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생일은 2월 말, 아내의 생일은 3월 초라 가족 여행은 그 사이에 주로 이뤄진다. 두 용띠 여자의 생일 사이는 이렇게 봄과 겨울의 경계다. 덕분에 부산 인근, 경주 등을 가면 봄기운이 물씬 나지만 좀 더 올라가면 머뭇거리며 남아 있는 겨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이번의 강원도처럼. 지난해 초여름, 미국에서 온 처제와 처남, 딸과 함께 강원도에 다녀온 아내가 다시 가고 싶다고 정한 곳이다. 난 거의 삼십몇 년 만에 가는 곳.
삼대가 덕을 쌓아야
"와~ 눈이 쌓여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막 떠날 때 눈이 왔으면 좋겠다."하고 아내와 딸이 가는 여정 중에 말을 했다. 내가 딸에게 그랬다. 그런 건 3대가 덕을 쌓아야 되는 일이다. 지리산에서 일출을 보는 거, 눈이 쌓인 한라산에 오른 뒤, 다음 날 날씨가 좋아서 바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나올 수 있는 거... 이런 거는 그야말로 크게 운이 따라줘야 되는 거라고 진지하게 말해줬다. 물론 일기예보 상으로는 그랬다. 미리 말하면, 실제로도 그랬다. 우리가 막 강릉을 빠져나왔을 때, 폭설의 서곡이 시작됐으니...
속초, 설악, 설산, 울산바위
아내가 예약한 숙소에선 눈에 덮인 울산바위가 보였다. 명색이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지만 할 수 있는 표현은 그저 동양화 같다 정도, 이십여 년 전에 가 본 삿포로가 생각난다는 정도, 각도를 잘만 잡아 찍으면 얼핏 알프스 같아 보인다 정도.... 진부하지만 뭐, 이 정도였다.
그렇게 산을 한참 보고, 숙소 근처, 찾아가기도 힘든 조용한 막국수집에서 엄청난 막국수를 먹고(범바위 막국수라는 곳인데, 나는 물막국수를, 딸과 아내는 명태비빔막국수를 시켰다. 둘 다 먹어본 결과, 꼭 명태 비빔 막국수를 시키시라. 막국수 좋아하는 감독에게 꼭 알려줘야지 하면서 먹었다), 이후 사우나에 가서 모처럼 한가하게 몸을 담그고, 언제나 그랬듯 한참을 일찍 나온 나는 로컬 맥주를 사서 숙소로 돌아가 혼자 마시며 두 여자를 기다렸다. 이날 산 맥주는 <홍천>이라는 브랜드의 IPA, 필스너를 샀는데 가격도 참아줄 만하고 맛도 괜찮았다.
강릉, 착각, 키치, 짝퉁
숙소는 행정 지역상으론 고성, 그곳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속초고 이후 고속국도를 타고 사십 분 정도 가면 바로 강릉이었다. 굽이굽이, 산 넘고 물 건너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던 시절은 진즉에 끝났던 듯. 강릉의 숙소는 싱가포르의 마리나 샌즈 베이 호텔을 흉내 내어 지은 호텔로 이름도 스카이 베이. 경포호와 경포해변을 다 볼 수 있는 곳인데. 내가 이 호텔의 모습과 위치를 보고 내린 결론은 바다와도, 호수와도 안 어울린다였다. 그야말로 풍경을 배려 버렸다.
체크 인을 하고 돌아온 아내가 한 말, 바다를 볼 수 있는 층으로 가려면 6만 원 더 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됐다고 했다고. 잘했다. 부산에서 온 사람들이 촌스럽게.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인피니티 풀 사용 안내가 보인다. 투숙객 3만 원. 여기서부터 슬슬 이 동네가 강남인가 싶었는데...
짐을 풀고, 딸과 함께 잠시 산책을 나가 경포해변을 보러 갔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어때?" 하고 물으니, "넓다."하고 한마디 한다. "휑하지?"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뭐, 그렇지 않겠나? 광안리와 해운대 해변에 비하면 경포대는 그냥 좀 해변이 넓은, 부산 인근의 송정이나 임랑 해수욕장 분위기다.
이후 호텔 편의점에 가서 강릉 맥주를 사러 갔는데 산미구엘 병맥주 정도 크기의 맥주 한 병에 8천 원이라는 가격이 붙어 있었다. 야~ 이 동네가 전체적으로 뭔가 착각들을 하고 사는구나 싶어 근처에 붙은 식당과 호텔 내 입점한 식당들의 가격표를 봤다. 회 한 접시 12만 원, 햄버거/피자에 킹크랩을 더하면 7만 원. 어허...
결국 호텔 내 치킨 집에서 치킨을 포장하고 호텔 내 캘리포니아 상회라는 이상한 이름의 상점에서 맥주를 샀다. 참고로 이 호텔 주변에 묵으시는 분들 중, 강원도 맥주를 한 번에 다 구경하고 사들이고 싶은 분은 이곳을 추천... 강릉, 홍천, 속초 맥주가 다 있다. 다른 술도.. 마치 주류 전문점에 온 듯...
그 후 테라로사 공장에도 가 보고, 다른 카페에도 가 봤는데, 이 양반들, 서울 사람들을 자주 봐서 그런지 자기들도 서울에서 속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왜 타지와 부산의 젊은 친구들이 광안리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됐다. 강릉, 특히 경포대를 중심으로 관광지의 음식과 술 문화는 그 다양성은 현저히 떨어지는데 가격은 턱 없이 일률적으로 높다. 반면 광안리는 그 반대고. 초당 순두부는 짬뽕 순두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 본연의 슴슴하고 수수한 본질을 잃은 데다가, 순두부로 우려낼 수 있는 건 다하더라. 젤라또, 푸딩, 쿠키... 적당히 해라....
그나마 전통적인 맛은 옹심이와 장칼국수였다. 아내가 찾은 곳은 남대천 옆 시장 안쪽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감자바우>. 점심땐 건물 밖까지 줄을 선다니 아침에 가시라. 전날 잔뜩 마시고 해장 삼아 장칼국수를 먹는 걸 추천한다. 우리 가족은 옹심이, 장칼국수, 감자송편, 감자전까지 다 시켰다. 아빠랑 와서 다 먹을 수 있다고 딸이 아주 좋아... 어차피 감자전은 지가 다 먹어 놓고. 옆 테이블에 앉았던 여리여리한 두 아가씨가 감자전을 남기고 가는 걸 보고 딸이 충격을 받았을 정도로... 추천.
커피, 현대미술.... 그리고 라거
강릉이 커피로 유명한 건 뭐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나도 아내 따라 그 유명한 테라로사 본점에 갔다. 부산 사람들은 수영구에 있는 F1963(분위기도, 맛도 당연히 비슷하다)에서 만날 수 있는 데 굳이? 그러나 가자면 가야 한다. 우린 비 오는 오전, 좀 이른 시간에 가서 한가했다. 커피 맛? 좋다고 믿어야지. 가격이 그러면.
하슬라 아트/피노키오 박물관은 가볼 만하다. 건축 공법이 특이하고 내부 공간의 배치가 절묘하다. 그 공간을 이동하는 거 자체가 일종의 행위 예술이자 현대 미술 아닐까? 게다가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곳도 수두룩하고. 심지어 어떻게 찍으라는 설명까지 친절하게 있다. 전체를 다 둘러보는데 대략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돈도 시간도 아깝지 않다. 감성이 풍부한 딸과 함께라면 꼭.
집에 오는 길, 폭설의 전조가 되는 눈발을 가르며 강릉에서 멀어지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왜 이 동네 로컬 맥주에는 라거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 첫 번째 든 생각이었다. 인근 편의점 등에서 파는 홍천, 강릉, 속초의 로컬 맥주에는 담담한 라거가 없었다.
사실 다른 지역 로컬 맥주에도 라거는 흔치 않다. 에일과 필스너, 바이젠이 주를 이루고 가끔 스타우트와 앰버 라거나 페일 라거가 있곤 한다. 그야말로 깨끗하고 순수한 라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럴까? 우리는 평소엔 라거를 많이 마신다.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일본 맥주들은 라거 계열이고 버드와이저, 밀러, 하이네켄, 카스, 하이트, 오비, 켈리 등도 다 라거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이 라거들의 맛 차이를 알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그냥 마시는 거지 뭐.
이렇게 그게 그거인 라거를 주로 마시다가 낯선 도시에서 다른 종류의 맥주를 마시면 무지하게 새롭게 느껴진다. 여행지가 선사하는 약간의 흥분, 일반 맥주보다 두세 배 비싼 가격, 특이한 포장, 독특한 이름. 함께하는 좋은 사람. 콸콸콸 마시면, 야~ 역시 로컬 맥주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그런데 정말 다를까?
난 궁금해서, 숙소에서 강릉과 속초의 로컬 맥주, 특히 내가 좋아하는 IPA를 마신 후, 잠시 후 내려가서 구스 아일랜드의 IPA를 사 와 마셔봤다. 별 차이 없다. 그런 맥락에서 <제주 에일>이나 진달래 향이 은은하게 나는 <남산>의 맛은 탁월하다.
앞서 말했듯 커피도 마찬가지 아닐까? 원두가 어떻고 저떻고 하지만 일반인이 그 차이를 감지해 내는 건 쉽지 않다. 어지간한 주당 아니면 막걸리 브랜드 간의 맛의 차이를 아는 게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막걸리에 밤도 넣고, 쑥도 넣고 하는 게 아니겠나. 커피 안엔? 커피엔 분위기를 넣지. 아, 물론 아주 가끔 "야~ 이 커피 좋은데."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동네엔 <가배향화>라는 곳이 있다. 이 집, 커피에 진심인데, 주인장이 재야의 고수로 어디 시골에서 카페를 하다 딸의 성화에 못 이겨 도심으로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좀 작고 시끄러워서 자주 안 가지만 커피 맛은 장난 아니다. 지금 강릉까지 가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 분이 있다면... 혹시 부산 분이라면 이곳을 추천한다.
사족
울산바위가 보이는 숙소는 소노캄인가 문인가 그랬다. 울산바위가 보이는 숙소를 예약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아 물론... 그런다고 다 울산바위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우리도 다음 날 짙은 안개 때문에 아침나절엔 여기가 어딘가 싶었으니까. 그러나 조금 인내심을 가지면 구름을 휘감고 있는, 구름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울산바위를 볼 수 있다.
아무리 비가 와도 그렇지. 우리가 갔을 땐, 오죽헌과 시립박물관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강릉의 숙소에서 잠들었던 새벽, 특이한 꿈을 꿨다. 비행기 통로를 사이에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 부부와 그의 지인이자 나도 알고 있는(물론 꿈속에서) 작가를 만난 것. 난 무라카미 하루키와 악수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아, 전 당신의 단편을 거의 단 읽었고(이 부분에서 부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에세이는 거의 다 갖고 있습니다. 옆에 분의 에세이도 말할 것도 없죠. 그러니까...", 이름이 생각이 안 나 잠시 망설이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친절하게 그 작가의 이름도 말해줬다. "아하. 그렇죠. 실례했습니다. 여하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하고 말한 뒤 재차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무라카미 하루키와 악수를 했다. 마침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중이었는데 먼저 내릴 준비를 끝낸 딸이 앞서 나가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돌아볼 때, 꿈에서 깼다. 꿈속에서도, '야, 나 참 영어 못한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으로 향하던 길, 잠시 쉬기 위해 울진에서 잠깐 빠졌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이 엔젤리너스였다. 아내가 결제 앱 때문에 점원과 잠시 얘기를 하는데 "여기 엔젤리너스 하나거든요." 하는 말을 아내는 엔젤리너스 울진 하나점으로 해석했다. 설마 울진에 하나뿐이랴 싶었던 것. 그러나 진짜 하나뿐이었다.
다시 올라간 국도에서 아내와 이런 말을 나눴다. 요즘 시장분석, 지역 분석을 가장 살벌하게 하는 친구들이 아마 프랜차이즈 카페인 것 같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냉정한 애들이 알라딘 중고서점 아닐까? 참고로 수도권을 제외하면 스물세 곳이 있는데 전북엔 전주 한 곳, 충남엔 천안 한 곳, 충북엔 청주 한 곳이다. 부산엔 여섯, 대구엔 셋, 창원은 둘, 울산은 하나다. 단순한 인구수의 문제만은 아닌 듯. 경북, 경남, 강원도엔 한 곳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