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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03. 2024

시간이 만들고, 동료가 눈치챈 변화

수영장에선 건진 철학 49

이제 좀 할만하다.

앞서, 다른 글에도 썼듯이 수영장에서 몸매가 좋다는 얘기는 몇 번 들었다. 그런데 요즘엔 수영 실력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우선 체력이 좋아졌다, 컨디션이 좋은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도 그런 것이 이젠 모든 운동을 다 소화한다. 거르는 랩도 없고, 거르는 세트도 없다. 오리발을 끼고 하는 핀 수영 날에는 유독 핀 수영에 약한 2번 아저씨와 3번 아줌마 대신 1번을 도와 템포를 유지하는 역할도 대신할 정도가 됐다.   

   

보자, 딸이 태어나기 전, 일 년 정도 하던 수영을 그만둔 지 십여 년 만에 다시 수영을 하게 된 것이 2022년 7월, 우리 수영장에선 악명이 자자한 고급 A반으로 옮긴 것이 그 해 11월이었다. 그 뒤로 일 년 정도 이 반에서 시간을 보냈다. 처음 몇 달은 거르는 랩도 많았다. 앞에 사람과 간격도 제법 있었다. 여름이 지나면서 조금 할 만해졌고 가을에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으며 겨울에는 어지간히 마신 전날의 여파도 이겨냈다. 그 후 맞은 새해, 달라졌다.     


앞서 말했듯 같이 수영하는 사람들이 그 차이를 먼저 알아봤다. 2번 아저씨와 3번 아줌마는 핀 수영을 할 때마다 종종 나를 먼저 보내곤 한다. 1번을 따라잡기엔 아직 멀었지만 2번과 3번의 뒷모습은 놓치지 않고 있다. 1번이 출발하기 전 나와 눈을 맞추고 출발하곤 한다. 나에 도착 후 몇몇의 도착, 그것이 그의 기준이 된 것이다. 그가 나를 볼 때, 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그는 잠수함에서 쏜 어뢰처럼 사라진다.


물어보면 답해줘야 한다.

최근엔 중급반 아가씨 몇몇에게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팁을 전해주곤 한다. 내 매거진을 꾸준히 읽어 온 분이라면 아는, 중급반에 곱게 나이 드신 누님이 한 분 계시다. 고급 A반의 옆 레인이 초급반인데, 그 누님이 그 초급반에 있던 그때부터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안면을 트게 됐다. 그분이 뭔가 연습할 때 슬쩍 다가가 조언을 하거나, 심지어 누님이 날 불러서 “최 선생, 이게 맞는 거야?”하고 물으실 때마다 몇 마디 조언을 하다 보니 옆에 있던 아가씨들도 덩달아 내게 묻게 됐다.      


요즘엔 이 중급반 회원들 사이에서 플립턴 연습이 붐이다. 플립턴이란, 일명 퀵 턴이라고 하는 턴으로 수영장 끝에 다다랐을 때 앞 구르기 하듯이 몸을 휙 돌린 후 터치 판을 찍고 차고 나오는 턴을 말한다. 우리가 수영 대회나 올림픽에서 보는, 자유형 선수들이 하는 턴이 바로 이 턴이다. 그런데 이 턴이 동호회 수준, 특히 초급을 넘어선 중급반 회원들에겐 의외로 쉽지 않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을 떠올려 봐라. 유독 앞 구르기를 못하던 몸치 친구들이 있지 않았나? 그런데 하물며 물에서 몸을 180도 회전시키는 것이 쉽겠는가?     


게다가 이 턴에는 두 가지 공포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코로 물이 들어올 수 있다. 도는 순간 방심하면 말이다. 그래서 도는 동안 코로 숨을 내뿜어야 되는데, 뭐, 알다시피 정신없다 보면 그게 어디 생각나나? 두 번째 공포는 어쩐지 뒤꿈치가 엔드라인 끝의 턱에 부딪힐 것 같다. 그러니까 휙 빨리 돌아버리면, 특히 벽과 거리가 짧을 때, 뒤꿈치가 턱에 부딪힐 것 같은 공포심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중급반의 아가씨들은 터치판에 다다르면 속도를 줄여서 진입한 뒤에 고개를 살짝 들어 숙이는 힘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아니, 명색이 퀵턴인데 이때까지 왔던 속도를 줄이는 것은 또 뭐며, 그 와중에 원심력 확보를 위해 고개를 살짝 드는 건 또 뭔가. 자기가 도는 걸 봐달라는 아가씨에게 한마디 했다. 생각이 너무 많다. 턴한 뒤 너무 자세를 완벽하게 잡은 뒤 나오려고 한다. 그냥 돌고 찍고 나오면서 자세 잡고 가면 된다. 물속에서, 뭐, 우리가 어떻게 나오고 뭐하는지 볼 수 있나? 빨리 돌고 휙 나오는 게 최고다. 이런 말을 해줬다.


테스트 랩

1월 마지막 주에서 2월 첫 주 사이에 있던 그 한 주는 수영장 개근을 했다. 감독이 해외에 나가 있던 덕분이다. 수영을 다시 시작한 이래 첫 개근이다. 그런데 할 만했다. 그만큼 체력이 붙은 것이겠지. 그렇게 맞은 금요일, 2월 2일, 새로 수영장을 찾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고급 B반에 사람이 넘쳤다.


강사는 슬쩍 두 레인, 고급 A반과 B반의 사람 수를 어림잡아 본 후, B반에 새로 들어온 사람 중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사람 몇 명을 우리 레인으로 보냈다. 그 후 오늘 1번을 맡은 2번 아저씨와 3번을 맡은 4번의 날렵한 아줌마, 그리고 3번을 맡은 내게 겨우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자유형 열 바퀴 할게요. 50씩 끊어서 열 개. 새로 온 분들 테스트 겸 해서요.”     


강사가 이렇게 말했다는 건 속도를 좀 내라는 의미다. 단거리 인터벌에 가까운 세트다. 1번이 출발했다. 2번도 여유 없이 따라붙었고 나도 간격을 두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전력의 80퍼센트 수준의 속도로 스트로크를 했다. 그래야 겨우 앞에 사람의 발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 바퀴를 돌고 오니, 맨 마지막 사람이 이제 겨우 터치 패드를 찍고 턴을 했다. 1번 주자가 다시 출발했다. 네 바퀴까지 세다 말았다. 다섯 바퀴 째, 강사는 출발을 재촉했다. 내 뒤에 바짝 붙어 온 아가씨에게 3번 자리를 내주고 4번으로 따라붙었다. 덕분에 속도는 좀 줄었다. 돌고 오니 스타트 라인에 사람들이 쉬고 있다. 결국 열 바퀴를 돌고 오니 사람 몇 명이 사라졌다. 알아서, 또는 강사의 지시 하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B반 레인으로 돌아갔다.


진짜 잘하세요?

강습이 끝난 후, 연습 풀에서 마무리 운동을 하는데 초급반 사람 몇 명이 들어왔다. 그중 낯이 익은 여대생이 접영 킥 연습을 하고 있기에 그걸 본 후 농담을 던졌다. “아니, 왜 그렇게 물이랑 싸워. 살살 달래면서 해야지.”, 아가씨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달랠 줄을 몰라요.”, 접영 킥에 도움이 되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팁 하나를 알려줬다. 그 사이 초급반 아가씨 몇 명이 다가와 함께 들었다.      


그중 수영이 조금만 몸에 익으면 남자 못지않게 해내기에 충분해 보이는 떡대를 가진 괄괄한 아가씨가 불쑥 말을 던졌다. “아, 진짜 수영 너무 잘하세요.”, “응? 나? 아이 뭘~ 저 반에서 한 1년 버티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된 거지.”, “아니 진짜, 진짜 잘하세요. 그 금목걸이 하신 분이랑, 요즘 잘 안 보이시는 수모에 큰 하트 그려진 분이랑. 아저씨까지, 진짜 너무 잘하세요.”,


“보자~. 금목걸이는 우리 1번이고, 큰 하트 수모? 아, 호리호리하고 피부 하얀 사람?”, “아, 네.”, “그 양반, 이제 육아휴직 끝나서 시간 바꿨지.” 아가씨들이 깜짝 놀랐다. “에~ 애 아빠라고요?”, “그렇지. 우리 중에 총각은 없어. 다들 4,50대야. 나도 50대인데 뭐.”, “에? 진짜요?", 


이런 대화를 한 20여년 전에 들었다면 어깨와 배에 힘도 주고 아가씨들 폼을 봐주는 하면서 썰도 풀었을 것이다. 어쩌면 은근슬쩍 내 소개도 하고, 수영장 밖에서 약속을 잡았을 지도 모르겠다. 짧은 대화가 끝난 후, 접영 돌핀킥을 연습하는 초급반 아가씨들을 뒤로하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꾸준함이 변화를 만든다.

어찌됐든, 나도 모르게 달라진 모양이다. 폼은 그럴싸해졌고 체력은 견딜 만 해진 모양이다. 이 반으로 옮긴 지 일 년 하고 몇 개월만의 성과다. 그렇게 술을 퍼마신 것치고는 제법 빠른 성장이지 않나 싶다. 술을 끊어야 좀 나아지려나 했던 시간들이었는데 술을 마시면서도 묵묵히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얼마 전 2번 아저씨가 그랬다. “아니, 한 달에 서너 번 나오면 운동이 되나. 샤워하러 오는 기지 그건.”, 2번 아저씨는 어디 멀리 다녀오느라(이것도 궁금해서 물어봐서 알았다.) 이번 주에 두 번 빠졌는데 1번 아저씨는 삼일 만에 나온 아저씨에게 왜 이틀 연속 빠졌냐고 뭐라고 했고, 난 놀라서 “어디 아프셨어요?”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성실하게 수영을 하는 사람이 한 말이어서 더 신뢰가 간다.      


애나 어른이나 꾸준함이 결과를 만들고 변화를 이끌어낸다. 겨울방학 기간 동안 우리 반에 합류한 중학생 세 명 중, 꾸준히 나오는 한 명만 체력과 실력이 쑥쑥 올라가고 있다. 꾸준히 나오는 덕에 어른들의 칭찬과 격려를 한 몸에 받는 터라 더 그럴 것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탁월한 재능이 없으면 버티기라도 해야 한다. 세월의 힘을 믿고 묵묵히 해야 할걸 하고 가야 할 길을 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달라져 있고, 그 달라짐은 내가 알아채기 전에 나를 보아온 누군가가 먼저 알아챈다.      


이제 막 2월에 접어들었다. 큰마음먹고 새해 들어 막 수영을 시작했다면 겨우 자유형으로 25미터 정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진도가 늦어서야 되겠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좀 버텨봐라. 과식과 과음이 당연한 설 연휴를 잘 넘기고 꽃피는 3월까지 견디면 물을 달래가면서 하라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 갈지도 모른다. 좀 늦어도 4월이면 살이 빠질 테고, 5월이면 접영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묵묵히 앞으로, 매일매일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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