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영화나 소설 속 상상과 설정이 현실화되는 경우가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라던가, 오디오 북이라던가, 초고속으로 달리는 기차라던가, 인터넷이나 가상현실 속 연인이나 가족이라던가 하는 것들. 심지어 하늘을 나는 자동차도 그 기술은 존재하니 상용화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물론 이런 초현실적인 상상 중엔 현실이 되지 않길 바라는 것들도 있다.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이퀼리브리엄> 같은 영화에 담긴 세계는 현실이 되길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가끔, 미래를 미리 내다본 예언이 담긴 영화였음을 알게 되는, 조만간 우리가 그런 미래를 겪게 되지 않을까 불안감을 주는 영화들이 있다. 예를 들어 고령화 사회의 극단적인 정부 정책을 다룬 일본 영화 <플랜 75>나 복제인간의 생산과 활용을 다룬 <아일랜드> 같은 작품들이다.
이 영화 <배틀로열>은 당연히 현실이 되길 바라지 않는 영화였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는 영화다. 설정도, 전개도, 결말도 그렇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교실이 붕괴되고 학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일본의 가까운 미래. 정부는 BR 법을 통과시킨다. 이 법으로 인해 중학교 3학년 중 한 반은 무인도로 옮겨져 서바이벌 게임을 치러야 하고 마지막, 최후의 생존자는 승자가 된다.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이 영화의 소개와 영화에 나온 단어들은 그야말로 SF 적이었다. 학급 붕괴, 등교 거부와 같은 단어들 말이다. 이 단어들은 당시 한국의 교육 현실과 동떨어진 무엇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생각해 본 이 영화, 현실이 될 것 같은 불안을 던진다.
숨겨진 메시지
<배틀로열>엔 관객들이 무심히 넘어갈 수 있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이 영화는 법의 공백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공동체나 기관 안에 내재된 법과 규칙이 그 기능을 잃거나 사라져 법과 규칙의 진공 상태가 되면 그곳은 무법의 공간이 되고, 그 무법의 공간에 더 강력한 법이 외부로부터 들어온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 메시지의 원조는 따로 있다. 서부 영화, 그중에서도 외부에서 갑자기 등장한 이방인이 주인공인 영화들이다. 대표적인 작품이자 이런 영화의 전형은 일본 영화 <요짐보>다. <라스트맨 스탠딩>은 이 영화의 할리우드 버전이다. <황야의 7인>도 비슷한 영화인데, 원조는 역시 일본 영화 <7인의 사무라이>와 <13인의 사무라이>다. 이런 영화 문법을 서부영화가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들은 외부에서 등장하는 낯선 사람이 주인공이다. 서부 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셰인>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평원의 무법자>도 같은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
이 영화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의 공통점은 뭘까? 우선 쇠락한 공동체와 마을이 배경이다. 쇠락의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을 다스리는 공동체나 마을의 권력을 폭력과 자본으로 장악한 이들, 법 위와 법 밖에 존재하는 이들, 그들이 만든 악법이 원인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종종 법 없는 곳에 선함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떠나는 제자들을 보며 양 떼를 이리 떼에게 보내는 것 같다고 예수가 걱정했듯, 무력한 양 떼에게 늑대가 오는 것처럼 법이 없는 “무법”의 공간에 “무법자”의 악이 필연적으로 그 이빨을 드러낸다.
<퀵 앤 데드>에 나오는 사악한 보안관, <매그피센트 7>에 등장하는 악의 무리들이 바로 그런 늑대들의 전형이다. 그 “무법자”의 지배에 신음하는 “무법”의 공간과 구성원을 구원하기 위해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외부자를 부를 수밖에 없다. 이런 악법에 신음하는 공동체와 마을을 구원하기 위해선 외부의 힘이,늑대의 이빨을 뽑아내기 위해선 밖의 법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한 명이 됐든 13명이 됐든, 돈 주고 불러오든, 자발적으로 등장하든, 외삽(外揷)되어야만 한다. 결국, 악법이 들어오기 전에, 그 악법을 만든 무법자를 물리치기 위해 외부자를 끌어들이기 전에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건, 아니, 꼭 해야만 하는 건 하나뿐이다. 법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다. 그 법의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법의 귀환
최근 학교와 관련하며 많은 뉴스들이 나온다. 그중 외신 몇 개가 눈길을 끌었다. 먼저, 프랑스 정부와 교육 당국이 3세 이하의 스마트 폰 영상 시청 금지, 13세까지 스마트폰 소지 금지의 법제화를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다. 이미 관련 전문가들의 연구와 보고서는 제출 됐고 이를 바탕으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뉴스는 미국발이다. 5월 1일 자 워싱턴 포스트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미국 전역에 있는 초ㆍ중ㆍ고등학교에 불고 있는 스마트 폰과의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기사는 미국 코네티컷 주의 중학교 교사가 학생들의 스마트 폰 교내 사용을 금지한 사연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통제의 흐름은 코네티컷, 캘리포니아, 인디애나, 펜실베이니아 주 등으로 번지고 있다. 이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어서 스마트 폰 사용 금지를 위해 교내에 머무는 동안 집어넣는 파우치 제작 회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파우치를 구매한 학교는 2천 개 이상이며, 이는 2022년 대비 두 배로 증가한 수치다.
이 기사의 첫 줄은 “It was clear to him that the kids were not all right.”다. 당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는가? “아이들이 전부 괜찮은 것은 아니라는 게 명확했다.”로 번역하는가? 아니면 “아이들이 전부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명확했다.”로 번역하는가? 어떻게 번역하든, 표현의 자유와 인권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미국의 학교에서도 분명하게 알기 시작한 것이다. 규율이 없이는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울 수 없다는 걸,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이 다 옳지 않다는 것을.
이 뉴스들의 배후에 있는 진실은 뭘까? 최근 우연히 아이의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대화를 하며 이 진실의 단서를 포착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학구 위반 이야기가 나왔다. 학구 위반은, 간단히 말하면 사는 동네에 있는 학교가 아닌 다른 지역의 학교를 다니는 행위를 말한다. 이를 위해선 당연하게도 실거주지가 아닌, 다니고자 하는 학교가 있는, 그 학교에 갈 수 있는 통학구역 내로 주소를 옮겨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건 위장전입이다. 장관 후보들 인사청문회 할 때 종종 문제가 되는 그거 말이다. 이 행위는 범죄다. 주민등록법 제10조를 위반한 것인데, 주민등록 2중 신고, 주민등록에 관하여 허위 사실 신고를 한 경우, 같은 법 37조에 의하여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러나 처벌된 사례는 거의 없다. 우선 초등학교 측에선 학생의 위반 사실을 알아도 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강제로 전학시킬 수도 없다. 교육청도 마찬가지다. 학교마다 정보 제공 동의서를 받았기에 가족관계증명서와 학교에 제출한 주소지가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조치는 쉽지 않다. 왜 그럴까? 학생의 인권과 교육권을 앞세운 이들이 항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1년,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구 위반과 관련한 소동이 있었다. 이 학교는 한 학급에 평균 33.1명의 학생이 있는 과밀학급 학교였다. 근처 재개발이 완료되면 40명도 넘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당연히 학교와 교육청 입장에서는 그 원인을 알고 있었고, “과감하게” 학구 위반 실태 조사를 하겠다는 통지문을 가정에 보냈다.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했다. 주소지와 실거주지가 다른 학생에겐 전학을 권고하고 전학을 하지 않을 시 그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됐을까? 학부모들이 학생 망신 주기와 인권 침해라며 항의를 하고 인권위에 진정을 했고, 결국 학교 측이 사과하고 그 방침을 철회하는 걸로 마무리 됐다. 더 황당한 건 그전에, 학교 측이 과밀학급 사태 해결을 위해 모듈러 교실 설치를 추진했을 땐 학부모들이 의견 수렴 절차가 없었다며 반대해서 이 또한 무산시켰다는 것이다.
누가 법을 불렀을까?
불법이 만연하면 상식이 된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첫째를 위장전입 하여 학교를 보냈는데 별 탈이 없으면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한다. 실제로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도 그런 형제, 자매들이 있다. 멀리서 몇십 분씩 자동차로 등교를 하는 선후배 형제, 자매, 남매가 흔하다는 말이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무엇이 살아났고 무엇이 사라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실종된 건 어쩌면 교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라 밖 뉴스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학교에 법이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징조다. 대통령은 지난해 8월 1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학생 인권을 이유로 규칙을 위반한 학생을 방치하는 것은 인권을 이유로 사회 질서를 해치는 범법 행위를 방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 의견에 동의한다.
다시 말하지만, 안의 법이 사라지면 밖의 법이 들어온다.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해 학교전담경찰관을 도입하는 것도, 캠퍼스를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대를 끌어내기 위해 중무장한 경찰이 작전을 수행하는 장면도, 작년 9월 대통령이 교원지위법, 초·중등교육법, 유아교육법, 교육기본법 등 교권 보호를 위한 법률안을 공포한 것도 같은 의미를 던지고 있다. 법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법이 작동해야 할 공간에 법이 기능을 상실하고 무너질 때 외부의 법이 들어오게 된다는, 서부 영화의 메타포가 현실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법은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공백은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고, 무법의 희생자를 양산하고, 그 결과 공동체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서부영화에서 보듯이 보안관은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주민들은 무법의 희생양이 된다. <배틀로열>에서 보듯이 더 강력한 통제의 도구가 목에 조여지고 어길 수 없는 규칙과 어길 경우 생명을 앗아가는, 강력한 처벌이 담긴 악법이 들어온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나왔던 그런 법이. 그 법을 부른 이들은 누구일까? 스스로 이 무너지는 공동체를 복원할 여력이 없어서 외부로부터 더 강력한 법을 초대한 이들은 누구일까? 그 법은 서부 영화의 구원자가 될까? 아니면 <배틀로열>의 BR 법이 될까?
이 글은 <올바름이 의심받을 때>라는 제목 하에 <이코노미톡뉴스>에 송고한 세 개의 칼럼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