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에게 배운 것들
3월 들어 강사가 바뀌었다. 이전 강사와는 1년 이상 함께했다. 앞선 글에도 썼지만 선수 출신의 그 강사는 회원들의 많은 걸 바꾸려 했고 실제로 많은 걸 바꿨다. 초급반도, 중급반도, 고급 B반도 아닌 고급 A반의 사람들을.
1번의 스타트는 쓸데없는 포물선이 없어졌다. 우리 모두의 자유형 스트로크는 우아해졌고 접영은 간결해졌다. 덕분에 접영을 몇 세트해도 힘든 줄 모르고 하게 됐다. 솔직히 핀을 끼고 한다면 몇십 개를 해도 상관 없어졌다. 신기한 건 그의 가르침 덕분인지 지난 1년 동안 수영 때문에 아파 본 적이 없다. 수영하는 이들이 많이 당하는 어깨 부상도 겪어본 적이 없다. 접영을 한 주 내내 해도 견갑골이나 등이 좀 뻐근할 뿐 근육조차 뭉치지 않는다. 다 강사 덕분이다.
이 강사의 지도를 받은 지 몇 달 후, 난 이 강사와 함께 내 자유형 스트로크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섬세했다. 이론도, 실기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고 경험도 풍부했다. 게다가 나이에 비해선 제법 여유도 있었다. 자기보다 최소한 열 살 이상 많은 남자 회원들에게도 서슴없이 지적하고 이미 몸이 굳은 남자들도 변할 수 있다고 독려했다. 자유형 스트로크의 완성을 위해 쉴 새 없이 지적했고 접영의 효율성을 위해 몸치들을 변화시켰다. 평영과 배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르쳤던 하이 엘보우의 습득을 위해 그가 시킨 드릴을 열심히 따라 했다. 특히 물을 잡는 동작인 캐치의 각도와 이후 물을 밀어낼 때의 몸통과의 최적 거리를 느끼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아, 물을 잡는다는 건, 물을 밀어낸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내게 맞는 각도와 힘은 이거구나, 하고 느낀 건 그와 만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브런치에 올린 글로 확인해 보니 10월에 접어들어서였다. 역시 브런치에 올린 글로 확인해 보니 강사가 바뀐 것이 이 해 1월, 이 강사를 만나지 무려 열 달 가까이 돼서야 그 감이란 걸 잡은 것이다.
감이 오면 달라진다.
다른 글에도 썼듯이,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어떤 특정 동작의 감을 잡게 되면 그 운동의 수준은 그전과 후로 나뉜다. 아마추어 수준에서, 운동의 양은 체력에 달려 있지만 운동의 수준과 질의 격차는 바로 이 “감”의 포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감 없이도 제법 그럭저럭 버티는 회원도 있다. 소위 “힘”수영이라고 하는데, 젊거나 타고나길 체력과 근력이 좋은 사람은 나쁜 폼으로도 그럭저럭 앞으로 갈 수 있고 강습 시간을 버틸 수 있다. 문제는 젊은 사람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이제 막 수영을 시작한 사람이 봐도 그런 수영은 보기 흉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는데, 이런 식의 수영은 부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제 햇수로 겨우 4년 차에 접어드는 - 십여 년 전에 일 년, 다시 해서 2년 반 - 스위머로써 이제 겨우 스트로크를 이해했다. 올해는 킥의 리듬을 이해하는 해로 정했다. 이를 위해 과거 강사에게 배웠던 킥의 비트들을 떠올리며 여러 영상들을 보고 있는데 이중 Katie Ledecky의 영상을 자주 보고 있다. 장거리 선수이기에 킥의 비트가 선명하게 보인다. 나 같이 발이 큰 사람이 동호인 수준에서 이 선수 정도로만 정확히 킥을 차 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다. 이 선수의 영상을 시작으로 원 비트, 투 비트, 쓰리 비트, 포 비트... 이런 식으로 킥의 리듬을 잡아갈 생각이다. 오늘 해봤더니 원 비트만으로도 앞서가는 사람과 간격이 확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긴 시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완성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며칠 전 2번 아저씨와 농담처럼 얘기했듯이 많은 청춘들이 수영장에 등록했다가 몇 개월, 심지어 한두 달 만에 그만두는 건 느는 게 더디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운동엔 일정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있다. 그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답답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요즘 같이 소위 도파민 중독이 일상인 시대에 그 시간은 정말 길다. 내게 있어 “긴” 시간과 청춘이 느끼는 “긴” 시간, 그리고 열두 살짜리 내 딸이 느끼는 “긴” 시간은 엄청 다를 것이다.
접영을 허우적대는 초급반 아가씨가 내게 비결을 물었을 때 난 이런 말을 해줬다. “아니, 벌써 접영 할 때 날아가면 우린 뭐가 돼?” 사실 비결을 알려줘도 할 수 없는 시기가 있다. 아무리 유튜브로 수영 관련 영상을 봐도 몸으로 구현해 낼 수 없는 시기가 있다. 그때까지 반복하면서, 될 때까지 하는 수밖에 없다.
수영과 비슷하게 독서도 일종의 주제를 정해놓고 읽어 나간다. 올해의 메인 테마는 들뢰즈. 그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손에 잡히는 책을 읽어나갈 생각이다. 들뢰즈의 책과 그와 그의 이론에 대해 쓴 책은 이미 제법 사 모아 놨다. 올해는 그걸 그냥 읽어나가기만 하면 된다. <니체와 철학>을 읽어나가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이 부분이 정리된 책 이것저것을 들춰보다 최근 들뢰즈의 지도 아래 박사 논문을 쓴 우노 구니이치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이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그 책에서 저자는 들뢰즈는 철학을 “이해하는 일”보다 “사용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가끔 왜 그런 책을 읽냐는 질문을 받는다. 철학이나 인문학 책을 읽어야만 하는 직업은 아니잖아, 하는 뉘앙스가 담긴 질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일반인, 소위 비전공자이자 그걸로 생계를 이어가지 않는 사람들의 인문학/철학의 독서 이유는 이론의 이해와 습득, 이를 바탕으로 한 타인 앞에서의 설명을 위해서이지 않을까? 더 폄하해서 말하면 '나도 그걸 안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고. 더 나쁘게 말하면 '나는 네가 모르는 걸 안다.'는 우월감을 얻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고.
맥주를 좋아한다고 해서 다 수제 맥주 브루어리를 차릴 필요 없듯이 철학/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철학자가 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당연히 철학자처럼 철학의 모든 이론을 섭렵하고 다 알 필요도 없고. 나 같이 맥주를 좋아하면 그저 마실 뿐이다. 좋으니까. 책도 마찬가지다. 별이 좋으면 별에 관한 것을 읽을 뿐이다. 천문학자에 대한 야망 없이도 우리는 별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도 굳이 독서의 이유를 하나 대자면... 요즘 들뢰즈뿐만 아니라 조던 피터슨의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건, 결국 인문학/철학을 읽어나간다는 건, 과거에 써진 그 생각들, 이론들을 묵묵히 읽어나간다는 건 일종의 벽돌을 만들고 모으는 거랑 비슷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과거의 생각들을 그러모아 미래에 다가올 폭풍을 견뎌낼 견고한 새 집, 이성과 사고의 집을 만드는 것, 더 나아가 그 집에 살면서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것, 그게 비전공자이자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지 않는 나 같은 이가 철학과 인문학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수영이든, 독서든 긴 호흡이 필요하다. 오늘 당장, 이번 주말, 다음 달에 어떤 변화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참고하는 것이다. 6개월, 1년, 2년 후 도래하는 변화된 나를 기다리며 묵묵히 자신을 독려하며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레데키의 원 킥이든, 들뢰즈의 철학이든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로 인해 내 삶의 작은 변화, 내 자유형의 작은 진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긴 시간, 긴 호흡이 필요하다. 인내를 가지고... 길게 내 쉬고, 길게 들이마시고.
사족....
내 글을 꾸준히 읽어 온 분이라면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우리 수영장의 오키나와 풍의 아가씨가 우리 반으로 옮겼다.
흠...뭐..그렇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