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배어야 하는 기본들

12월 둘째 주 -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by 최영훈

은채를 두 시에 데리러 가기로 했습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함께 한 동료들 - 서감독과 작가인 아빠, 그리고 함께 사무실을 쓰면서 SNS 마케팅도 함께 고민하는 이실장-과 울산에서 연말 회식 겸 조촐한 종무식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죠. 은채를 봐 줄 사람이 없어서 은채를 두 시에 데리고 나와서 해운대 장산의 엄마 병원에 데려다 주고 전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넘어 가기로 했습니다. 울산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네 시쯤이었으니까 최소한 세시에는 장산에서 버스를 타야 했죠. 은채를 두시에 픽업하면 장산까지는 지하철로 30분도 안 걸리니 계산이 서는 시간이었습니다.


열두시에 돌봄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습니다.

‘오늘 은채랑 병원에 가야 해서 두시에 데리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두 시 오 분 전에 다시 문자를 보냈습니다.

‘은채 내 보내 주세요.’

두 시가 됐는데도 은채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돌봄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여기지 않고 이런저런 말썽을 부리는 녀석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여간해선 전화를 안 해 왔습니다. 애들 돌보기에도 바쁜데 전화까지 응대하는 건 나름 스트레스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죠. 그렇게 한 십분 쯤 기다렸습니다. 은채는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결국 오 분을 더 기다리다 전화를 했습니다.

“네, 은채 지금 가야하나요? 은채 지금 종이접기 하러 다른 교실 갔는데 준비해서 보내겠습니다.”


솔직히 살짝 화가 났습니다. 행여나 두 시에 데려가려 한다는 이유를 가벼이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병원 진료”를 이유로 내세워서 12시 쯤 문자를 보냈고, 이어서 두 시 십분 전에 문자를 보냈는데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선생님에게 말이죠. 게다가 아침에도 두 시에 데려가겠다고 거듭 약속에 약속을 해 놓고선 자기 돌봄 교실에서 기다리지 않고 다른 돌봄 교실으로 아무 생각 없이 종이 접기를 하러 간 은채한테도 살짝 화가 났죠.


은채는 두 시 20십 분 후문으로 나왔습니다.

“아빠, 나 오늘도 받아쓰기 백점 맞았어.”

“응. 은채. 잘했어. 수고 했어.” 전 꼭 수고했다는 말을 빼 놓지 않습니다. 나름 애써가며 문장을 외웠고, 띄어쓰기 안 틀리려고 몇 번씩 지웠다 썼다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니까요.


“은채 오늘 몇 시에 만나기로 했어?”

그러나 해야 될 말은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광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아니 회사 다니는 거의 모든 분들이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카피라이터 일을 하면서부터는 늘 데드라인에 쫓겼고, AE들의 미팅 날짜에 맞추기 위해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백지와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곤 했었습니다. 고스트 라이터로 몇 백 페이지 넘어가는 백서나 기업 사사(社史), 자서전 등을 대필할 때는 늘 빠듯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 하루에 대 여섯 시간씩 타이핑을 하곤 했었죠. 그래서 누군가 나와 우리 팀의 시간을 가벼이 여기면 화가 나곤 하죠.


“지금 몇 시야?”

은채는 말이 없었습니다.

“두 시 이십 분이야. 돌봄 1교시가 끝나면 한 시 오십분이지?”

“응.”

“그럼 아빠 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려야지 다른 수업하겠다고 다른 교실로 가면 어떻게 해. 전화도 안 받고.”

은채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리고 벌컥 화를 냈습니다.

“아니 왜~.”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긴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습니다.


“네가 왜 화를 내. 네가 예쁘고 공부 잘하는 거랑 시간 약속 잘 지키는 거랑은 별개야. 아빠가 두 시에 데리러 간다고 했으면 기다려야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가면 어떻게 해. 네가 그러는 바람에 엄마도 기다리고 아빠도 약속 시간에 늦는 거잖아.”

은채는 아빠 말이 맞는 건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서운한 게 분명했습니다. 받아쓰기도 백점 맞고, 아빠가 데리러 와서 정말 좋은데 좀 늦었다고 이렇게 야단을 맞아야 하나 싶었을 겁니다.


은채는 초등학교 들어 간 이후로 유독 지적당하는 걸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한테 연필 잡는 것 때문에 지적도 많아 당했지만 결국 버티고 반항하다 여러 번 혼났죠. o을 쓸 때 반 시계 방향으로 써라, 9는 반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린 다음에 밑으로 선이 내려 와라 등과 같이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이빨 닦기, 손 씻기, 양말 신기 등 생활 전반에 걸쳐서 여전히 잔소리를 해야 겨우겨우 하는 것들이 있고, 제대로 하는 것들이 있죠.


하지만 은채는 그런 것들을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또 어떤 일들은 받아쓰기를 비롯한 학교생활 전반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말이죠. 그러나 은채 외삼촌도, 군 생활을 오래하신 외할아버지도, 한 직장에서 큰 탈 없이 무려 이십 오년을 근무한 엄마도 기본을 아주 중시하는 사람들이죠. 비교적 자유로운 영혼인 아빠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말이죠. 아마 은채한테는 이런 엄격하고 기본에 충실하고 성실한 성향과 아빠의 적당히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성향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굴 닮았다고 어느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은채의 외모처럼 말입니다.


은채가 크면서 은채가 성취해낸 많은 성과에 대한 칭찬과 함께 지켜나가야 될 기본에 대한 지적과 교육도 꾸준히 병행되고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 TV를 보지 않는 거, 스마트 폰 게임은 저녁 때 잠시 하는 거, 아침에 일어나서 등교 준비 하는 거, 글자와 숫자를 똑바로 쓰는 거, 어른들한테 바른말 높임말 제대로 쓰는 거, 숙제 시작하기 전에 공부 책상 깨끗하게 치우는 거 등 크면 클수록 지켜야 할 규칙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지는 않았죠. 덕분에 은채는 다른 학부모들이 부러워하는 소녀가 됐고, 은채가 듣는데서 어린이집 선생님과 학교 선생님, 친구 부모님 등의 칭찬이 오가다 보니 제깐에는 이만하면 됐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아빠도 뭐 그 정도 흠은 인간적이지 않나 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어떤 기본들은 평생 가는 것들이죠. 아마 저 같은 악필은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이 없었으면 글 써서 먹고 살기 힘들었을 겁니다. 아침에 밥 대신 커피만 마시는 습관도 오래된 것들이고요. 엄마는 은채가 아침마다 제대로 차려진 밥을 먹고 가고, 글씨를 예쁘게 쓰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루의 기본, 공부의 기본으로 생각하며 성장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렇고요. 그런데 그 기본을 몸에 배게 하는 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힘든 일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됩니다.


부모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하고 반찬을 해서 차려줘야 하죠. 아빠는 안 먹어도 갓 지은 밥을 좋아하시는 따님을 위해서 밥을 얹히고 달걀 프라이라도 해서 아침상을 차려줘야 합니다. 저녁 먹을 때는 생생 정보통이나 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야합니다. 매일 보는 사이더라도 저녁 밥 먹을 때는 이런저런 얘기를 해야 밥 먹을 때 TV를 안 보는 것이 의미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은채한테 이런저런 질문을 합니다. 하다못해 점심 급식 식단에 대해서라도 묻습니다. 워낙에 맛있다고 소문난 식단이니 말이죠.

일상의 사소한 규칙들을 부모와 함께 만들고 지켜나가야 은채도 그걸 지키는 성인으로 큰다는 걸, 그야말로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의 무게를, 요즘 새삼스레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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