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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05. 2024

긍정에 대한 유감

영화의 위로  - 아이 필 프리티(2018)

왜 취미가 독서냐고 물어보면 TV가 재미없어서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게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많이들 공감하지 않을까? 저출산 해결을 위해 정부가 일부러 공중파 TV를 재미없게 만들도록 지시한 것 같다는 농담을 아내에게 했을 정도니 말이다. 가끔 인내심을 갖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채널을 돌리다 보면 그 인내심이 바닥나고, 이후 은근슬쩍 짜증이 나고, 그러다 보면 내가 읽고 싶어서 샀기에 당연히 내가 좋아하고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이 잔뜩 들어 있는, 빚처럼 눈처럼 쌓여 있는 책들에게 눈이 가고, 결국 읽게 된다.      


그래도 이렇게 책에 손이 가기 전,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채널을 열심히 돌리다 보면, 방송의 흐름이랄지, 어떤 유행이 감지될 때가 있다. 최근에 느껴진 것은 덩치 큰 사람들이 나와 많이 먹는 걸 보여주는 방송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꾸준하게 많이 먹어서 살이 점점 찌는 데도 그것을 재미있어하거나 희화화하고 심지어 긍정하는 방송도 제법 되고 말이다.     


덩치들의 먹는 방송

SBS의 <덩치 서바이벌 먹찌빠>는 아예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덩치 열 명이 먹고 게임하는 것이 전부인 프로그램이다. 또 MBC의 <전지적 참견 시점>에는 이영자 씨도 날씬해 보이게 만드는 개그우먼 이국주 씨와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풍자씨가 자주 출연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얼마 전엔 이들 못지않은 덩치를 가진 개그우먼 신기루 씨까지 <구라걸즈>라는 그룹으로 묶어 홍콩 여행도 보내줬다. 이 여행에서 이들이 주로 한 일은 먹는 거(물론 이것이 여행의 목적이었다)였는데, 선상 식당에서의 저녁 식사금액이 60만 원 정도 나왔고, 홍콩에 1박 2일 머무는 동안 식비로만 100만 원을 썼다. 또, 같은 방송국의 <나 혼자 산다>에서는 전현무, 박나래, 이장우 씨가 팜유라는 무리를 결성하여 국내외 유명 관광지에서 줄기차게 먹기만 하는 것을 방송 내내 보여준 적도 있다. 이들은 그런 생활 끝에 살이 쪄가면서도 그것이 자기들 무리의 상징과 조건으로 여겨 격려하기까지 한다.


케이블 채널로 시선을 돌려도 이런 프로그램은 차고 넘친다. 상대적으로 날씬한 멤버들로 교체되기 전까지,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김준현, 김민경, 유민상, 문세윤 같은 큰 덩치의 코미디언들이 출연했으며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인 <토요일은 밥이 좋아>에선 유튜브 먹방 크리에이터로 유명한 히밥과 대식가로 소문난 전직 농구 선수인 현주엽 씨가 출연하여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는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어떤 형태의 외모와 몸이든, 어떤 취향이든 화제가 될 성싶으면 뭐든 콘텐츠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이 업계의 생리라고 치부하고 넘어가야 할까? 아니면 몸과 외모가 어떠하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자기 몸 긍정주의와 자존감 찾기 트렌드가 반영된 결과라고 봐야 할까? 이 현상의 이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기 전에 영화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자.      


내가 달라 보이는 기분 좋은 착각

여기, 누가 봐도 뚱뚱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와 신체로 인해 여러 불이익을 당하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을 들어준다는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며 예뻐지고 싶다는 소원을 빈다. 그 며칠 후, 고정식 자전거로 하는 운동인 스피닝 클래스에서 운동을 하다 안장에서 떨어지게 되고, 그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은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날씬하고 예쁜 사람으로 보인다. 그녀는 소원이 이뤄졌다고 굳게 믿는다.


그 후 그녀는 그렇게 “보이는” 자신을 진짜 자신으로 알고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게 되고 그 덕분에 그녀가 일하던 화장품 회사에서도 승진과 성과를 반복해서 이루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남자 친구도 사귀게 된다. 그러다 얼마 후, 출장지의 호텔 샤워 부스 유리문에 머리를 부딪힌 후 본래의 자신이 보였고, 그녀는 마법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잠시 좌절에 빠졌던 자신이 예뻐졌다고 착각했던 시기와  현재의 자신이 달라진 게 없음을 깨닫고, 삶을 바꾸는 건 외모나 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태도임을 웅변한다.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이 영화는 자기 긍정과 자존감을 만드는 태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물론, 사춘기를 코앞에 둔 딸을 둔 필자의 입장에선 Dove의 Real Beauty 캠페인의 메시지와 유사한, 이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다. 초, 중, 고등학교에서 뚱뚱하고 못 생긴 애를 따돌리고 놀리는 것은 이제 뉴스로 다뤄지기엔 너무 흔한 일이 됐고, 실제로 딸과 딸의 친구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소녀들이 얼마나 일찍 자신의 외모와 몸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하는지도 알게 됐다. 이런 이유로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라는 메시지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메시지에 대한 공감과 동의와 함께 다른 시선도 필요하다고 본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과 건강을 위협할 수도 있는 비만인 신체로 사는 자신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을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건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메시지는 필요하다.

우선 이런 메시지가 비정상적인 “날씬한 몸매”, 즉 모델이나 아이돌 가수의 몸매“만”을 아름다운 몸인 양 이들을 그 중심에 놓은 콘텐츠의 대량 생산으로 아름다운 몸에 대한 기준을 획일화했다는 문제의식에 출발했다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날씬한 몸매가 마치 신체의 정석이고 기준인 것처럼 제시되는 것에 대한 대중문화 현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외모와 신체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과 수용에 대한 고민이 출발했음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이런 몸매에 대한 제시가 성장기 소녀들의 건강한 신체 성장과 형성에 막대한 부작용을 일으켰기에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됐다는 것도 잊지 말자.


다시 말하지만, 딸 가진 아빠 입장에선 여성의 신체와 외모의 획일화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거의 모든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아름답고 날씬하고 무난한 외모의 평범한 몸매를 가진 사람은 여주인공의 친구나 직장상사로 등장한다. 뚱뚱한 사람은 여주인공의 웃긴 친구, 남자 주인공의 여자 후배(남자 주인공의 애인인 여자 주인공에게 무해한 존재)로 나온다. 심지어 바쁜 병원을 다룬 메디컬 드라마에서도 뚱뚱한 젊은 의사는 나오지 않는다. 요즘 아내가 넷플릭스에서 정주행을 하고 있는 <굿닥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원장님과 과장님,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다 날씬하다. 페미니즘 운동에 앞장서오고 비만률이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미국도 이 정도니 한국이 이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돌아보면, 외모와 몸매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극심한 다이어트와 요요 현상의 악순환을 반복해 겪은 뒤 섭식 장애를 겪는 소녀들의 고통은 1980년대, 모델 케이트 모스의 전성기 때부터 있었다.           


괜찮지 않은 괜찮음

객관적 자기 성찰과 무조건적인 자기 긍정은 다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 뒤에 발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난 괜찮아.”라고 스스로에 말하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본인이 봐도 괜찮지 않고 다른 이가 봐도 괜찮지 않다면 괜찮아지도록 뭔가 해야 하지 그 “괜찮지 않은 자신”을 그대로 놔두고, 심지어 “#괜찮다”는 해시태그와 그런 표정을 지은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자기 긍정과 자존감은 절대적으로 위험하다.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 그렇지는 않은, 환각이자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환상과 환각 속에서 얻은 자신감 또한 “환상적” 자신감이다.      


그렇다면 그 환각이 깨어진 뒤에 얻는 “난 이대로도 아름다워.”류의 자기 긍정은 진짜일까? 나와 타자의 시선이 존재하고 나에 객관적 상태가 엄연히 존재하는 그것은 그대로 두고 마음만 바꿔 먹는다고 앞으로 인생이 잘 풀리는 걸까? 건강에도, 사회생활에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오히려, 차라리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처럼 나에 대한 타인의 해석에 오류가 있는 것이 낫다. 최소한 자기 자신은 자신에 대해, 요즘 애들 말을 빌려 표현하면 “멘털을 챙기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전혀 괜찮게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긍정하는 건 일종의 오류다.

     

이런 맥락에서 마냥 뚱뚱한 몸을 긍정하자는 자기 몸 긍정주의나 그런 생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사 - 경향신문의 “크고 아름다운 ‘나’를 좋아하기로 한 여성들” 기사와 같은 - 역시 위험하다. 이 기사에는 “뚱뚱한 여성”과 “덩치 큰 여성”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약간 묘한 어긋남이 느껴진다. 실제로 키가 커서 몸무게도 당연히 많이 나가는 사람과 키는 작은 데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비만인 사람의 신체를 오직 몸무게만으로 “덩치 큰 여자”의 범주로 묶는다는 건 의도적 기만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키가 크면 당연히 뼈도 크고 거기에 붙은 근육도 많다. 이때 많이 나가는 몸무게는 그저 덩치가 큰 것이지 비만은 아니다. 반면, 키의 뒤의 두 자리 숫자보다 몸무게 10 이상 많다면 앞서의 사람보다 그 몸무게가 적다고 하더라도 비만의 위험이 있다.     


물론 개인적으론 이런 사람도 비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운동을 좋아하지만 가족을 제외하곤 건강에 이상 없는 사람에게 운동을 권유한 적도 없다. 겉보기에 뚱뚱하고 홈쇼핑에서 파는 옷 중 가장 큰 사이즈를 사야 하지만 운동을 좋아하지 않고 건강에 이상만 없다면 억지로 운동할 필요도 없고 다이어트도 필요 없다고 본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노출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더 그렇고. 예를 들어 모델, 연예인은 물론이고 직업이나 직무상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이라면 소위 적정 수준 범위 안에서 체형과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그러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업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첫인상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니니 말이다.    


자기 긍정과 자기기만의 경계에서

그러나 백화점에서는 물론이고 홈쇼핑으로도 옷을 살 수 없기에, 결국 큰 옷 전문점이나 보세 옷 가게를 가야 옷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계단을 오르는 것이 산을 오르는 것만큼 힘들다면, 자신의 연애와 사회생활과 더 나아가 인생 전체에 자신의 신체가 마이너스 요소라고 생각된다면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기 인식에도 불구하고 ‘아~ 난 이대로가 좋아.’라고 생각하며 사는 건, 요즘 친구들 말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정신 승리에 가까운 자기기만이다. 마치 몇 년 전 <오 마이 뉴스>에 실렸던 「운동하는 여자」라는 칼럼에서 드러낸 양민영 씨의 기만과, “너 보라고 레깅스 입는 거 아닙니다.”라는 제목을 서슴지 않고 달았던 그 어설픈 페미니스트의 자기 속임과 닮았다는 것이다.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그의 저서 <긍정의 배신>에서 긍정적 사고에 담긴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지금 이대로 아주 좋다는, 긍정적인 생각 그 자체를 뜻”하는데, 이건 일종의 낙천주의로 이런 정신 상태는 “인지 상태이자 의식적인 기대이므로 누구든 수련을 통해 개발할 수 있다.”, 결국 긍정적 사고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과 그 노력 끝에 얻어진 생각으로 나는 물론이고 나를 둘러싼 부정적 물리적 상황이 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생각의 연습”만으로는 단 1그램의 살도 뺄 수 없다. 결국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는 불안이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행동과 실천 없이 변화를 꿈꾸기 위한 이러한 긍정적 사고를 위한 훈련에는 결국 “고의적인 자기기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긍정을 위장한 기만, 기만이 본질인 긍정은 메이드 인 USA다.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머리말에 썼듯이, 그리고 그녀가 신랄하게 꼬집은 사례들 또한 대부분 미국의 사례들이다. 그러나 영화 속 자기기만과 눈속임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그녀의 자기 몸 긍정주의가 우리에게 익숙하게 보이듯, 책에 담긴 사례들 또한 어쩐지 익숙하다. 한국에도 그 물결이 금세 건너왔기 때문이다. 유방암이 걸린 사람을 위해 핑크 리본을 다는 것도, 행운과 부를 끌어당기는 비밀을 알려주는 <시크릿>이라는 책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린 것도, 조엘 오스틴이 <긍정의 힘>으로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혼을 쏙 빼놓았던 것도, 마틴 셀리그먼과 웨인 다이어가 심리학과 뉴에이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한 행복을 설파했던 것도 말이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 출간됐던 건 2004년이었고, 그 3년 전엔 서브 프라임 사태가 있었다. 이 책 <긍정의 배신>이 출간됐던 2008년에는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금융권이 휘청거리던 시기였다. 해고가 일상이고 실업자는 넘쳐났다. 이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수습을 위해 정부가 나서자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에 진절머리가 난 미국인들이 뉴욕에서 시위를 했던 것은 2011년이었다. 그 시위에서 슬라보에 지젝은 “우리는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다만 체제가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지 목도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연설했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우리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이 당신 자신의 신체에게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의 신체를 통해 무엇을 이루기 바라는가? 육체보다 정신이 중요하다고, 외모보단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고, 내 육체적 실존보다 내가 세상에 내놓은 결과물, 즉 일과 학문적 성취와 예술적 작품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일본 속담에 냄새나는 것엔 뚜껑을 덮어 놓으라는 말이 있다. 구린 일은 덮어두라는 말이다. 불편하게 하는 객관적 사실을 모른 척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해결되면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 하다못해 더 나은 신체로 살 수 있게 되는데도 그 문제를 덮어두고 살라는 말이다.


신체는 인생의 캐리어다. 인생과 일상을 담고 가는 그릇이다. 그 그릇이 깨지고 망가지면 그 안에 담긴 인생 또한 온전할 리 없다. 안에 담긴 인생을 위해 그 인생을 담고 있는 그릇인 신체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그 신체에 대한 스스로의 눈높이를 높이는 것이 정상 아닐까?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진정한 도움을 주는 진짜 긍정 아닐까? 여행을 위한 캐리어도 튼튼하고 아름답고 브랜드 있는 걸 찾는다. 신체를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만 운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신체를 바디 프로필 사진 따위로 기록해 두기 위해 단련하라는 말도 아니다. 캐리어는 그 안에 든 짐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목적이 첫째라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의 신체에 대한, 건강한 신체에 대한 관심도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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