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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01. 2024

아직 절반의 기회가 있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12

여전히 일번만을 생각하며- 레이먼드 카버

  

이제 당신이 닷새 동안 집을 비우게 됐으니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만큼, 피우고 싶은 데서

피울 거야. 비스킷을 만들어서 잼과 기름진 베이컨과

함께 먹을 거야. 게으르게 뒹굴어야지.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거야. 그러고 싶어지면 바닷가를

걸어야지. 그리고 지금은 혼자서,

어린 시절의 일들을 생각하고 싶어졌어. 그때

아무 이유 없이 날 사랑하던 사람들.

나 역시 다른 모든 이들보다 그들을 더 사랑했지.

한 사람만 빼고. 내 말은, 당신이 없는 동안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다는 거야!

한 가지만 빼고.

난 당신 없이는 우리 침대에서 자지 않을 거야.

싫어. 그건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 아니야.

나는 마음 내키는 아무 데서나 잘 거야-

당신이 없을 때 제일 달게 잘 수 있는 곳

내가 늘 하던 식으로 당신을 안을 수 없는 곳.

내 서재의 부서진 소파에서.


수영 강사는 물을 “잡는다.”는 표현을 쓴다. 물을 잡는다는 표현은 물을 머금고 있다는 표현만큼 추상적이다. 물은 뱉거나 마시거나 둘 중 하나다. 일단 입에 머금은 물은 언젠가 이 둘 중 하나를 해야만 한다. 수영을 할 때 물을 잡는다는 건 이보다 더 일시적이다. 손을 물에 넣고 최대한 하박을 물과 수직으로 놓은 후 그 물을 몸 쪽으로 끌어당길 때, 그때, 잡힌 물은 없다. 그저 앞에 있는 물을 뒤로 보낼 뿐이다. 물을 가를 뿐이다.  

    

일상을 포착한다는 말은 물을 잡는다는 표현만큼 추상적이다. 일상은 순간의 누적이자 겹침이다. 해변의 파도와 같다. 북동풍이 불던 날, 정자항에서 파도를 한참 본 적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파도가 몇 개인지 세보라고 했다면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이 파도와 저 파도를, 오는 파도와 물러가는 파도를 구분해 내는 것이 불가능하듯 일상 또한 그러하다. 파도가 부서져 흩어지듯, 하나의 일상 또한 금방 과거가 된다.      


게다가, 파도와 같이, 나와 타인의 일상은 한 겨울의 지하철 좌석에 두꺼운 다운 점퍼를 입은 두 사람이 붙어 앉은 것처럼 겹쳐져 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일상에 배경이거나 조연이며, 타자 또한 그러하다. 결국 서로의 일상은 타인의 일상과 섞여 분리해 내는 것이 어렵다.      


<대성당>엔 「기차」라는 단편이 있다. 이 단편, 특이하다. 물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이 다 특이하다만. 세 명이 나오는데 독자가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미스 덴트뿐이다. 그녀는 방금 어떤 남자의 뒤통수에 리볼버의 총구를 들이대며 시원하게 복수의 일갈을 하고 왔다. 그 후 열차 운행 시간표도 없는 기차역에서 언젠간 오리라 기대하며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들어온다. 한 사람은 노인, 한 사람은 화려한 차림의 중년의 이탈리아 여자. 이탈리아 말을 써서 그런가 보다 한다.      


노인의 옷차림은 그럴싸한데 신발을 안 신었다. 이탈리아 여자는 계속 이런저런 이유로 노인을 타박하는데 둘의 관계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이 여자는 미스 덴트의 성질을 은근히 긁는다. 미스 덴트의 작은 백 안에 그 작은 리볼버가 아직 들어 있고, 기차역엔 아무도 없고, 기차는 언제 올지 모르는 한밤중인데... 심지어 노인은 담배에 불을 댕길 성냥을 찾으러 잠시 기차역 밖으로 나가기까지 한다. 아니 무슨 <헤이트풀 8>도 아니고...     


소설 내내, 세 사람의 대치는 마치 <Once Upon a Time in the West>에서 악당 세 명과 찰슨 브론슨이 철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신경전을 하는 시퀀스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니, 총을 꺼내서 방아쇠를 당기려면 시원하게 보자마자 당기던가. 그러나 세 사람은 그 늦은 밤에 도착한 열차에 아무 사고 없이 올라탄다. 기차에 이미 타 있던 승객은 여섯 명, 그들은 이 늦은 밤에 올라탄 세 명을 궁금해 하지만, 알 수 없다. 세 명은 자리를 찾아 안고, 승객들은 상념으로 돌아간다.      


내가 보는 타자의 일상, 타자가 보는 나에 일상 또한 이렇게 파편적이다. 토막 난 순간이다. 파편과 토막엔 앞뒤가 없다. 전체가 없다. 그러나 그 토막, 그 파편의 앞뒤로 긴 이야기들이 있었고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고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기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일상과 인생은 물론이고 타자의 일상과 인생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서로의 역사적 순간의 목격자일지 모른다. 다만 그 순간의 가치와 무게를 그 순간에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행복-레이먼드 카버


너무 이른 시간이라 밖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커피를 든 채 창가에 서 있고,

이른 아침에 늘 있는 일들이

생각을 일으키며 지나간다.

사내아이가 신문을 배달하러

친구와 함께 길을 걷는 걸

보고 있는 동안.

.......

아직 달이 물 위에 창백하게 걸려 있지만,

하늘에 서서히 빛이 들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죽음과 야망, 심지어 사랑조차

잠시 진입을 멈춘다.

행복, 그것은 예기치 않게

온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름 아침의 대화

너머로까지 이어진다. 정말로 그렇다.


결국, 나와 타자의 행복과 불행은 지금 판단할 수도,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게다가 사랑이 그러하듯 행복도 불행도 온전히 나에게만 달려 있지 않다. 노력한다고 누구나 다 잘 되면 그게 어디 인생이겠나? 할 만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인생 아닐까?     


어쩌면 행복은 포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간, 알아채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에서 희미하게 락스 냄새가 난다. 스위머(Swimmer)의 손에서 나는 냄새다. 최근 체력이 올랐다. 저번 달과 이번 달이 다르다. 함께 수영하는 젊은 아줌마가 내게 말했다. “아, 오늘 컨디션 좋으신가 보네. 쉬지도 않고.”, 나에 달라짐을 누군가 포착했다. 알아주니 고맙다. 그러나 다름,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니다. 이 시집에 전반에 등장하는 자연, 낚시, 일상, 담배, 풍경... 이런 것들 속에 행복이 있다. 그 행복은 일종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도래할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서도.


비-레이먼드 카버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오늘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읽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잠시 그 욕망에 맞서서 싸웠다.

.....

나는 내 삶을 다시 한번 살고 싶은가?

용서하기 어려운 똑같은 실수들을 또다시 저지르면서?

그렇다. 절반의 기회가 있으니까. 그렇다.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지 모른다. 그 확률은 반반이다. 살아온 세월 동안은 그랬지만 남은 세월은 안 그럴 수 있다. 도박이다. 어찌 보면 가장 큰 도박이다. <대성당>에 실린 <굴레>에 등장한 남자는 자기 말에 돈을 거는 걸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말의 연이은 패배와 함께 망했다. 남은 생은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남자는 같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로 인해 입은 피해는 회복한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전혀? 정말?     


다들 학창 시절 배웠던 영어 단어 중 유독 강렬하게 기억되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난 Nevertheless였다. 뭐랄까, 무지 고급스러운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자체를 중학생이 쓸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런데 하물며 영어로는 더욱더.


저 단어를 그저 단순히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해석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 찾아보니 “그 어떤 작은 것이라도 결코 그런 적이 없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 어떤 큰일이 있어도 결코 그러해야 될 일은 그러해야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봐도 된다. 그래서 우리말이든, 영어로든, 다른 어떤 말로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쓴다면 그 앞의 모든 사건의 심각성과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무엇”은 백 퍼센트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우린 앞으로 이 단어를 희망에 베팅하는 데 쓰도록 하자.


2020년에- 레이먼드 카버


우리 중 누가 그때까지 살아남아-

늙고, 멍하고, 정신이 맑지 못한 채로-

그러나 기꺼이 우리의 죽은 친구들에 대해 말할 것인가?

물이 새는 수도꼭지처럼, 말하고 또 말할 것인가.

.....

친구들이여, 그대들을 사랑한다. 진심이야.

그리고 내가 운이 정말 좋아서, 특별한 혜택을 받아서,

오래 살아남아 증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믿어줘, 나는 그대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함께 지냈던 시절의

가장 빛나던 순간들에 대해서만 말할 거야!

살아남은 자가 기대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지. 늙어가고 있고,

모든 것들을 모든 이들을 잃고 있는데.     


섬세한 여자 - 레이먼드 카버

....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그 중심은 버티지 못했다.

무너졌다. 거기선 더 이상 불이

켜지지 않는다. 그 주변의 궤도는

피로의 궤도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을 걱정하고,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가난과 수치가 문을 밀고 들어오던 시절,

그 뒤로 경찰이 끔찍한 권위를 가지고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따라오던 시절을

어느 누가 기억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걸로는 어느 누구도 막아낼 수 없었다.

아는가, 그 시절에는 어느 누구도 숨을 쉬지 않았다.

날 못 믿겠거든, 그녀에게 물어보라!

그녀를 찾아내고 입을 열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꿈을 꾸고 노래를 부르던 여자. 섬세한 여자.

부서져버린 여자.     


키아누 리브스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행복으로 가득한 완벽한 하루는 단순하다. 하루 종일 마시고 즐기고 할 수 있는 만큼, 틈나는 대로 섹스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하루다. 물론 난 이제는 하루 종일 마실 수만 있을 뿐, 마심과 동시에 섹스까지는 할 수 없다. 섹스를 하루 종일 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

https://www.youtube.com/watch?v=pp3ITxKAF-w     


인생은, 행복은, 그렇게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하루, 그 일상이 집요하게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것들이 쌓여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것이고. 결국 행복도, 인생도 어느 날 일어나는 해프닝을 위한 명사가 아니라 그 집요하게 쌓이는, 크로와상의 한 겹과 같은 일상에 달라붙는 호칭이다. 불행 또한 마찬가지다. 레이먼드 카버는 그걸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한 겹의 일상을 무심히 지나친다. 마치 크로와상을 한입 깨무는 것처럼 말이다. 라면 면발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은 채 후루룩 들이마시듯 먹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갈 뿐, 일상을 들여다보지도, 그렇기에 당연히 반성하지도 않는다. 또, 같은 이유로 그 일상에 대한 감사도, 애정도 갖기 쉽지 않다. 우리가 누리는 것보다 행복을 적게 느끼는 것도,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도 어쩌면 이 때문 인지도 모른다.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작가가 그 일상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일 때, 우린 그 한 겹, 한 줄, 한 장면의 일상을 비로소 생경하게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소설이 가진 힘이라면 힘인지도. 우리가 이런 소설만이 갖고 있는 힘을 문득 가지게 될 때는,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그런 일상을 누리지 못할 때다.


입시를 위해 모든 즐거움을 서랍 속에 넣은 뒤 공부에 전념할 때, 취업을 위해 또다시 그렇게 할 때, 아이를 키우며 그전에 누렸던 사소한 일상을 포기할 때, 병에 걸려 누워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내가 그들을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을 때.


이 시집은 집이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바람에 잠시 광안리의 처남 집에 살 때 샀다. 다른 남자는 몰라도 난 인테리어에 관심 없다. 지금도 그렇다. 여자와 사는 집의 최고의 인테리어는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지나가는 그녀라고 생각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웃음소리가 집의 가장 좋은 인테리어라고 믿기 때문이다.      


새 집을 산 후 일상이 무너지면 그 집은 남의 집이 된다. 새로 인테리어를 한 후 내가 죽으면 그 인테리어는 다른 이가 누린다. 일상 안에 의미가 있고, 의미부여 속에 일상이 살아 내게 온다. 그 살아서 전해오는 일상의 한 겹이, 우리 인생의 행복의 부피를 만든다. 행복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겹겹이 쌓인 무엇이다. 그의 시와 소설이 내게 전한 삶의 비밀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시와 소설은 앞도, 뒤도 말하지 않는다. 인생의 지금 이 순간만을 말한다. 그러나 그 앞은 용서하고 뒤는 기대한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나가겠는가? 쉰이 넘어 그의 소설을 다시 읽고 시를 읽었을 때 내가 또, 느낀 건 바로 그것이었다.


끝에 실린 인터뷰까지 포함하면 6백38페이지나 되는 시집이다. 시인의 시집 네 권과 미발표 시를 <우리 모두>라는 시집 하나에 묶었다. 네 권의 시집은 각각 1983년(불), 85년(물이 다른 물과 합쳐지는 곳), 86년(울트라마린), 89년(폭포로 가는 새로운 길)에 나왔다. 이런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도 빠짐없이 읽었을 리가 없지만, 어쩐지 난 1985년에 나온 <물이 다른 물과 합쳐지는 곳>이 좋다. 읽을 때마다 삶의 막장을 목격하지만 그 막장 뒤에 이어지는 내일의 희미한 가능성이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우린 모두, 그 희미한 빛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랑하는 이의 윤곽에 의지해 살아가는지도.     


<대성당>의 <보존>을 읽을 때, 키스 자렛의 음악이 함께했다. 그 음악엔 키스 자렛의 흥얼거림이 없었다. 내가 산 앨범, 그러니까 대학 때 산 앨범인 쾰른 콘서트 앨범엔 키스 자렛의 스캣과 흥얼거림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입에서 나온 멜로디가 먼저인지, 피아노의 질주가 먼저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살아나가는 것이 먼저인지, 행복해서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인지, 살아나가다 보면 행복은 찾아오고 발견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처음 실은 <여전히 일번만을 생각하며>를 제외하고는 다 부분만 실었다. <여전히 일번만을 생각하며>를 읽을 때마다 씩 웃는다. 아내가 닷새 동안 출장을 간다면 신나는 척을 하겠지. 매일 맥주를 퍼마실 것이라고 협박도 하고. 물론 이젠 엄마만큼 잔소리를 해대는 딸의 눈치를 봐야 하겠지만. 어찌 됐든, 그래도 아내가 없는 침실에서 자는 건 힘들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존재와 부피만으로도 삶을 완성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의 소중함을 우린 너무 늦게 안다.

이전 11화 내 손을 놓지 않았던 연인과 이 노래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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