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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08. 2024

마젤란은 아직 살고 있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13

마젤란 - 메리 올리버     


마젤란처럼,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우리의 섬을

발견하자. 우리 안락 속에서 절망하며 스러지지 않도록

가장 거친 야생의 땅에 도전하자.     


오랜 세월, 우리, 사람들 많이 다니는 길에서 아등바등 살며,

밤으로 가는 배들의 꿈을 꾸었지.

영웅이 되자, 그럴 재목이 못 된다면,

기필코, 추종할 만한 사람을 찾아내자.   

  

답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니까.

성장을 거부하는 건 죽음이니까.

마젤란에겐 추구할 꿈이 있었지.

바다는 크고, 그의 배들은 서툴고, 느렸지.     


열병이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선원들에게 그는 외쳤지, “전진, 계속 전진!”

그들은 부서지기 쉬운 꿈 안고 고향을 향해 나아갔지.

그래서 마젤란은 아직 살고 있어, 그때 죽었지만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삶의 베테랑이 되는 건 아니다. 오늘, 수영장에서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내와 여자의 다툼이었다. 심지어 사내의 딸도 같은 시간에 수영을 하고 있었다. 딸은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다툼은 열 시 반의 끝과 열한 시 반의 시작이 맞물리는 시간, 열 시 오십 분에서 열한 시 사이에 일어났다. 그들의 다툼이 스타팅 블록이 아닌 엔드라인 쪽에서 일어났기에 그 근처 연습용 풀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내게까지 그 전모가 생생하게 전달 됐다.     


이유가 뭘까? 주책맞게도 할아버지라고 불릴 법한 나이 든 남자가 할머니라고 불리어도 무리 없는 여자의 엉덩이라도 건드렸던 걸까? 아니면 서로의 수영을 방해라도 한 걸까? 별 거 없다. 열 시 반의 강습이 끝난 남자는 다음 강습이 시작될 때까지 오리발을 끼고 몇 바퀴 더 돌고 있었고 열한 시 반인 여자는 그 반의 여자들과 함께 레인 한가운데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다 남자의 오리발이 일으킨 물보라가 얼굴에 튀었고 여자는 발끈해서 남자에게 손을 휘두르며 뭐라고 한 것이다.      


둘 다 수영장의 매너를 지키지 못한 건 분명하다. 강습이 끝난 후에는 대체로 오리발을 벗고 수영하는 것이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좋다. 강습을 기다리면서 수다를 떨고 싶은 사람은 레인의 가장자리 나 구석에 서서 수다를 떨어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다 어른이 되고, 그래서 어디 가도 어른 대접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기본과 정석, 예의를 망각하여 작은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제를 잘 살아냈다고 오늘을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쉰 살까지 멀쩡하게 살았다고 해서 환갑까지 그렇게 살라는 보장도 없다. 누군가 말했듯이 이 나이는 항상 처음이고, 새해는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이기에 우린 평생 다가오는 시간을 수업을 하러 오는 선생님을 기다리는 학생 같은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다른 삶도 있다. 기다리지 않고 스승을 찾아가는 것이다. 스승을 만나는 것이다. 비밀을 발견하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얌전한 어른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얌전하게 길들여진 모범생. 의외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산다.


다시 수영장 이야기다. 오늘 고급 B반에서 A반으로 넘어온 여성이 있다. 몇 살이나 됐을까? 서른 안팎 아닐까? 그녀는 꽤 오래 B반에서 운동을 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거의 일 년 정도지 않을까? 그녀는 그 시간 동안 언제나 북유럽의 축구장을 연상시키는 짙은 초록색 수영복을 입고 왔다. 내가 수영장에 가는 날 그녀도 왔다. 나만큼 수영에 진심이 사람이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언젠간 우리 반으로 오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평균 연령이 환갑이 넘는 여성들과 수영을 했다. 세트 수는 비슷하지만 바퀴 수는 적고, 당연히 속도도 느리다. 운동의 양과 질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 시간을 버티던 그녀가 결심을 굳히고 우리 반으로 넘어온 것이다. 1월 초도 아니고 2월에.


오늘 처음으로 그녀와 수영을 해 봤다. 1번과 나 사이에 있어야 될 사람들이 안 왔다. 1번은 허리가 없네, 하며 입장 빡빡한데, 하고 바로 뒤에 서 있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4번과 5번을 오가며 그 “허리” 역할을 해 주던 내가 2번을 맡았다. 오리발을 끼는 수요일, 첫 번째 세트는 백 미터 열 개였다. 속도는 빠르고 지구력도 있어야 한다. 난 1번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내 뒤에 바짝 따라 붙은 사람은 수영장에 비치된 롱 핀(스킨 스쿠버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긴 오리발)을 낀 중학생(!) 지현이었다. 그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바퀴수가 증가될수록 수시로 순서를 바꿨다. 조금이라도 늦게 출발해서 숨을 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 바퀴쯤 돌았을 때 휴식하는 사람들이 발생했다. 여섯 바퀴째에서도.... 1번과 나와 중학생 지현이는 끝까지 쉬지 않고 돌았다. 다시 말하지만 1번을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이어진 세트에서도 난 1번의 뒤를 끝까지 받쳐줬다.


강습이 끝나고 그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할 만하죠?”, “와, 못 따라가겠던데요.”, “그냥 70, 80퍼센트 정도만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돼요. 몇 달만 버티면 괜찮을 거예요. 다시 저 레인으로 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여성은 미소로 답했다.      


강습이 끝나고 연습 풀에서 쿨링을 했다. 그렇다. 쿨링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쿨링을 하는 동안 중급반에 있는 귀여운 누님이 친한 아가씨와 함께 연습풀에 들어왔다. 그 아가씨는 자유형 스트로크의 팔 접기(어깨에 부담을 줄이고 회전 시간 또한 줄이기 위해 스트로크를 끝낸 후 물 밖으로 나온 팔을 접어 회전 반경을 줄여 돌리는 방법)를 연습하고 있었다.


난 그것보다는 물속에서 스트로크가 더 문제인 것 같다고 말해줬다. 피니쉬 동작에서 뒤로 팔을 더 밀어주라고 했다. 그때, 옆에 있던 누님이 한마디 하셨다. “난, 뒤로 쭉 팔을 뻗으면 여기가 아프더라.”하며 팔의 뒤쪽 근육인 삼두근을 만졌다. “그래서 중간에서 그냥 빼서 돌려.”하고 말을 덧붙이면서. 이어 하는 말이 “아니 아프면서까지 수영할 필요는 없잖아.”였다. “아니, 힘들고 아파야 살도 빠지고 근육도 생기죠. 누님.”, “그래도. 그럴 필요 있나.”, 우리의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물론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는 없다. 모든 것에 그렇게 열정을 다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이고 그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도전하기로 했으면 기왕 하는 거, 언제 다시 할지 모른다면 전력을 다해야 되지 않을까?


기러기 - 메리 올리버     


착하지 않아도 돼.

참회하며 드넓은 사막을

무릎으로 건너지 않아도 돼.

그저 너의 몸이라는 여린 동물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게 하면 돼.

너의 절망을 말해 봐. 그럼 나의 절망도 말해주지.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가지.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투명한 조약돌 같은 비가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가지.

초원들과 울창한 나무들,

산들과 강들 위로,

그러는 동안에도 기러기들은 맑고 푸른 하늘을 높이 날아

다시 집으로 향하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저 기러기들처럼 거칠고 흥겨운 소리로 너에게 소리치지-

세상 만물이 이룬 가족 안에 네가 있음을

거듭거듭 알려주지.


SNS에는 “절대 이렇게 하지 마세요.”, “제발 이렇게 하세요.”같은 노하우가 많다. 다들 그 방법만이 최고라고 자부한다. 그 단순한 단호함이, 때론 부러울 정도다. 정답을 알고 살아도 풀리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전력을 다해 살아도 후회를 남기는 것이 인생이다. 후회는 절망을 부르고 절망은 포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잊지 말아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의 상상에 맡겨져 있다. 당신은 이 우주의 일원이고 당신의 사라짐은 우주의 한 조각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렇다고 나를 위해 준비된 우주의 비밀을 알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닐 필요 없다. 삶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낯선 도시와 나라를 배회할 필요도 없다. 메리 올리버는 프로빈스 타운에서 거의 평생을 살면서 늘 보던 바다와 숲, 그리고 새와 동물을  보면서도 이런 시를 썼다. 김용택은 섬진강 인근의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주옥같은 시를 썼으며 <홀로서기>를 쓴 서정윤은 대부분의 시를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면 썼고, 안도현 역시 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동안 등단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엄청난 경험보다 우주를 발견하는 시선이다. 많은 사람들이 밤하늘을 보지만 천문대의 망원경으로만 보이는 별이 있듯이 우리의 일상에도 발견되길 기다리며 조용히 빛나고 있는 인생의 비밀들이 있다. 그러니, 다시 말하지만 무슨 엄청난 인생의 비밀을 찾아오겠다고, 생의 전환점을 스스로 만들겠다고 오지로 떠나고 어디 가서 한 달을 살고 오고 순례의 길을 걷고 그러지 마라.


수영 가르치기  - 메리 올리버


얼음같이 차가운 발길질, 끊임없는 파도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나는 팔을 휘젓고

기침을 해대다가, 마침내 육지를 발견했지.     


아마도, 누군가,

중세의 격언을 기억하며,

나를 물에 던진 모양이야.

수영하는 법을 배우라고.     


그 사람은 알지 못했던 거지,

그 길고 외로운 하강과 광적인 상승에

돌아온 이들은,

수영은 하나도 못 배우고,

그저 꿈과 연민, 사랑과 품위를

하나씩 포기하고

어디에서든 살아남는 법만을 배운다는 걸.


일전에도 얘기했듯이 일렁이는 바다에서의 수영은 얌전한 수영장에서의 수영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영장의 물은 달래가면서 할 수 있고 내 몸의 컨디션에 따라 적절히 템포나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다는 나를 봐주지 않는다. 타협도 없고 동정도 없다. 지구와 달, 바람의 부름에만 응답하는 바다에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언젠가 말했듯이 인생은 길들여지지 않는 바다와 같다. 나보고 알아서 수영을 배우라며 던져진 바다와 같다. 누군가 내게 이런저런 영법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래서 모든 영법을 마스터한다고 해서 바다에서의 수영이 쉬울 수는 없다. 파도가 잦아든 때를 골라, 바람과 물때를 골라 들어간 바다는 나를 배신하기도 한다. 설령 바다가 모처럼 얌전하다고 해도 그 안은 끝없이 일렁인다. 앞으로, 똑바로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바다수영과 같은 인생에서 우리는 겨우 살아남는 법만을 배운다. 그런가? “꿈과 연민, 사랑과 품위를 하나씩 포기하고” 그렇게 길들여지지 않는 인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본능만 남는 건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어떤 경우에도 그걸 잃지 말아야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 흔들리는 인생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꼭 움켜쥐고 살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비통 - 메리 올리버     


당신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으리라 나는 믿어.

당신이 속았으리라 나는 믿어.

당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고독과 불행이었으리라 나는 믿어.

당신의 가장 바쁜 적은 분노와 우울이었으리라 나는 믿어.

당신이 기쁨이라는 놀이를 마음껏 즐기지 못했으리라 나는 믿어.

당신이 평안을 갈구하면서도 늘 그것과 낯선 사이였으리라

나는 믿어.

음악은 우울한 것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믿어.

그 어떤 장신구, 그 어떤 귀금속도 당신의 비통함만큼

  빛나진 못했으리라 나는 믿어.

당신이 여전히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달래지지 않은 채로

마침내 관에 누웠으리라 나는 믿어.

오, 산비탈에 피어난 거칠고 부도덕하며 무모하고 평화로운 꽃들

아래 묻힌

  차갑고 꿈 없는 당신.     


언젠간 우린 삶의 끝과 마주한다. 난 이 시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그만큼 울컥했다. 오늘 다시 이 시를 읽으며, 어쩌면 이 시는 역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이는 가능성이 없다. 그렇게 살았다면 그런 사람으로 묻힌 후 그런 사람으로 기억된다. 죽기 전까지, 묻히기 전까지,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든,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비통한 삶을 살았어도 그 삶은 바뀔 가능성이 있다. 메리 올리버의 “비통”은 자신을, 스스로 산 채로 매장하기로 선택한 이들을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난 되는 게 없어. 이 정도면 됐어. 모든 게 내 탓이야. 내가 그렇지 뭐.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살아야 한다. 묻히기 전까지, 당신의 삶은 끝난 것이 아니다. 메리 올리버는 그런 말을 당신에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이에게 남은 배움은 무엇일까? 어떤 배움이 어른다운 어른,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걸까? 시인은 <블랙워터 숲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만 하지.

유한한 생명을 사랑하기,

자신의 삶이 그것에 달려 있음을

알고 그걸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줄 때가 되면

놓아주기.     


좋은 시, 시가 좋다,라는 기준은 사람마다 제 각각일 테고 그 각각의 기준 안에도 여러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난 “나도 저런 시를 쓰고 싶다.”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시도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메리 올리버의 시는 그런 시다.       


이번 주 부산과 울산의 각급학교에선 졸업식이 이어졌다. 졸업을 하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청춘들과 메리 올리버의 시를 읽고 싶었다. 특히 저 <마젤란>을.  <블랙워터 숲에서>를 제외하곤 전문을 실었다.


다른 글에 썼듯이, 메리 올리버는 <나이애드>라는 영화를 통해 알게 됐다. 그 영화에 인용된 <여름날>이라는 시를 읽었을 땐 그저 자연을 사랑하고 칭송하는 그런 시인인가 보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유유자적한 사람이 아니다. 냉정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깊은 시선을 삶을 향해 던진다. 자연 속에서 삶의 비밀을 포착하고 일상 속에서 인생의 지혜를 건져낸다. 좋은 삶에 대해 말하지도 않고 잘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삶의 진실에 대해 담담히 말한다. 그 삶을 묵묵히 통과하라는 격려와 함께.      


여기에 실린 시들은 그녀의 첫 번째 시선집인 <New and Selected Poems Volume One>에 실려 있다. 우리나라엔 <기러기>라는 표제 하에 출판됐다. 참고로 <New and Selected Poems Volume Two>도 있으나 아직 번역되어 출간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 물론 그녀의 다른 시집과 에세이는 대부분 <마음 산책> 출판사를 통해, 대략 열 종 정도 출판됐다. 시인은 2019년 1월 17일, 83세의 나이로,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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