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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an 16. 2024

맥주, 섹스, 수영, 그리고 마지막 불꽃과 랩(Lap)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47

등록했는데 왜 안 나와?

1월, 새해, 당연히 새 멤버들이 들어왔다. 절대적이면서 나보다 상대적으로는 훨씬 더 젊은 여성 두 분, 방학 때만 수영을 배우는, 그래서 낯이 익은 중학생 소년 세 명, 그리고 수영하는 걸 봐서는 반을 잘 못 찾아온 것 같은 총각 한 명.


이 중 젊은 여성 한 명은 선수 출신이라고 하는데 몇 살까지 선수를 했는지 모르지만 선수 출신 같은 아우라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 물론 1번 없을 때 1번을 시켜도 될 정도로 수영을 잘하긴 하더라. 그러나, 뭐랄까... “와, 역시.” 같은 느낌은 안 준달까?     


이렇게 사람이 늘었지만 꾸역꾸역 내 자리는 지키고 있다. 아니 오히려 좀 앞으로 당겨졌다고 해야 하나? 지난달에 내 앞을 지켜줬던 두 명의 젊은 남성 회원이 안 나오고 있다. 강사 말로는, 언제나 그렇듯 다들 등록은 했다고 하는데 얼굴 보기가 힘들다. 1월도 중순인데, 도대체 언제 큰 마음을 먹을 거냐? 설 지나고 나올 거야?  


그 나이로 어디 명함을 내밀어

해가 바뀌어서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 잠시 심난했으나 연말과 연시, 두 개의 공연을 보고 마음을 다 잡았다. 연말에는 다른 글에 썼다시피 윤복희 선생님과 이정식 연주자의 공연을 보면서 ‘야,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건지도 모르겠다.’하는 생각을 했고, 1월 둘째 주 토요일엔 신년 살풀이 - 실제로 국립부산국악원에서 그런 의미로 공연을 기획했다. 첫 주 토요일엔 제주 큰 굿, 둘째 주엔 <발탈>과 <줄타기>, 셋째 주엔 일본 오사카 한인민족학교인 건국학교 예술단의 무대, 넷째 주엔 그야말로 살풀이의 대미이자 백미라 할 수 있는 국립남도국악원의 씻김굿이 이어진다. -를 겸하여 <발탈>과 <줄타기> 공연을 봤다.

발탈은 그야말로 발에 탈을 끼워하는 공연으로 국가무형문화재 79호다. 이 날 공연이 정말 뜻깊었던 것은 이 소중한 공연이 부산에서 처음 열렸다는 것이고, 그 첫 공연을 예능보유자이신 박정임 선생님이 전수자와 함께 직접 하셨다는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어르신이 커다란 TV만 한 검은 막 뒤에서 나오셔서 인사를 하시는데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중간 중간 하시는 소리로는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실물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나 싶었는데, 웬걸 더 미궁에 빠져버렸다.


제자와 선생님이 발탈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선생님이 이 발탈을 70년을 하셨다는 말을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인사가 마무리될 즈음, 제자가 관객에게만 말하는 투로 “선생님이 어디 가서 나이를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제가 직접적으로 나이는 말씀 못 드리고... 그냥 조금 있으면 9학년이 된다는 것만 알고 계셔요.”하고 말을 했다. 객석이 술렁거렸다. 내 옆에 있던 아내 또한 감탄을 했고...  

   

검색해 보니 1939년생이시다. 연말에 뵌 윤복희 선생님이 46년생. 보름 사이에 팔순을 바라보는 엔터테이너와 구순을 바라보는 예인의 무대를 접한 것이다. 그러니 나이를 먹는다고 옅은 우울감에 젖어 연말에 술이나 작살냈던 오십 대의 관객은 부끄러울 수밖에.


그야말로 현역으로 살면 죽을 때까지 팔팔한 건지, 죽을 때까지 팔팔해야 평생 현역으로 사는 건지, 아니면 좋아하는 일에 인생을 바치면 그 일이 주는 신명과 에너지 덕분에 나이를 먹는 것도 모르는 건지, 그 인과관계의 앞뒤는 내 정확히 알 수는 없다만, 여하간 두 어른의 무대는 내게 조용한 꾸짖음으로 다가왔다. “야, 어디 가서 나이 먹었다고, 어른 입네 하고 뒷방 늙은이처럼 무게 잡지 말고 현역으로 팔팔하게 젊게 살아.”


이 따위 글을 쓴 나를 욕하며 맥주를 마신다.

칼럼의 마감을 앞두고 글을 정리하다 보면 술이 땅긴다. 이게 참 안 좋은 버릇인데 그렇게 됐다. 결국 낮에 글을 고치면서 - 고치고 버릴 거 알면서 늘 분량 이상으로 글을 쓴다. 쓰면서도 ‘야, 이건 사족인데.’하면서 쓰는데, 존 맥피의 책을 읽은 후, 일단 생각난 건 써 놓자는 주의를 지키고 있는 터라, 일단 쓴다. 자르고 지우고 버리는 건 내일의 나에게 떠넘기고 - 맥주를 마신다.


맥주를 마시면서 문장을 고치고 문단을 통째로 긁어 ‘삭제분’이라는 파일로 넘긴다. ‘아니 그렇게 지울 거면 안 써도 되잖아.’하고 스스로에게 욕을 하면서 그 화를 맥주로 삭인다. 지난주엔 주말과 마무리하는 일정이 겹쳐 술을 더 마셨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아내가 예뻐 보였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이게 왜 문제냐면...     


난 애초에 술을 마시고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가 나오는 술집이나 유흥업소, 나이트클럽에도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음주가무와 그 이후 이어지는 그렇고 그런 코스- 부킹, 2차, 3차 등등 -를 경험해 본 적도 없다. 놀랍게도-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하면 대부분 놀란다. 특히 남자들은 -내 인생의 섹스의 99퍼센트는 맨 정신으로 했다. 하는 도중, 잠시 맥주를 마시고 살짝 취해서 한 적은 있으나 만취가 되어서 이 여자가 누군지도 모른 상태에서 허우적댄 적은 없다. 그건 나에게나 그 사람에게나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게다가 술을 마시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하거 아니겠나? 그게 다 뇌와 혈액과 혈관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더 꺼려했다. 그런데 이게 나이를 먹으니 더 그렇다. 그래서 늘 아내에게 그런다. 우리도 이제 날 잡고 컨디션 조절하고 해야 한다고. 물론 아내는 그런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지만...


연하의 하한선

주말 저녁,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또" 맥주를 마시다가, 열몇 살 차이 나는 여자와 결혼한 남자 지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아내 주변에 아내가 이혼하기만을 기다리는, 만약 그렇게 되면 너 나랑 살자고 말하는 남자가 있다는 말을 농담처럼- 실제로 그런 남자가 있다. -한 뒤에 나온 이야기다.


내가 그랬다. “어, 그거 괜찮네. 난 솔직히 그럴 수 있다고 봐. 그런데, 열몇 살 차이 나는 여자랑은 결혼 안 할 것 같아.”, “왜?”, “여보 봐바. 내 나이 또래에 나 같은 몸매도, 나처럼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도 흔치 않지?”, “그렇지.”, “이런 나도 오십 넘어가니까 술 마시고 하면 종종 안 될 때 있지?”, “그렇지.”, 아내는 놀리듯이 날 보며 대답을 했다.      


“우리야 뭐 벌써 몸을 섞은 지 이십몇 년이 됐으니... 잘 안되면, 저 인간 술 좀 작작 처마시라니까. 이렇게 잔소리하고 넘어가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지만, 삼십 대 중반, 그것도 만약 초혼인 여자라면 이게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지 않나 싶어서.”, “그런가?”, “그렇지. 아니, 까놓고 얘기해서 진짜 남자 경험이 전혀 없어. 그러다 나 같은 중늙은이한테 홀딱 빠져서 결혼했어. 그럼 뭐 넘어갈 수도 있지. 뭐, 이게 다 그런가 보다 하고 말이야. 그런데 남자 경험이 있는 젊은 여자한테 성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중고를 떠넘기는 건... 좀 그렇다고 봐.”     


“난 그래서, 그 남자, 그러니까 당신 신입 사원 때부터 알고 지낸 그 남자처럼, 뭐 둘 다 나이 들어 이혼했는데, 아직도 당신에게 좋은 감정이 남아 있어서, 내 죽기 전에 저 여자 한 번 품어보자. 뭐 그런 마인드로 결혼하는 건 괜찮다고 봐. 물론 기왕이면 그나마 좀 사지육신 멀쩡할 때, 그러니까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 되기 전에 만나는 게 좋겠지만... 팀 버튼하고 모니카 벨루치처럼 말이야. 근데 팀 버튼은 이제 좀 늙었더라.”


소중한 맥주 두 캔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저녁, 냉장고에 있던 캔 맥주 두 캔을 "또" 마시며 말했다. “아, 이제 정말 맥주를 줄여야 할 듯... 수영도 그렇고 섹스도 그렇고.”, “뭐,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마시면 되지 않나?”, “그렇지. 자제해야지. 술을 좀 줄일 테니. 뭐, 많이 사랑합시다.”, 아내는 내 말을 듣고 “밝히긴...”하면서 웃었다.     


월요일, 수영장. 가기 싫은 몸을 떠 밀어 겨우 도착했다. 루틴인 체조를 구석에서 하고 수영을 시작했다. 마지막 세트는 자유형 75/평영 25, 여섯 개. 1번엔 선출 아가씨, 2번엔 고유 1번, 3번엔 2번 아저씨, 4번엔 예전에 아빠랑 나오다 요즘엔 혼자 나오는, 수영을 초등학교 때부터 해서 사실 진짜 선출 같은 아가씨, 5번엔 날렵한 아줌마, 6번엔 나였다. 그 뒤로 아줌마 두 명, 중학생 세 명, 아줌마 한 명, 그리고 반을 잘 못 온 것 같은 총각이 붙었다.      


시작하니 속도가 장난 아니었다. 첫 번째에서 세 번째 랩까지는 속도를 견딜 만했다. 네 번째 넘어가면서 팔이 무거워졌다. 젠장. '다음 랩은 쉬어야지.' 생각하고 네 번째 랩을 끝냈는데, 내 뒤의 몇 사람이 도착하기 전 1번이 출발했다. 그렇게 줄줄이 출발하다 보니 얼떨결에 나도 합류했다. 결국 여섯 개의 랩을 다 돌았다. 진짜 술 좀 줄여야지. 뜨거운 사랑을 위해, 그 마지막 불꽃을 위해, 그리고 수영의 마지막 랩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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