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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15. 2024

시, 일상의 포착, 불완전한 옮김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14

시     


그것은 전부

소리 안에 있다. 하나의 노래.

노래라 하기 힘든, 그것은  

   

노래여야만 하는 것 - 세세한

것들, 말벌들,

용담꽃으로 이루어진 - 어떤

긴박한 것, 벌어진    

 

가위, 숙녀의

눈 - 깨어나는

벗어나면서, 당기면서.    


패터슨 - 제1권에서

.......

          그것은 무지한 태양이다.

텅 빈 태양들 틈에서

솟아오르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육신을 입고 사람이 잘 살 수는 없다

다만 죽어갈 뿐- 자기가 죽어 가는 걸

모르는 채; 하지만

그건 예정된 일, 그리하여 자신을

새롭게 하고, 더하기와 빼기로,

위로 아래로 걸으며,


도서관 - 제3권에서  

   

           서늘한 책들이

때로 마음을 도서관으로 이끌 것이다

더운 오후에, 마음을 멀어지게 하는 감각을

식히기 위하여 책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모든 책들 속에는 바람이나 유령이 있어서

거기서 생명을, 귀의 관들을 가득 채우는

강한 바람이 울린다. 우리가 바람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할 때까지,

실제의  .


늘 비슷한 꿈을 꾼다. 뭔가를 찾는 꿈이다. 배경만 좀 다르다. 어떨 때는 브라질의 빈민가 산동네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동네를 헤매며 집 하나를 찾고 있다. 어떨 때는 넓디넓은 대학 캠퍼스를 서성인다. 강의에 가기 위해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오르고 무수히 많은 건물을 통과한다. 내가 학생으로, 강사로 다녔던 대학들 중에선 이렇게까지 복잡한 대학은 없었다. 분명 강의실을 가는 거라면 전에도 갔다는 의미다. 한두 번 간 것도 아닐 텐데 꿈속에선 좀처럼 강의실이 나오지 않는다.      


어떨 땐 공중에 붕 떠서 여기저기 떠돌며 찾기도 한다. 찾아오라고 시킨 사람도,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데 난 언제나 꿈속에서 가야 할 곳과 찾아야 할 것을 향해 초조하게 움직이고 있다. 얼마 전, 설 연휴, 처남과 많이 마시고 잠든 밤에도 그런 꿈을 꿨다. 뭔가를 계속 찾고 있었다. 꿈속의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제 그만 찾아라. 그만하면 됐다.      


꿈을 꾸지 않으면 악몽도 꾸지 않는다. 꿈을 꾸지도 않고 만취도 하지 않고 들뜨지도 않고 환상을 갖지도 않고 그렇게 담담히 살자고 했다. 사찰 한 귀퉁이, 무덤덤하게 서 있는, 어찌 보면 오만가지 색과 그림과 꽃과 나무와 산과 어우러진 사찰 전체의 풍경 중 유일하게 무채색인, 그래서 가장 도드라지면서도 가장 안 어울리는 석등처럼 그렇게 담담히 남은 삶을 살아가자고 타일렀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 어쩌면 천 년 동안, 어쩌면 수백 년 전까진, 대웅전으로 향하는 누군가의 발길을 밝혔을 석등이었을 테지만 이제는 그저 조용히, 묵묵히 서 있는 그 석등처럼.      


겨우 설 연휴 어느 밤을 넘겼을 뿐인데 나이가 들어버렸다. 다시는 꿈꾸지 말자. 다시는 취하지 말자. 다시는 들뜨지 말자. 석등처럼 담담히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나이가 들자 다짐하며 연휴를 보냈다. 올 설은,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다.     


기억

폭설과 홍수의 기억이 있다. 끼니와 학비를 걱정하고 남이 주는 옷을 얻어 입었던 가난의 기억이 있다. 연탄을 한 장이나 두 장씩 겨우 사들여 방에 온기를 유지했던 추운 겨울에 대한 기억이 있다. 어머니와 단 둘이서, 추운 방에서 작은 초콜릿 케이크 하나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던 기억이 있다. 새로 태어난 생명을 향한 사랑과 전사처럼 암과 싸우다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던 남자에 대한 기억이 있다.      


기억은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기에 말할 수 없다. 나조차 믿을 수 없는 내 기억을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바둑을 복기하듯, 가끔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부질없다. 기억은 사진보다 나을 게 없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TV로 보는 영화보다 더 누락되어 있다. 소리도, 향도, 촉감도 떠올릴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기억은 안에서 맴돌며 기억을 위한 의미를 만든다. 기억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 기억은 그렇게 나오지 못한 채 의미를 덮고 잠에 든다. 동면하는 곰처럼. 상처 위에 붙어 떼어지지 않는 딱지처럼.      


결국, 잠든 기억을 꺼내면 피가 흐른다. 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남겨진 과거의 조각들, 누락된 것들이 엉겨 만든 엉성한 기억이 쏟아진 자리에선 피가 흐른다. 결국 입을 닫는다. 생각을 멈춘다. 딸의 미소를 보며 맥주를 마신다.      


좋은 기억이라면 빛이 쏟아질까? 좋은 기억은 아쉬움을 남긴다. 앞서 말한 향, 소리, 촉감, 그녀의 미소와 웃음소리, 친구들의 떠들썩한 소음, 축구장과 농구 코트에서 흘렸던 땀, 그 모든 것을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으며, 기억한들 어떻게 다 지금 말할 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기억할 것은 많아지지만 기억의 부피는 줄어든다. 그저 타임라인만 길어질 뿐. 좋은 기억들은 이미 잊혔다.     


풍경

풍경은 소리 없이 말한다. 동해선과 버스를 타고 오갈 때마다 사람들을 본다. 그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한겨울에는 그들이 얼마나 따뜻한 잠자리를 뒤로 하고 나왔을지 상상하곤 한다. 부산에 막 도착한듯한, 캐리어를 갖고 지하철에 탄 커플을 보면 그들이 오늘밤 부산의 어느 야경을 보며 뜨거운 밤을 보낼지 상상하곤 한다. 여행 내내 싸우지 말길 바란다. 광안대교와 광안리 해수욕장의 드론 쇼를 본 뒤, 근처 꽤 괜찮은 맥주 집에서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맥주와 버펄로 윙을 먹을 수 있기 바란다.     


풍경은, 이 시인의 시처럼, 사람이 있을 때 하는 이야기와 없을 때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사람이 없는 풍경은 보는 사람에게만 말한다. 다른 보는 이도 없고, 함께 보는 이도 없으니 풍경이 전하는 소리는 나만 들을 수 있다. 내일 와서 이 풍경의 소리를 듣는 이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뿐, 오늘 이 순간의 이야기는 나만 들을 수 있다.      


나만 들은 풍경의 이야기를 무슨 수로 너에게 전할 수 있을까? 당연히 방법이 없다. 기억과 같이, 풍경의 이야기 또한 안으로 삼키거나 파편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이다. 시에 담긴 풍경이, 풍경을 담은 시가 시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이 때문 일지 모른다.      


행을 띄우고 단어를 밀어 쓴다. 문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어 그 자체의 힘을 믿고 던진 단어들이 잭슨 폴락의 그림처럼 흩어져 있다. 그러다 갑자기 단편 소설처럼 빽빽한 문장들이 전개된다. 뚝, 끊긴 후 편지가 등장한다. 해석을 방해하고 의미 찾기를 거절한다. 마치 그냥 생각 없이 읽으라고 하는 것 같다.      


기억도, 풍경도, 꿈도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지는 대로, 남아 있는 잔상만큼 말할 수 있다. 그마저도 다 전달되지 못한다. 이미지는 단어의 옷을 거부하고 단어는 이미지를 재단하려 한다. 말은 하는 순간 흩어진다. 찰리 파커가 말한 것처럼, 소리는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흩어진다고 했던 찰리 파커의 그 말처럼 말 또한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자기 인생에 확신이 있는 걸까? 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앞에 나서서 말할 기회가 많아진다고 하던데 난 그렇지도 않다. 내가 제일 말을 많이 했을 때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대략 십여 년 정도였다. 지금은 한 달에 두세 번 고객을 만날 때만 말을, 그것도 아주 전략적으로 하고 그 외의 시간에 대체로 입을 다물고 있다. 아, 수영장에서 서로를 독려할 때도, 아침에 아내와 딸에게 아침 식사로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볼 때도, 그리고 잠이 들기 전 아내와 매번 똑같은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그 외에는 입을 다문다.          


말 2

설 연휴, 집에서 처남과 대패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좀처럼 집에서 냄새나는 음식을 잘해 먹지 않는데 그야말로 모처럼이었다. 인테리어를 하며 바른 하얀 벽지와 하얀 천장으로 삼겹살의 연기가 흩어지는 걸 보면서 묘하게 흐뭇했다. 이제 겨우 생활감이랄까, 그런 것이 집에 스미고 있었다. 그 스밈의 시각적 확인이었다.  

    

1차로 백세주 두 병, 2차로 가볍게 맥주 PT 하나. 처남은 술이 모자란 눈치였다. 날 딸과 함께 술을 사러 나갔다. 편의점에서 캔 맥주 몇 개와 딸이 고른 과자를 계산대 위에 올려놨다. 계산된 과자를 가져간 장바구니 넣으려 할 때 점원이 말렸다. “다 계산하신 뒤에 넣어주세요. 저희 방침입니다.”, 난 젊은 남자 점원을 똑바로 보며 조용히 말했다. “왜, 계산 안 하고 튈까 봐요?” 점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아, 물론 손님은 전혀 그렇게 보이시지 않지만 저희가 몇 번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점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말끝을 흐리며 바코드를 찍고 있는 그에게 조용히 위로의 말을 했다. “쉽지 않죠?”, 그에게 위로로 들렸을까?     


설 연휴의 일요일, 편의점을 지키고 있는 청년의 마음은 어떨까? 오늘밤, 아니 그간 근무하는 동안 몇 사람에게나 이렇게 하기 어려운 말을 해야만 했을까? 그 말 때문에, 점장이 세웠다는 그 방침 때문에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손님에게 욕을 먹어야 했을까? 삼겹살과 술 냄새가 섞인 숨을 내뱉고 있는 중년 남자의 낮은 목소리를 듣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에게도 나에게도 인생은 쉽지 않다. 그나마 좀 더 겪은 내가 던진 위로라는 게 고작 “쉽지 않죠?”였다. 쉽지 않겠지. 당연한 말이다.      


하루의 길이도, 무게다 다르다. 사람마다 기분에 따라. 남들 다 쉴 때 편의점 카운터에 묶인 채 보낸 하루는 유독 길었을 것이다. 대체 휴일을 믿고 맘껏 술을 마시러 온 손님들을 대하는 동네 맥주집의 아르바이트생들의 밤도 길고 길었을 것이다. 테이블마다 술자리는 길었을 것이고 그만큼 많이 불려 가야 했을 테니. 유독 길고 쉽지 않은 하루를 보낸 사람에게 “쉽지 않죠?” 같은 멘트보다 더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멘트를 했어야 했다. 이 나이 먹고도 적절한 말을 뱉는 것이 쉽지 않다.      


일상/인상=의미

어떤 이에게 일상은 반복되는 것이지만 어떤 이에겐 매번 새로운 것이다. 우리가 이 시집에 실린 시와 영화 <패터슨>에게서 배워야 하는 점이다. 일상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때 일상을 이루는 것들은 배경이 된다. 마치 남녀 커플이 키스하는 장면에서 포커스 아웃 되는 주변 인물과 배경처럼 일상 또한 그렇게 된다. 보이되 보지 않고, 보되 해석되지 않는다. 우리가 걸을 때조차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아니 우린 이미 그러기 전에도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사건”이 터져야만 주의를 기울인다. 소리에 균열을 내는 클락숀 소리, 급브레이크 소리, 지루한 이미지에 갑자기 등장하여 눈길을 끄는-물론 그래서 눈길을 끄는 것이지만 - 옷차림을 했거나 아름답거나 잘생긴 사람. 그러나 이마저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듣고 보이더라도 우린 그걸 경험으로 조립한다. 지연되는 해석도, 늦은 수용도 없다. 그야말로 상식선에서, 귀납적으로, 경험적으로 해석한 뒤 뒤돌아선다. 시인은 그러지 않는다. 보고 들은 것, 만난 사람을 “제시”한다. 자신의 해석이라는 프로세스를 거친 뒤에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새롭게 본 것, 본 순간의 풍경, 들은 순간의 소리, 스치며 봤던 사람의 그 순간의 인상.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인은 경험했지만 “경험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았다. 해석되지 않는 인상은 던져진다. 결국 시인의 시 중, 어떤 것은 파편적인 이유다.       


시인의 자신의 시에서 의미를 찾지 말라고 한다. 주어-동사-서술어의 일반적 흐름을 가진 문장으로는 그 “순간”의 포착을 말할 수 없다. 포착은 해석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포착”을 말하는 글 또한 해석의 전형, 전형적인 해석을 거부하며 흐트러져 있다. 어떤 인상은 먼저 오고, 다른 인상은 뒤에 온다. 시의 문장들은 그 인상들의 파편들처럼 정렬되지 않은 채 나열된다. 순간의 인상을 무슨 수로 정교화 할 것인가? 정교하게 길들여진 인상은 동물원에 갇힌 야수와 같은 거 아닐까? 인상 그대로, 그 날 것 그대로의 인상을 시인은 전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는 영화 <패터슨>에서 처음 알았다. 영화에 나온 시들은 비교적 평범한 시였다. 또 영화를 위해 새로 써진 시들도 있었고. 반면 이 시집은 시의 실험실 같다. 시의 표현과 형식의 온갖 시도들이 한데 모여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실험들이 194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에 행해졌다는 것. 그야말로 시의 첨단은 이미 이때 이뤄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시인은 시의 전형적인 정렬을 거부한다. 문장의 온전한 구성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형용사의 파편들이 쏟아지기도 하고, 멈칫거리는 동사들이 한데 엉켜있기도 하다. 이건 단편 소설 아닌가 싶을 만큼 촘촘히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중간에 편지글이 등장한다. 이게 시인가 싶은데, 이게 시가 아니면 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학의 장르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이 시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럼 이게 시지 뭐가 시겠어.


여하간 이런 사정으로 인해 <시>를 제외한 다른 시들은 부분만 실었고, 실을 때 최대한 시집에 실린 그대로 옮겨 실으려 했다. 어떤 수단으로 이 글을 보는가에 따라 달라 보일 수도 있으니, 여유가 있다면 이 시집을 찾아 읽어보는 것이 이 시인의 진가를 아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이전 13화 마젤란은 아직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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