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 2 - 25 . 늑대사냥(2022)
아내가 없는 밤은 길다. 자자는 사람이 없으니 언제 자야 될지 모르겠다. 늦은 밤, 채널을 돌리다 불쑥 이 영화가 생각났다. 넷플릭스에 있으면 보기로 했다. 폭력의 과잉, 불필요한 폭력의 남발이라는 기사 제목들이 떠올랐다. 어지간한 야한 영화는 아내와 같이 볼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는 같이 볼 수 없다. 기회는 이때뿐이다.
한국 영화는 납득시키려 한다. 폭력이나 에로티시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주저한다. 그것들은 합리적 설명이 필요 없는 것들이고, 영화 속에선 더 그래야만 한다. 그런 맥락에서 난 이때까지 한국 영화들 중에서 볼만한 고어, 특히 하드 고어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필요 이상의 폭력, 흘러넘치는 피, 떨어져 나가는 사지와 살점들, 만연한 죽음.... 한국 영화에서 이런 것들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과거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좋아했는지도... <배틀로열> 같은 단순 무식한 영화도...
거의 사반세기 전에 써진 내 석사 시절 페이퍼 한 단락에 고어에 대한 정의가 담겨 있다.
고어영화의 정의를 이제 내려보자. 필립 루이에는 몇 가지 정의를 인용하고 총체적으로 정의를 내린다. 마끄 고딩은 “고어 영화는 피를 뿜어 나오게 하고 이를 최대한으로 오랫동안 스크린에 잡아놓는다.”라고 정의했으며, 필리페 로스는 “순수한 공포영화에 대한 경향은 하나같이 아주 역겨운 씬들의 거의 병적인 축적이 그 특징이며 매우 사실적이고 선혈이 낭자한 특수 효과들에 의존하고 있다. 즉 복부가 터지고 내장이 포장도로 위에 펼쳐지고 머리들이 땅에 구르고 팔다리들은 잘리고 뽑히는 등. 이 모든 것은 물론 거의 항상 클로즈업으로 보여지거나 그 더러운 세부적인 것들이 풍성한 느린 동작으로 보여진다.” 고 말한다.
고어영화는 클로즈업으로 피와 내장들을 세밀하게 보여줌으로써 고어는 영화에서의 폭력과 죽음을 언급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며 지금까지 대부분의 감독들이 사용해 왔던 영화적 합성(생략, 외화면 등)을 문제 삼는다. 즉 암시를 거부한다. 고어는 관객에게 겁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충격을 주고 역겨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에 있어서 완전히 허구임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이블데드 2편에서 괴물들에게 끌려 들어가 죽은 희생자의 피가 분수처럼 솟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고어는 영화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장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장르적 맥락에서 보면 <늑대사냥>은 완벽한 영화다. 심리적 갈등도 없고 인물 간의 복잡한 관계도 없다. 할리우드 공포 영화의 단골손님인 가슴 큰 여자 배우도 없고 그 흔한 키스씬도 없다. 폭력뿐이다. 사지절단과 넘쳐나는 피가 있을 뿐이다.
고어엔 명분이 필요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우린 이유 없는 폭력의 시대를 살면서도 영화 속 폭력에서는 합리적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 반대가 건강한 것 아닌가? 현실에서의 폭력이 이념과 복수와 응징과 처벌과 심지어 자본의 추구를 위해 행해져야-물론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야만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 하고 영화 속 폭력은 아무런 이유 없이도 행해질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영화 속 폭력이 그렇게 행해져야 진정한 판타지, 환상이 되고, 관객은 그 환상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만끽한 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영화는 그 목적에 충실하다. 아무런 이유 없는 폭력을 보여준다. 관객에게 던지는 몇 가지 단서는 그저 게임의 오프닝 같은 것이다. 영화 내내 폭력이 이어진다. 문제 해결과 복수와 응징과 처벌과 자본의 획득과 자유의 추구를 위한 폭력이 아니라 폭력적일 수 있어서 폭력을 한다. 고통 없이 죽일 수 있고 아무런 상처 없이 죽일 수 있지만 고통도 상처도 극대화한다. 심지어 영화 중반까지 주인공이라 생각됐던 서인국의 죽음조차 절단과 혈흔과 비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행해진다.
합리적이지 않은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개연성을 따진다. 그런 콘텐츠엔 그런 것이 필요 없다. 피터팬이 하늘을 나는 데는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가장 영화적인 영화 중 하나다. DC와 마블의 코믹스처럼, 해리포터와 호빗의 이야기처럼 환상 그 자체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자 폭력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런 심리적 부담감이 없었다. 마치 포르노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 같은 부류들이 만든 영화의 반대쪽에 있다. 우리가 예술영화랍시고 참고 보는 그 지루한 일상을 닮은 영화의 반대쪽에, 건강엔 아무런 도움도 안 되지만 먹는 내내 달콤함을 선사하는 아이스크림, 또는 요즘 친구들이 좋아하는 탕후루 같은 이런 영화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들이 서슴없이 만들어져야 이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그나마 미치지 않고 내적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예로, 80년대, 미국의 보수주의가 극단에 이르렀을 때, 그때가 미국 공포 영화의 전성기였다는 걸 잊지 말자. 일상에서 숨 쉴 공간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숨 쉴 공간과 시간을 주는 것이 대중문화의 한 역할 아닐까? 내 기준으로 보면... OTT의 유명한 콘텐츠들도 얌전한 편이다.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