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가 냉장고로 말한 것
영화의 위로 무삭제판 - 조커
냉장고 이야기를 하려 한다. 냉장고의 쓸모에 대해서. 그 실제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쓸모에 대해서. 이를 위해 이 영화 <조커>를 먼저, 아니 함께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냉장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줬으니 말이다. 아울러, 이 폭력과 광기 가득한 영화를 생각하면서 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테러는 자살의 다른 형태이며 자살은 자신을 향한 테러일 수도 있다는 그 말을. 또, 삶의 이유와 조건이 소멸되고 인생이 무너진 이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흥행의 이유
<조커>는 프리퀄이다. 프리퀄(Prequel)은 본 작품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아는 속편, 즉 본편에서 못다 한 이야기,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책은 시퀄(Sequel)이다. 프리퀄의 역사에서 <조커>의 위치는 독특하다. 대부분의 프리퀄은 주인공이 주인공이다. 영웅, 경찰, 첩보원 등의 젊은 시절, 앞선 사건, 성장 배경을 다룬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가 대표적이고 007 시리즈 중 다니엘 크레이그 본드 역을 맡은 시리즈들은 엄밀히 말하면 제임스 본드의 젊은 시절, 혈기왕성하던 시기를 담고 있기에 이 또한 프리퀄이라면 프리퀄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이 아니거나 공동 주인공들 중에서 특정인을 중심으로 다른 이야기를 파생시키는 건 스핀오프다.
반면 이 영화 <조커>는 악당의 프리퀄이다. 스핀오프의 경우에도 <조커> 같은 사례는 찾기 힘들다. 심지어 이 사람이 어떻게 악당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항변하고 있는 듯 한 내용이다. 이 악당의 항변, 항변이 담긴 영화를 한국에서만 520만 명이 봤다. 심지어 미국에서 R 등급을 받은 영화 중 전 세계 흥행 수익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린 최초의 영화가 됐다. 폭력성과 우울함, 악당의 내면과 광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 영화가 사람을 불러 모은 힘은 뭘까? 영화가 끝난 뒤에도 조커가 광기에 휩싸인 채 내려온 계단은 관광지가 됐고 한국의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의 변장까지 하게 한, 그의 흉내를 잘 내는 것이 일종의 개인기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평범한 관객에게 악당이 이렇게까지 수용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 이 영화의 어떤 부분에 관객들은 공감한 것일까? 그야말로 최악의 악이 나오는 폭력 가득한 이 영화에.
채워져야 할 곳
살기 위한 조건들이 있다. 생존의 조건을 넘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건, 그 의미를 좀 도약시켜 말하자면 행복의 조건으로, 안온한 일상의 조건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조건을 먼저 말해보자. 당연히 의식주다. 옷과 끼니와 편이 누울 수 있는 곳. 그것이 물리적인 기본 조건이다. 대체로 혼자 살면 주거 공간 또한 작다. 공간이 작고 먹는 입이 하나밖에 없으면 당연히 냉장고 또한 작다. 1인분의 냉장고, 1분의 공간이다. 식구가 늘면 공간이 늘고 많아진 먹을 입도 많아지기에 당연히 냉장고 또한 커진다.
결국 냉장고는 절묘하게도 식과 주, 끼니와 공간에 의해 선택되고 배치된다. 더 나아가 냉장고 주인의 경제력과 그 공간을 메우는 구성원의 숫자에 따라 그 크기와 그 내부의 채움이 결정된다. 냉장고는 TV와 달라서 사람의 숫자와 공간의 크기에 따라 변한다. 기능은 부차적이다. 작년에 냉장고를 바꾸면서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냉장고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아내의 뒤에 서서 적당히 아내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수기가 달린 냉장고도 있고 물만 넣어주면 자동으로 각얼음을 얼려서 얼음통으로 뱉어주는 냉장고도 있었다. 다른 가전제품은 혼자 고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냉장고는 다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온 가족이 출동하여 심사숙고하여 고르는, 그래야만 하는 단 하나의 가전제품을 고르라면 그건 냉장고이지 않을까?
집은 사람과 사랑으로 채워지고 냉장고는 생존의 조건으로 가득해야 한다. 조커의 집엔 사람도, 사랑도 없었고 냉장고도 비어 있었다. 냉장고가 냉기로 가득한 건 역설적이게도 따뜻한 사랑으로 집을 가득 메운 가족의 건강한 한 끼를 위해서고 그 공간과 냉장고의 유지를 위해 우리 모두는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다. 그 공간과 냉장고의 가득 채움과 가득 채울 냉장고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신성함은 그렇게 찾아진다.
사랑으로 채워진 집처럼, 음식물로 그득한 냉장고는 미래를 기약한다. 며칠의 먹을거리가 있다. 가족과 가정이 있다는 건, 사랑이 가득한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건 두려움 없이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의지할 곳이 있고 실패해도 격려해 줄 사람이 있으며 멀리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역설적이게도 여행의 의미는 집이 있는 사람만이 만끽할 수 있다. 집이 없는 사람의 떠남은 여행이 아니라 방랑에 불과하다.
결국 이 영화에서도, 그리고 실제 삶에서도 냉장고는 미래가 있는 삶, 예측 가능한 삶, 더 나아가 보호받는 삶, 궁극적으로 사람다운 삶을 의미한다. 집이 있으나 가족이 없고 가족이 있으나 사랑받지 못한 존재에게 집은 가정이 될 수 없고 가족은 혈연관계,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또 설령 가족이 있고 공간이 있어도 냉장고를 채울 수 있는 여력이 없다면 그 가족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삶의 무너짐, 그 연쇄는 냉장고에서부터 시작하여 주거로, 일상으로 서서히 번져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커가 빈 냉장고로 들어가는, 한밤중에도 문을 열면 불이 켜지는 냉장고의 안을 비어내고 그곳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장면은 폐허가 된 삶에서 마지막 안식을 찾기 위해 은둔과 칩거, 이를 통해 자발적 소외와 세상과의 절연과 결별을 호소하는 선언적 장면인지 모른다.
닿지 못했던 마지막 호소
이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뒤 칼럼을 쓰기 위해 메모를 했다. 다시 그 메모를 보니 그 끝에 기사 하나의 링크가 붙어 있다. 기사의 날짜는 2022년 4월 22일, 헤드라인은 <수도료 90만 원 나와 가봤더니…" 노모·아들, 숨진 지 한 달 만에 발견>이다. 기사 내용은 이렇다. 1월 2월, 수도요금이 90만 원이나 나온 것을 이상하게 여긴 수도사업소 직원이 그 가정을 방문했다. 문은 열려 있고 물소리가 들렸다. 집안엔 중년의 남자와 노모가 죽어 있었다. 경찰은 두 사람 다 지병으로 죽었고 한 달 정도 지나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아들은 하반신을 아예 못 쓰는 노모를 십 년 넘게 돌봤다는 주민의 인터뷰가 각주처럼 달려 있다. 그들의 가난과 고통은 담을 넘지 못했다. 담을 넘어 이웃에 닿지 못했고 도와줄 수 있는 지역의 기관과 단체와 지자체 공무원에 닿지 못했다. 그들은 호소하지 않았던 걸까?
호소(呼訴)는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내 억울한 상황을 물리쳐 달라고 크게 외치는 것이다. 앞의 호자에 크게 외친다, 부른다는 뜻이 담겨 있고, 뒤의 소에는 억울함을 토로한다는 뜻과 시비를 가려달라는 외침, 더 나아가 남을 헐뜯는다는 뜻도 담겨 있다. 결국 호소엔 공적인 권력에 자신의 억울함을 알린다는 의미와 마음에 가 닿기 위해 애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총선이 끝났다. 여당에선 범죄자를 심판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쳤고, 야당에선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구호를 외쳤다. 총선 기간 내내 이런 구호를 앞세워 정치인들이 한 표를 호소할 때, 그 호소를 듣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살림살이 좀 낫게 해달라고 역으로 호소했다. 그렇게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서로의 호소는 교차 사격처럼 서로를 향했다. 더 호소력이 있었던 사람이 당선됐을까? 유권자의 호소에 귀 기울인 사람이 당선이 됐을까?
앞서 쓴 칼럼에 나온 일본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들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할 때, 그 삶을 감당하지 못할 때 자신의 삶을 어떤 형태로 정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이 나라의 국민들은 어떻게 하든 그 삶을 버텨낸다. 버티다, 버티다 외로운 죽음으로 끝난 삶은 이렇게 뒤늦게 알려진다. 생전엔 담을 넘지 못했던 호소는 쓸쓸한 기사를 통해 온 국민에게 닿는다. 우린 이런 뒤늦은 호소들을 매년 접하고 있다.
별 거 없지 않나? 사람 사는 거 말이다. 가족들 먹인 음식이 냉장고 가득하면 된다. 오늘 먹고도 남아서 내일도, 그다음 날도 먹일 만큼 음식이 가득하면 된다. 기름 값 걱정 없이 기름 탱크에 가득 채우면 되고 회사 망할 걱정 안 하고 회사를 다닐 수 있으면 된다. 그런 회사를 다니면서 그렇게 집이라는 공간을 갖고 냉장고를 채우고 저녁을 먹고 편히 잠든 뒤 아침 일찍 일어나 안전하게 출근하면 된다. 그거면 된다.
그게 안 될 때, 그중 어느 하나라도 무너질 때, 그 무너진 삶이 도처에 있을 때, 만연할 때, 그때 우린 민생이 무너졌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총선이 끝난 후, 뉴스의 화두는 특검이 차지했다. 특검이 그렇게 중요한가? 은퇴한 정치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물어야 되는 순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