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앞뒀던 목요일, 딸은 여자가 됐다. 학교를 갔다 온 뒤 욕실에 있던 딸이 문을 살짝 열고 말했다. “어? 왜 피가 보이지.” 난 마치 코피라도 난 것처럼, 아무 일도 아니라는 투로 축하한다고 말해줬다. “이젠 집에 여자가 두 명이네.”
엄마에게 바로 전화하라고 했다. 아내는 위생 용품의 위치를 알려줬다. 마침 외부 회의에 참석한 뒤 조금 일찍 퇴근할 수 있었던 아내는 언제나 막히지만 명절 무렵엔 더 막히는 센텀 시티의 교통 혼잡을 뚫고 집에 일찍 왔다. 오자마자 아내는 내게 근처 속옷 가게의 위치를 물었고 동네 이곳저곳을 발로 누비며 다니는 나는 생각나는 몇 곳을 말해줬다. 그렇게 그 길로, 딸이 학원에 간 사이 우리는 딸의 새 속옷을 사러 나갔다.
딸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딸의 오랜 친구인 지유는 그 “사실”을 엄마만 알고 있다. 아니 엄마만 알고 있는 걸로 하고 있는지도. 아빠도, 자주 보는 양가의 할머니에게도, 공식적으론 비밀이다.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말이다.
반면 딸은 부끄러워하지도 그렇다고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성장하는 내내 그랬듯이 그 과정이 필요한 순간, 딸은 마치 이제 때가 됐어라고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 그렇게 물 흐르듯 해냈다. 이유식도, 배변 훈련도, 어린이집에 가는 것도, 혼자 옷을 입고 벗는 것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해냈고 받아들였다. 이제는 이걸 해야 해. 스스로에게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아내와 속옷을 사러 가는 길, 아내는 이제 성교육도 잘 시켜야겠다며 심난해했다. 내가 보기엔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지만 여자가 됐다는 건 그 겉모습과 상관없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게 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엄마 입장에선 그 기쁨과 함께 걱정도 되는 모양이다.
40년 넘게 겪어야 될 경험
설날, 명절이면 늘 그랬듯, 차례를 지내고 난 한가한 오후엔 처가 근처의 번화가를 간다. 장인, 장모님은 편하게 낮잠이라도 청하시라고 하고, 나와 아내, 처남과 딸은 슬슬 산책하듯 걸어서 나간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각자 필요한 것도 산다. 이번에는 아내가 휴대폰을 바꿔볼까 생각 중이어서 처남과 둘이 휴대폰 매장을 가고, 난 딸과 함께 스포츠 의류 매장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그렇게 둘이 걷는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이제 시작이네. 보자, 최소한 40년을 한다면 몇 번을 하는 거지.”, 딸은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채고 간단한 암산을 했다. “480번?”, “그렇구나. 2년만 더하면 5백 번 넘게 하는 거네.”, 그 숫자에 압도당했다. 하나의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기회가 5백 번 넘게 찾아온다는 사실에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다빈치 코드>에서 왜 그렇게 자궁이라는 기호를 신성시 여기며 그 미스터리를 차근차근 풀어갔는지 이해가 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애였던 존재 앞에 자신의 미래와 타자의 미래가 공존하기 시작했다. 그 공존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꿀 수도 있는 선택을 사이에 두고 줄타기를 하듯 이뤄질 것이다. 그 선택이 단 한 명의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여러 명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생명의 탄생을 결심했다고 해서 다 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수 백 번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동원할 수 있는 현대의학의 모든 기술을 동원해도 실패하는 사람이 있다. 간절함만큼 실망도 클 것이다.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망이다.
지금까지, 딸은 자신의 미래만 생각했다. 아마 앞으로 몇 년, 더 오랫동안 자신의 미래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때 함께 생각해야 될 타자의 미래, 미래의 타자도 있을 것이다. 오늘 존재하는 타자든, 미래에서 도래하는 타자든 딸은 거부할 수 있다. 그 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외롭겠지만 그 외로움 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선택하지 못한 미래에 미련을 두지 않을 만큼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더불어 살든, 혼자서든. 아, 그리고.... 딸이 꿈꾸는 미래에 부모라는 존재가 방해가 되지 않길 바란다. 날개가 되어주지는 못할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