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채의 첫사랑(?)

12월 둘째 주 - 사람을 만나며 큰다.

by 최영훈

은채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습니다.

뭐 워낙에 어린이집 때부터 남자 문제(?)가 복잡했던 아가씨라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은채가 처음 좋아한 남자 친구는 승유입니다. 위로 누나가 둘이 있어서 또래 남자 애들보다 말도 빠르고 센스도 넘쳤죠. 그래서 승유도 은채를 좋아했습니다. 승유는 선생님한테 “선생님, 은채랑 얘기하면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할 정도로 은채와 엄청나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아무래도 터울이 많이 나는 누나들과 대화하던 승유로서는 어휘력이 부족한 다른 애들보다 그나마 조금 언어 능력이 발달한 은채가 대화상대로는 좋았던 모양입니다.


승유는 외모도 곱상했습니다.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에 쌍꺼풀 없는 눈, 얇은 입술, 오뚝한 코, 파마머리에 귀한 아들인지라 옷도 항상 깔끔하게 입고 왔습니다. 또 반죽도 좋아서 제가 은채를 데리러 가면 자기가 먼저 나와서 인사하고 “어! 은채 아빠다. 잠시 만요.”하고 은채를 부르러 가곤 했습니다. 우리 집과 좀 멀어서 승유가 다른 초등학교 -라고 해 봤자 우리 집에서 걸어서 오 분도 안 걸리지만 - 로 배정 됐다는 걸 알았을 때 은채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승유 얘기는 학교 다니면서도 종종 했죠.


다른 남자라면 역시 이웃의 재하를 빼 놓을 수 없죠. 재하는 전형적인 경상도 싸나이인데 위로 두 살 많은 형님이 있습니다. 이 형제는 얼굴도 비슷하게 생긴데다가 옷도, 가방도, 심지어 헤어스타일도 비슷하게 하고 다녀서 키까지 비슷하면 쌍둥이라고 해도 다들 속을 겁니다.


재하는 은채가 다녔던 어린이집을 세 살 때부터 다닌 친구입니다. 아들 근육은 어떤지 궁금해서 한번 어깨랑 팔을 만져본 적이 있는데 슬쩍 만져 봐도 딴딴한 게 느껴지는 당찬 소년이었죠. 이 친구는 은채한테 이러쿵저러쿵 표현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툭툭 감정을 던질 뿐이었죠.


한번은 은채를 데리러 갔을 때 재하 엄마와 마주쳤습니다. 재하도 하원 준비를 위해 안에서 가방을 챙기고 옷을 챙겨 입고 있었죠. 그러다 저를 딱 보더니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은채 신발을 들고 와서 현관 앞에 놔두고 말없이 자기 할 일을 계속했습니다. 재하 엄마는 깔깔 웃으면서 “재하가 원래 이런 스타일이예요. 집에서도 말없이 엄마 무지하게 챙겨요.” 요즘 말로 츤데레 스타일. 은채는 현관에 자기 신발이 놓인 걸 보고 재하를 돌아 봤지만 재하는 모른 척했습니다. 이 모른 척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지금도 계속 되고 있죠. 오히려 요즘엔 재하의 형님이 은채한테 적극적이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엄마는 중학교 시절부터 남자들이 집에까지 따라왔다면서 은채의 인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지만 아빠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기도 하고 앞날이 걱정되기도 했죠. 그러나 학교 다니는 내내 남자 친구가 생겼네, 누가 날 좋아하네, 이런 말은 들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11월에 다시 짝을 바꿨는데 그게 바로 지승이었죠. 처음엔 시큰둥했습니다. 은채는 건휘라는 친구와 늘 짝이 되고 싶어 했거든요. 은채와 엄마의 말을 종합해 보면 건휘는 소위 우리 어릴 적 모범생, 문학소년 같은 타입인 것 같습니다. <효리네 민박>에서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는 박보검 같은? 어찌됐든 건휘는 약간 어수룩해 보일 때도 있지만 얌전하고 똑똑해서 여자 친구들이 다 짝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짝 배치 전략상 - 약간 산만하거나 수업에 열의가 없는 남자 친구들은 야무진 여학생들에게 관리를 맡기는 게 선생님의 학기 초 전략이셨죠. -학기 내내 당연히 건휘랑 짝이 될 수 없었죠. 그래서 지승이하고 짝이 됐을 때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을 지내면서 지승이가 매력 발산을 한 모양입니다. 은채 말로는 지승이가 “공부도 잘 하고, 운동 신경도 좋고, 귀엽고 재미있는” 친구라고 합니다. 은채랑 지승이가 쉬는 시간마다 꽁냥꽁냥 대는 걸 보고 반 친구들도 둘이 커플이라고 수근 댄다고, 은채는 자랑인지 불평인지 모를 말투로 저에게 하소연 했습니다.


지승이는 은채가 첫사랑인 듯합니다. 멘트 하나하나가 절절하더군요. 지승이한테 스티커 하나를 선물 받은 은채가 “난 무슨 선물을 줄까?” 물었더니 “네가 주는 거라면 다 받을 거야.”라고 했다더군요. 하~. 게다가 내년, 2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게 해달라고 밤마다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덕분에 은채는 승유를 이제 거의 잊었다고 하더군요. 이 커플이 슬슬 나름의 스킨십도 하나 봅니다. 얼마 전에는 지승이가 자기 귀 밑 머리를 넘겨줘서 심쿵 했다고 아빠 염장을 지르더니, 어제는 자기가 지승이를 안아주고, 심지어 커플 댄스도 췄다고 자랑하더군요. 흠~.


학년 초에 이름이 같은 민서 커플이 있었습니다. 둘이 짝이 됐는데 사귀기까지 했다더군요. 여자 민서가 남자 민서의 손을 꼭 잡고 운동장을 도는 - 은채네 학교는 아침마다 운동장 걷기 운동을 합니다. - 장면이 수도 없이 목격 됐다고 합니다. 교실에서도 둘이 손잡고 꽁냥 대고 말이죠. 물론 그 커플은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갔다고 합니다만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신기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에게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학년별로 좋아했던 여자 친구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죠. 선미, 경이, 선희, 등등. 그래서 불쑥 제가 살던 도시가 방송에 나오면 그 초등학교들과 함께 그 소녀들의 이름, 함께 했던 추억들이 어제 일처럼 떠올려지곤 하죠. 은채도 이런 추억들을 하나 둘씩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겠죠.


엄마는 어제 은채가 지승이를 안아 줬다고 하니까 내년부터는 은채 성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켜야겠다고 합니다. 1학년 애들끼리 어설프게 포옹하는 것 갖고 좀 앞서가는가 싶기도 하지만 최근 동년배간의 어린이집 성추행 사건 기사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학년 초에 은채를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초등학교 5, 6학년만 되도 외형적으로는 여대생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2차 성징이 일찍 시작되는 아이들은 이 무렵 시작되니 키는 이미 160cm가 넘고 옷 사이즈도 성인과 같죠. 또 조숙한 아이들은 어린이처럼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아이돌처럼 옷을 입기 때문에 딸 가진 아빠 입장에서는 정말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는 이미 1학년 때부터 철저히 성교육을 시킵니다. 성추행의 개념을 정확히 가르쳐주고, 자기 몸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철저히 가르칩니다. 그리고 언어폭력, 신체적 폭력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가르쳐주죠. 그래서 자기들끼리도 지금 방금 한 말이나 행동이 폭력인지 아닌지 왈가왈부하며 논쟁할 정도죠. 이런 교육은 학년이 올라 갈수록 강화 될 테고, 관련사건 보도로 사회가 시끄러울 때마다 교육 내용과 시간은 추가 될 겁니다. 그래서 사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면 엄마 아빠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아이들이 성이나 폭력에 대해서 무지하지는 않죠.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하는 게 문제겠죠.


은채에 대여섯 살 부터 꾸준히 가르친 것이 자기와 다른 친구를 쉽게 비판하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은채의 어린이집에는 몸이 좀 불편한 친구가 있었는데 은채가 그 친구 걸음걸이를 집에서 흉내 냈습니다. 애들은 그런 게 상처가 되는 지도 모르고 어린이집에서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우리 부부는 야단치지 않고 차분하게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선생님한테 문자를 보내서 은채가 또 그러면 안 된다고 엄하게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드렸죠. 어린이집 은채 네 반에서는 당연하게 그 친구까지 포함시켜 발표회 준비를 시켰고 그 과정에서 조금 더 건강한 친구들이 그 친구를 도와주는 법을 배우게 했죠.


학교에서도 발달이 조금 느린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학년 초부터 이런저런 실수를 해서 엄마가 학교에 오시곤 했나 봅니다. 은채와 친구들이 쉬는 시간이 끝났는데도 교실로 안 들어오는 그 친구를 선생님의 부탁으로 찾아 나선 적도 있었고요. 그러나 그 친구도 학교에 잘 적응해서 학예회 때는 함께 율동을 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학교까지, 선생님들이 가장 신경 쓰는 교육 중 하나가 어쩌면 인권 교육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타인의 소중함도 함께 인식하는 교육이죠. 이게 제대로 되면 사실 왕따, 학교 폭력, 성 폭력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친구를 친구로 보지 않고 경쟁상대로 보게 되니 당연히 친구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줄어들게 되겠죠. 학업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인권 관련 교육은 줄어 들 테고 말이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이들의 신체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에 대한 철학은 점점 감소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은채의 첫사랑(?)을 보면서 전 은채가 다른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오래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나와 다른 성격, 다른 삶, 다른 피부,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그야말로 진정한 세계인으로, 똘레랑스를 실천하는 품위 있는 인간으로 성장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열흘 쯤 뒤에 은채는 지승이와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술래잡기를 하는데 지승이가 술래잡기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남자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서 은채를 비롯한 쫓기는 여자 친구들을 잡게 했던 모양입니다. 화가 난 은채는 “이제 헤어져.”라고 버럭 했다더군요.

“그래서, 이제 안 놀아?” 같은 모듬인 줄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하는 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아. 투명인간처럼 생각하고 같이 놀아.”

“응? 뭔 소리야.”

“그냥 안 보이는 것처럼 한다고. 그래서 애들한테 야 내 눈엔 투명인간이 보여 난 유령을 볼 수 있나봐 그래.”

이후로도 서로를 투명인간씨라고 부르며 논답니다.

헤어진 건지 안 헤어진 건지, 당최 사귀기는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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