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 -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
세상 시끄러운 여름이었다. 감사하게도 필자의 삶은 조용하게 이어졌지만 세상은 시끄러웠다. 정치는, 언제나 그랬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올여름 유독 더 시끄러웠고 정부와 의사는 여전히 대치 중이다. 올림픽에서 그 목표를 초과 달성한 체육계는 축하를 받기도 전에 숨기고 있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올 초부터 시끄러웠던 축구계는 여전히 뒤숭숭하다. 이뿐인가 두 개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북한은 유치하게도 풍선 따위를 지치지도 않고 날려 보냈으며 그 와중에 주식 시장은 느닷없이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좋은 뉴스 하나 없이 사상 초유의 무더위를 견뎌내면 서늘한 9월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이라면, 추석을 코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무더위에 진절머리를 냈으리라. 이런 이유로, 시끄럽고 요란스럽고 야단스러웠으며 무더웠던 여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위의 끝자락이 남아 있는 요즘, 독자들에게 고요한 여름의 한 장면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 영화를 선택했다.
귀가 안 들리는 청년 시게루는 쓰레기 수거 일을 한다. 그에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타카코라는 여자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시게루는 해안가의 방파제를 따라 쓰레기를 열심히 수거하다 앞이 부러진 서핑 보도를 발견하는데, 그 보드를 집에 가져가 두툼한 스티로폼을 이어 붙여 수리한 뒤, 그 보드를 들고 무작정 서핑을 시작한다. 보온을 위한 서핑 슈트도, 보드에 바르는 왁스도 없다. 자세를 봐줄 선배와 동료도 없다. 당연히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크루 따위도 없다. 끌렸기에 부러진 보드를 집어 들었고 바다가 불렀기에 뛰어들었을 뿐이다.
그런 시게루의 열정을, 그 무모한 뛰어듦을 타카코는 가만히 지켜본다. 시게루의 서핑이 끝날 때까지 해변에 앉아 기다린다. 그가 황급히, 대충 벗어 놓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곱게 개어놓은 후 그 옆에 앉아서. 가끔 그를 위해 음료수를 사러 갔다 오는 거 말고는 늘 그 자리, 그 자세로 앉아 바다로 나간 시게루를 기다린다. 이후, 그 해변에서 활동하는 서퍼들과 그 서퍼들의 선배인 서핑 숍의 사장, 그리고 시게루와 함께 일하는 선배의 배려와 관심 속에서 시게루의 서핑 실력은 늘고, 덕분에 대회도 참가하여 좋은 성적도 올린다. 타카코는 언제나 해변에서 그를 기다린다.
이 영화엔 대사가 별로 없다. 그나마 있는 대사는 대부분 조연들의 몫이다. 주인공인 시게루와 타카코의 목소리는 들을 수도 없다. 둘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어서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났을 때도 둘은 이렇다 할 말없이 화해한다. 대회에서 상을 받았을 때도 함박웃음으로 기쁨을 나눴고 수리한 낡은 보드가 다시 부러졌을 때의 안타까움과, 돈이 모자라 사고 싶었던 보드를 뒤로하고 돌아설 때의 아쉬움도 눈빛과 어깨 짓으로 표현한다. 사실 영화엔 등장인물도 몇 안 된다.
이름을 가진 배역도, 대사가 있는 배역도 별로 없다. 등장하는 장면의 분량만으로 주인공을 판단한다면 단연코 바다가 주인공이고 그 바다에서 파도를 타고 있는 무명의 서퍼들이다. 그러나 감독은 주인공 커플에게 대사를 주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사람과 바다가 함께 있는 풍경을 90퍼센트 이상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전한다. 말없이 말하는 법을, 말보다 더 강한 침묵과 고요의 힘을.
너무 말이 많다. 다들, 혼자 있어도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걸으면서도 통화를 한다. 예전에 그나마 나았다. 다들 휴대폰을 받으면 귀에 댔던 시절엔 말이다. 휴대폰을 꺼내지 않고 통화할 수 있었던 시절에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휴대폰에 꽂은 이어폰 줄이 보여서 혼자 떠들면서 걸어도 통화를 하려니 짐작하고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엔 아니다. 귀에 쏙 들어가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다 보니 아주 가까이 다가올 때까진 그 사람의 중얼거림의 이유를 알 수 없다. 좀 떨어진 발치에서 보면 영락없이 혼자 떠들고 오는 데, 실실 웃기까지 하면 살짝 무섭기도 하다. 이런 공포는 마주 오는 이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와야 겨우 해소된다. 그제야 귀에 꽂힌 그 작은 달팽이 같은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은 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엔 자신의 신체를 메시지 수용체로 사용하고 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미디어, 그 자체다. 지하철을 타면 다들 뭔가를 보고 있다. 웹툰을 보고 뉴스를 보고 다른 이의 SNS를 들락거린다. 불경을 보는 사람도 있고 성경을 보는 사람도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없다. 숲과 바다, 그리고 도시와 대규모 산업단지를 곁에 두고 굽이쳐 가는 동해선을 타고 가면서도 창밖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날 부르지 않는 세상이 던지는 메시지에 기꺼이 호응하기 위해 스마트 폰을 들여다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구의 육성도 듣지 않지만 사람들의 수런거림은 지칠 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내 삶은 대체로 조용하다. 수런거림도, 소란도 드물다. 여름휴가철이면 관광버스가 대로변에 줄지어 서곤 하는, 부산에서 제법 유명한 맛 집이 있는 관광지라면 관광지에 살지만, 거기서 도로하나 들어간 동네는 조용하다. 종종 “방충망 갈아요.”하는 호객 구호를 반복 재생하는 승용차와 “재첩국 사이소. 시락~국.”하며 아침 메뉴를 제안하며 지나가는 소형 트럭이 지나갈 뿐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별로 없다. 일 때문에 일주일에 두어 번 고객과 미팅을 하거나 감독과 회의를 할 때만 열심히 말을 할 뿐이다. 아내와 딸과 마주 앉아도 주로 들어주는 편이다. 진지하게 들어주기만 해도 두 여자는 아주 만족해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런 삶이다 보니 종종 대중교통을 타거나 수영장으로 걸어갈 때 마주치게 되는 “혼자 있으면서도” 수다스러운 사람들을 보게 되면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아내를 따라 프랜차이즈 커피숍에라도 가게 되면 벌집에서 나는 소리와 비슷한, 사람들의 수런거림에 당황하곤 한다. 어쩌다 아내를 따라 백화점이라도 가면 어지러울 정도다. 그러다 문득, '다들 쉬기는 쉬는 건가?', 하는 걱정이 든다.
앞서 말했듯, 두 번째 연출작에서 음악을 없앴던 기타노 다케시는 이 세 번째 연출작에선 대사를 거의 없앴다. 이 말의 부재를 통해 더 강하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 바다와 서핑을 향한 열정도, 두 사람의 견고한 사랑도, 질투도, 믿음도, 그리고 한 사람의 부재와 남겨진 이들의 슬픔까지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말없이도 말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은 언제나 의미의 잔여물을 만든다는 것을, 그래서 오히려 말없이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린 종종 침묵을 통해 말하는 법과 그 침묵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를 듣는 법을, 그것을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 말이 없다. 가타부터 긴 말을 하지 않는다. 그 흔한 자기소개도,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배경에 대한 설명도 없다. 두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고 여자의 가족관계는 어떻고 남자의 부모는 어디로 갔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손을 잡는 장면이 나왔던가? 섹스는커녕 키스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절절히, 서로에게 말하는 장면도 없다. 그러나 충분히 전해졌다. 두 사람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바다에 나간 시게루를 기다리는 타카코의 굳게 다문 입술과 고정된 시선으로, 사람들이 다 내려서 앉을자리가 넘쳐나는 버스 안에서도 끝끝내 앉지 않고 서서 가는 타카코의 흔들림 없는 표정과 보드 때문에 함께 버스에 오르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해서 몇 정거장을 뛰어가는 시게루의 부지런한 달리기로, 사랑은 드러난다.
시게루가 왜 서핑에 빠지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당연하다. 열정엔 설명이 필요 없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인생이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있을 불멸의 걸작을 만드는 일이라면 당신의 오늘이 모두에게 이해될 필요는 없다. 당신의 열정이, 당신의 선택이, 당신의 불꽃같은 삶이 보편타당성을 가질 필요도, 모두에게 해석되어 마땅한 언어로 표현될 필요도 없다. 더 나아가 당신이 만든 걸작을 모두가 기억할 필요도 없다.
한 인간의 삶이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라면, 동시대를 사는 인류와 후대에 해석될 메시지라면 당연히 받는 사람도 있고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또 받는 다고 해서 그걸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런 기대를 할 필요도 없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없듯이 모두에게 이해받을 필요도 없다. 내 열정을 이해해 주는 몇 사람, 내가 뭘 하든 변함없이 날 사랑해 줄 그 사람, 그 몇 사람이면 충분하다. 이런 이유로, 시게루가 서핑을 그렇게 시작했듯, 뭔가를 시도하기 전에 올바른 매뉴얼을 찾고 그 시도에 필요한 모든 걸 다 갖출 필요도 없다. 그저 마음이 가르키는 쪽을 향해 묵묵히 나가면 된다. 푹 잠길 정도로 온 몸과 맘을 던지면 된다.
“바다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사람이 헤엄치지 않는 겨울일지도 모른다.”는 헤드 카피가 있다. 필자가 좋아하는 국내외 헤드 카피를 모아놓은 자료 파일에는, 일본 ANA 항공사 광고의 카피라고 적혀 있다. 아마도 겨울여행을 독려하는 긴 바디카피가 딸려 있지 않았을까?
이번 여름휴가도 다들 사람 많은 데로 갔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휴가를 보내야 제대로 본 낸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사람이 넘쳐나는 바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밤마다 해변의 술집과 식당의 불이 꺼지지 않는 바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런 곳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면, 그런 번잡스러운 휴양 도시에서 제대로 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착각하다, 집에 와서야 몸과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면 그 휴가는 휴가가 아니다. 진정한 휴가가 세상과의 소통을 잠시 끄고 머리도 몸도 잠시 쉬게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런 여름휴가를 보내지 못했다면, 본격적인 가을이 오기 전에, 아직 여름의 열기가 버티고 있는 요즘, 이 영화를 보면서 잠시 쉬었으면 한다. 두 시간의 가장 조용한 바다를 보면서, 진정한 여름휴가를.
타카코 역의 오시마 히로코는 이 영화를 끝으로 은퇴했다. 시게루 역의 마키 쿠로우도는 실제 서퍼였고 이후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에 꾸준히 출연했다. 최근작으로 <오키쿠와 세계>가 있다. 승려로 잠시 출연한다.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의 세 번째 영화다. 앞서 썼듯, 두 번째 영화에선 음악이 없었고 세 번째 영화에선 거의 말이 없는 대신 훌륭한 음악이 있다. 세 번째 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음악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사랑하는 음악가 히사이시 조다.
영화의 배경은 가나가와 현, 하코네시의 유가와라다. 시게루가 파도를 타는 해변은 유가 해수욕장이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유가와라부터 <슬램덩크>의 배경 도시인 가마쿠라까지 이어지는 도시들이 사가미 만을 둘러싸고 있다. 시게루와 서퍼들이 치바에서 열리는 서핑 대회 출전을 위해 카페리를 타고 가는 데, 지도상으로 봐도 육로로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른 경로다. 사가미만에서 도쿄만으로 들어가면, 도쿄 건너편에 있는 현이 치바현이니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전혀 촌스럽지 않다는 것. 기타노 다케시의 미적 감각이랄까, 색감이 워낙 뛰어난 탓일 수도 있다. 또 주인공과 서퍼들이 현재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를 입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예를 들어 스투시나 마우이 같은 브랜드 말이다. 주인공 시게루가 신고 있는 흰색 하이탑 스니커즈는 컨버스다.
패션뿐만 아니라 자동차들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당시엔 일본 경제가 잘 나가던 때라 소위 JDM이라 불리는 일본 내수용 스포츠카의 전성기였다. 게다가 미국에서 다양한 사륜 구동차가 수입됐고 유럽 자동차 브랜드의 신차와 빈티지 모델도 흔했다. 서핑 대회가 열리는 해변 주차장에 폭스바겐 트랜스포터의 1세대 모델이 서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 글은 <이코노미톡 뉴스>에 실린 필자가 쓴 칼럼의 무삭제 버전이다.
당연하게도, 게제 된 칼럼은 훨씬 건조하다. 당연히 "사족"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