 개 다닌다고 한다. 딸에게 “도대체 무슨 과목의 학원까지 다니는 거냐?”하고 물었더니, 딸은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 녀석이라고 알겠나. 지금 다니고 있는 영어와 수학 학원을 제외하면, 제가 다녀본 학원이라곤 초등학교 때 취미 삼아 다닌 미술학원과 “수포자”였던 우리 부부의 전철을 밟을까 두려워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산을 가르쳤던 게 다였으니 말이다. 잠시 후, 딸은 “토론이나 논술 아닐까?”라고 말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학교를 무사히 오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철없는 아빠의 생각이라 욕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이 영화와, 쌍둥이 격인 <굿 윌 헌팅>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재능을 발견하여 한 인간의 인생을 바꾸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되는 길을 열어주는 것도, 그 재능을 억압하여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게 하는 것도 그 재능을 가진 어린이와 청년 주변의 어른에게 달렸다는 것을, 어른들은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