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세 번 이상, 수영장에 간다. 이렇게 말하면 수영을 무지 오래 하고 수영에 미쳐 있는 사람 같지만 수영을 한 세월을 다 합쳐도 삼 년 남짓이다. 딸을 낳기 전, 삼십 대 후반에 아내의 권유로 배우기 시작해서 1년 정도 했고, 육아에 동참하면서 그만뒀다가 작년 여름, 역시 아내의 권유로 다시 해서 지금에 이른다. 같은 수영장을 다시 가는 데 십몇 년이 걸렸다.
수영은 팀 스포츠가 아니기에 내가 노력하고 시간을 들인 만큼 성과가 보인다는 점이 매력이다. 물론 감을 잡기까지, 물속에서의 내 신체의 움직임의 효율성을 캐치하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한번 딱 그 감이 오면 미묘한 차이, 아주 작은 변화가 발생하고 그 이후 전혀 다른 수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외롭다. 이 외로움 또한 수영의 매력이다. 이런 요소들이 동호인들을 수영에 붙잡아 두는 매력들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수영의 매력과 함께 인생의 깊이까지 담고 있다.
수영장과 바다의 차이
수영장에서도 멀미를 하는 사람이 있다. 옆 레인에서 동작이 격한 접영을 하거나 유독 사람이 많이 와서 수면이 유독 요동칠 때면 자신의 몸을 컨트롤 못해서 멀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려도 수영장의 물은 가로지를 수 있다. 코어를 단단히 하고 손끝을 날카롭게 뻗어 가르며 앞으로 갈 수 있다. 바다는 다르다. 가족과 해수욕을 갔을 때 바다 수영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불과 몇십 미터나 될까?
수영장이 개와 같다면 바다는 늑대와 같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물인 것이다. 바다는 계속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래서 바다를 해치고 앞으로 나가는 수영은 다른 차원의 수영이다. 그걸 백육십 킬로미터를 해내는 것이 이 영화에 담긴 실화다. 그것도 아주 뒤늦게 말이다.
스물여덟에 실패한 과업에 예순이 넘어 재도전한다는 건 미친 짓이다. 마라톤을 좋아할 때 하프는 수십 번 뛰었지만 풀코스는 딱 한번 뛰었다. 한 번 뛰고 나서, 이건 미친 짓이라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때가 서른 즈음이었는데 지금 다시 누군가 내게 풀코스를 도전하라고 하면 욕부터 할 것이다. 그런데 스물여덟에 실패한, 그것도 쿠바의 하바나에서 플로리다의 키웨스트까지, 160킬로미터의 멈추지 않는 수영 마라톤에 도전한다는 건 정말 정신 나간 짓이다. 그녀는 모두가 말리는 이 모험에 다시 도전했다.
도전이라는 말의 진부함
도전이라는 말은 진부해졌다. 예능 프로그램에선 제기차기 시합을 할 때도 이 말을 쓴다. 덕분에 도전이라는 단어는 한 없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도전이라는 말의 무게를 곱씹었다. 더불어 포기와 우정과 상처와 후회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도전은 확률의 과녁을 향한다. 미래로 쏘아질 화살이다. 어떤 상처가 있었든, 어떤 실패가 있었든, 어떤 후회와 아픔이 있어든 간에 도전은 그 모든 걸 뒤로 한다. 쪼그려 앉아 울 시간에 앞을 본다. 도전하는 사람은 뒤돌아 볼 순 있어도 멈추지도 뒤돌아 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도전은 언제나 실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실패로 인한 상처와 좌절의 불길함을 안고 있다. 도전하지 않으면 무릅쓰지 않아도 될 것들이다. 도전하는 사람의 뒷모습이 단호해 보이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각오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도전이 인생에 다시없을 도전이 될 수도 있음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심장이 뛰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설렘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슴이 뛸 때
첫 번째인가, 두 번째 도전에서였나? 더 이상 수영할 수 없는 나이애드의 상태를 보고 포기를 종용하는 항해사 바틀렛에게 나이애드의 친구이자 코치를 맡았던 보니가 말한다. "우리가 언제 다시 가슴이 뛰어 보겠어요."라고. 물론 그 도전은 포기된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맞이한 다섯 번째 도전, 생계와 가정 때문에 도전에 함께 못하겠다던 바틀렛이 합류한다. 이 도전의 중간쯤, 바틀렛은 보니에게 병에 걸렸다고 고백하며, 다시는 이런 도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딸을 보고 있노라면 그 얼굴에서 새로운 걸 배우는 사람의 설렘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겐 그런 게 없다. 설렘도, 기대도 없다. 언제 마지막으로 가슴이 뛰어봤는지, 설레어 봤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언제 다시 가슴이 뛸 수 있을까?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와 벅찬 도전을 앞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설렘으로 인한 두근거림을 말이다.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삶이 있다. 거대한 도전을 하는 삶만이 살아 있는 삶이라는 말은 아니다. 주인공 다이애나처럼 나에 한계를 정하는 세상의 상식에 도전하는 삶만이 살아있는 삶이라는 말이 아니다. 가능한 도전 앞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핑계를 대며 그 도전의 가능성을 은폐시켜버리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인생, 항해 그리고 수영
진부하고 흔한 말이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모든 삶은 흐른다.>에서 “인생은 멀리 떠나는 항해와 같다.”라고 했다. 그 “인생이라는 항해를 제대로 하려면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주저함 없이 항해에 나섰더라도 그 용기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유능한 항해사가 치밀하게 경로를 정해도 자연의 변덕 앞에선 소용없다. 멀리 선 폭풍이 몰려온다. 뒤에서 나를 밀어주던 조류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날 마주하며 흐르는 조류를 거슬러 헤쳐가야 할 때도 있다. 내 과업을 알 리 없는 바닷속 수많은 생명체에 대해선 말해 무엇하랴.
바다 수영 마라톤을 하는 사람은 결국 바다의 변화와 변수에 맞춰 경로를 수정해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겪었던 성폭행과 가정의 상실과 스물여덟 살의 실패는 바다에서 맞이하는 자연재해 같은 것이었다. 원한 적 없고 바라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그런 것들이었다. 통제 가능한 삶을 살다 보면 인생 전체가 통제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최근 뉴스에서 봤다시피 우린 빈대 한 마리조차 확실하게 없애지 못한다. 하물며 인생의 그 수많은 파도들이란.
결국 받아들이며 가는 수밖에 없다. 독성이 있는 해파리와 상어의 두려움 때문에 포기하는 대신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여 도전하는 그녀처럼 우린 우리 앞에 닥쳐오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과 장애를 나름의 방법으로 헤쳐가고 적응하고 수정해 가며 가는 수밖에 없다.
인생을 길들인 사람은 없다.
올해로 65세가 된 아네트 베닝은 61세의 나이애드를 연기했다. 60세인 조디 포스터는 58세인 보니를 연기했다. 당연히 분장도, 변장도 필요 없었다. 화장기 없이, 얼굴의 기미와 주근깨와 까맣게 탄 피부와 주름과 손질 안 된 머리칼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녀들은 인생이라는 바다를 묵묵히 헤쳐 왔고, 그 헤쳐 온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자신감과 당당함을 영화 속에서 보여줬다. 나이애드가 읊조렸던 메리 올리버의 <여름날>의 한 구절처럼 그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격정적이고 귀중한 한 번뿐인 삶을 힘껏 살아왔음을 보여줬다.
내가 달리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엔 모든 것이 죽지 않는가, 그것도 너무나 이르게?
격정적이고 귀중한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쓸 계획인가?
“격정적이고 귀중한”의 영어 원문은 “wild and precious”다. 직역하면 야성적이고 소중한 삶이다. 그렇다. 인생은 야성적이다. 길들여지지 않는다. 개가 아니라 늑대와 같다. 누군가 길들였다면, 그래서 원하는 대로 살아냈다면 그 방법을 기록하여 남겼을 테고, 그랬다면 후대의 사람들이 그걸 못 찾았을 리가 없다. 누구도 인생을 길들이는 방법을 모르기에 사람들은 이 길들여지지 않은 인생을, 이 한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전력을 다해 살아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지 모른다. 악천후에도 수영을 포기하지 않는 나이애드를 보며 바틀렛이 말한 것처럼, 2보 전진 후에 15보 후퇴하는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