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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30. 2024

내 청춘의 프랑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29

고엽(Les Feuilles Mortes)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아, 난 당신이 정말 기억해 주길 바라요.

우리가 연인이었던 그 행복했던 나날들.

그때, 삶은 더 아름다웠고

태양은 오늘보다 더 찬란하게 빛났었죠.

낙엽이 많이 쌓여 있군요.

봐요, 난 아직 잊지 않았어요.

낙엽이 많이 쌓여 있어요.

추억들과 후회들도 함께,

그리운 북풍은 그것들을 실어가죠,

차가운 무관심의 밤으로.

봐요 전 아직 잊지 않았어요.

당신이 내게 불러주곤 했던 그 노래를.     

이 노래는 우리를 닮았어요.

당신, 당신은 날 사랑했고 난 당신을 사랑했죠.

우리 둘은 삶을 함께 했죠.

날 사랑하는 당신, 당신을 사랑하는 나.

하지만 삶은 서로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았죠.

너무나도 천천히, 아무 소리도 없이.

바다는 모래 위를 지우네요.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취를.     


고엽, 낙엽, 가을

고엽(Les Feuilles Mortes)은 이브 몽땅의 노래다. 알아보니 발레를 위해 만든 음악에 자크 프레베르가 가사를 붙였다고 한다. 이브 몽땅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에서 이 노래를 불렀는데, 영화는 요즘 말로 폭망했지만 이 노래만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했다고 한다.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 노래가 좋아진 건 냇 킹 콜의 버전을 들은 후부터다. 이십 초중반쯤이었으려나? 재즈에 잠시 심취했을 때, 재즈에 입문한 초심자들이 다들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보컬 재즈부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냇 킹 콜이었을 것이다. 물론 <Autumn Leaves>가 최애곡은 아니다. <It’s Only a Paper Moon>도 좋고, 케네디 대통령이 좋아했다는 <Orange Coloured Sky>도 좋다. 첫마디로 사로잡는 파워로는 당연히 <For Sentimental Reasons>가 최고이고 <Mona Lisa>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언어는 스페인어다. 영화 <화양연화>에 삽입된 그의 노래는 스페인어로 부른 <Quizás, Quizás, Quizás>였으니 말이다.      


다시, 고엽(Les Feuilles Mortes)으로 돌아가자. 영어 제목보다 프랑스어 제목이 더 처연하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죽은 잎이라는 뜻이니. 낙엽(落葉)이라는 말보다 고엽(枯葉)이라는 말이 더 처연한 것처럼.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작은 광장의 벤치에

어떤 사람이 앉아

사람이 지나가면 부른다

그는 외알 안경과 낡은 회색 양복 차림으로

가느다란 잎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

그리고 사람이 지나가면 부른다

아니 그냥 손짓을 해 보인다

그를 쳐다보면 안 된다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가 보이지도 않는 양

그냥 지나쳐야 한다

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걸음을 재촉하며 지나쳐야 한다

혹 당신이 그를 쳐다본다면

혹 당신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면

그가 당신에게 손짓을 할 터이니

당신은 그의 곁에 가 있을 수밖에

그러면 그는 당신을 쳐다보고 미소 짓고

당신은 참담하게 괴로워지고

그 사람은 계속 웃기만 하고

당신도 똑같은 미소로 웃음 짓고

미소를 지을수록 당신의 고통은

더욱 참담해지고

고통이 더할수록

더욱 어쩔 수 없이 웃게 되고

당신은 거기

벤치 위에

미소 지으며

꼼짝 못 한 채 앉아만 있다

바로 곁에는 아이들이 놀고

행인들

조용히 지나가고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고

당신은 거기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다

당신은 안다 당신은 안다

이제 다시는 저 아이들처럼

놀 수 없음을

이제 다시는 저 행인들처럼

조용히 지나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이제 다시는 저 새들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프렌치

돌이켜보면 프랑스는 일본보다 더 일찍 문화적으로 말을 걸었다. 난해한 프랑스 인문학 이론으로 말을 걸기 훨씬 전인 필자의 십 대 시절, 이미 시와 소설로 말을 걸었고 그 뒤로는 영화로 말을 걸었다. 중학교 시절엔 포켓 사이즈의 책이 유행했었다. 시집에도 그런 것이 있었는데 그 안엔 프랑스 시인들의 시들이 차곡차곡 실려 있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라고 노래했던 아폴리네르도, 나에게 서른몇 살까지 사는 삶이 멋진 삶이라는 환상을 심어준 랭보도, <악의 꽃>과 <앨버트로스>의 보들레르도, 말레리와 베를렌느와 프랑시스 잠도 다 프랑스가 내게 보내준 시인이었다. 그뿐인가. 이십 대를 사로잡았던 카뮈도, 십 대 후반의 나를 불러 세웠던 생 텍쥐베리도 다 프랑스 사람 아니던가.      


프랑스 와인이 한국에서 일상이 되기 훨씬 전, 90년대, 그들의 문화는 내게 일상이었다. 레오 까락스의 영화에 열광했고 쥴리엣 비노쉬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이자벨 아자니와 뱅상 카셀은 가장 사랑하던 배우였고 모니카 벨루치는 지금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꼽는 유일한 여배우다. <암흑가의 두 사람>과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와 같은 프렌치 누아르를 장식했던 알랭 들롱의 차가운 턱 선과 장 폴 벨몽도의 거친 남성미도 빼놓을 수 없다. 샹송의 시대를 넘어 프랑스 뮤지션의 새로운 챕터를 보여준 파트리샤 카스와 패트릭 브뤼엘, 로랑 불지도 내 청춘을 장식했던 프렌치였다.


덕분에 손해를 본 적도 있다. 패트릭 브뤼엘의 노래를 알아듣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교양 불어를 수강 신청했다. 어디 불어가 그렇게 만만한 언어던가. 두 학기 연속으로 C를 맞았다. 뭐, 그래도 불어라는 단어의 오묘함은 알게 됐으니 그럭저럭 "교양"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덕분에 손해를 본 적도 있다. 패트릭 브뤼엘의 노래를 알아듣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교양 불어를 수강 신청했다. 어디 불어가 그렇게 만만한 언어던가. 두 학기 연속으로 C를 맞았다. 뭐, 그래도 불어라는 단어의 오묘함은 알게 됐으니 그럭저럭 "교양"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내 사랑 그대를 위해

  

새시장에 갔었지

나는 새들을 샀지

내 사랑 그대를 위해

꽃시장에 갔었지

그리고 꽃을 샀지

내 사랑 그대를 위해

철물시장에 갔었지

그리고 쇠사슬을 샀지

무거운 쇠사슬을

내 사랑

그대를 위해

그다음 노예시장에 갔었지

그리고 널 찾아다녔지

하지만 난 너를 찾지 못했네

내 사랑이여     


담백한 프랑스의 맛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했던 프랑스의 것들은 프랑스 이론들보다 심플하고 직선적이었다. 파트리샤 카스도, 패트릭 브뤼엘도 거칠었다. 레오 까락스의 영화도, 뱅상 카셀도, <니키타>와 <베티블루 37.2>도, 심지어 <레옹>조차...


프레베르의 시도 그런 매력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수많은 프랑스 시인들과는 달리 담담하고 일상적이다. 마치 레이먼드 카버나 메리 올리버 같은 느낌이다. 풍경으로부터 한걸음 멀찍이, 감정으로부터 한 뼘 떨어진. 복잡한 미사여구 없이도, 난해한 문장과 이론 없이도 삶과 사랑의 진실은 담아낼 수 있다.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속에 담긴 노년의 풍경이 흑백으로 찍은 보도 사진처럼 다가오는 건 담백한 단어가 가진 힘, 노년의 회한이 담긴 찰나를 여과 없이 보여준 그 단어의 힘 때문일 것이다.      


일상은 단조롭다. 그 단조로움을 다르게 보면 다큐멘터리가 되고 새롭게 보면 예술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의미를 만드는 것은 함께 보는 사람이다. 만들어진 것, 담아낸 그것을 보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사람의 몫이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좋은 시란 어쩌면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것인지도. 그저 보여줄 뿐, 다르게, 새롭게 보여줄 뿐 가타부타 뭐라 부연하지 않는 것. 단어들의 맞물림을 통해 익숙한 단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더 나아가 일상에, 인생에, 그리고 그 흔한 사랑에 새로운 해석과 의미의 생명을 불어넣는 것, 그런 것이 좋은 시가 아닐까?


어느 하루

화요일, 작업실에 출근하는 날, 감독은 전날 전화해서 새로운 미팅이 잡혔다면서 태화강역으로 날 태우러 온다고 했다. 미팅 장소는 울산 시청. 전화를 통해 들은 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우리가 이전에 만들었던 시 홍보 영상을 1분 분량으로 줄이고 싶다는 것.


막상 미팅을 하니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부시장이 로마에 가서 국제기구와의 협력에 대한 공로로 시를 대표하여 상을 받는 데 그 자리에 시를 홍보하는 영상을 틀어야만 했던 것이다. 딱 그 분량의 영상이 없다는 걸, 그것도 그 국제기구의 내용도 약간은 추가된 영상이 있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파악했고 우리에게 당신들이 만든 영상을 1분짜리로 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문제는 데드라인. 이 영상은 5월 31일까지 나와야 했다. 담당자 세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를 봤다. 내가 교통정리를 했다. 기존 시나리오에서 꼭 들어가야 될 내용을 추리고, 국제기구 관련 내용은 오후에 내게 보내주면 그걸 윤문하여 합해, 1분 분량의 시나리오를 만들기로 했다. 시나리오 확정은 미팅 당일 끝나야만 감독에게 시간적 여유가 더 생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의 담당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미팅은 끝났다.    

  

점심을 먹고, 감독은 조감독과 함께 예정된 촬영을 위해 작업실을 나섰고 난 이 작업을 위해 하루치 두뇌의 에너지를 몰아 쓰면서 오후를 보냈다. 평소라면 하루에 한 통 하지 않았을 전화 통화를 몇 통하고, 평소라면 한 달에 두세 번 보낼까 말까 한 메일도 몇 통 보내면서.     


시나리오가 확정된 후, 오후 네 시가 안 된 시간, 공복감이 밀려왔다. ‘아, 우린 왜 점심으로 밀면을 먹었을까?’, 감독과 조감독은 비빔 곱빼기를 먹었지만, 그래도 다 꺼졌을 것이다. 작업실에 있던 비스킷을 먹었다. 감독이 마시는 인스턴트 에스프레소도 한 잔 만들었다. 너무 써서 커피는 반잔도 못 마시고 버렸다.      


미팅을 할 때, 긴박한 데드라인을 들으면 스트레스가 올라온다. 일전에도 썼지만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쓴 카피는 두 시간 만에 쓴 카피였다. 당시 유행하던 “악극” 홍보를 위한 라디오 광고 카피였다. 당시 다니던 대행사엔 라디오 광고 녹음실이 있었는데 성우와의 예약이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카피 오더가 떨어졌었다. 그런데 그때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시간에 쫓기면서도, 그 때문에 스트레스가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쾌감도 느껴졌다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이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다들 나만 바라보고 있다. 이 자명한 사실이 주는 무게와 책임감과 절박함, 고독감, 외로움은 카피라이터만 느낄 수 있는 것이란 걸 실감했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데드라인이 주는 스트레스는 그 강도에 걸맞은 쾌감을 항상 같이 줬다.      


퇴근을 앞두고 다음 달 촬영할 공공 캠페인의 세부 콘티 회의를 했다. 인물 설정과 그에 맞는 의상을 체크했다. 후보가 되는 모델의 이미지도 함께 점검했다. 여섯 시가 좀 넘은 시간, 작업실을 나올 때까지 머리를 계속 굴렸다. 총선이 끝난 후, 우리는 이렇게 작년보다 더 뜨거운 여름이 되리라는 예감 속에, 잘 굴러가지 않는 몸과 머리를 전력을 다해 굴리고 있다.       


늦게 나왔는데, 서점에 들르고 싶었다. 알라딘 울산점에 끌리는 책 몇 권이 있었다. 태화강역, 몇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서점을 들어가 사려던 책을 골랐다. 애초엔 한 권만 사려 했으나 이날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해결되지 않은 공복감 때문인지 세 권을 다 샀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세 권 중 두 권은 <좋은 생각> 같은 잡지처럼 얇고 작았다는 것. 한 권은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나머지 한 권은 레몽 아롱의 <자유와 평등>이다. 두 권 다 강연을 옮긴 것인데 전작은 예전부터 궁금했었지만 후자는 충동구매다. 마지막 강연이라는 말엔 독자를 끄는 힘이 있으니까.


부피가 조금 있는 책은 <라이팅 : 정신분석과 문학>이다. 무의식의 저널 Umbro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시리즈 중 두 권을 갖고 있어서, 또 일(이 또한 글을 쓰는 일이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왜 다른 글,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그것도 돈이 되지도 않고 몇 명이나 읽는지도 모르는 글을 쓰면서 풀까 하는 의문의 답도 찾아보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명분을 내세워 샀다.      


앞서 말했듯, 내게 프랑스 이론이 오기 훨씬 전 프랑스 문학과 문화가 왔었다. 문학과 문화와의 사이가 좀 멀어진 지금, 그 틈바구니에 이렇게 책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언제 읽을까? 책이 그나마 음식의 충동구매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지금 당장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음식보다 유통기한이 훨씬 길다는 거 아닐까?



동네에 있는 중고서점을 들렀다가 불쑥 시집 코너를 서성였다.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코너를. 그렇게 둘러보는데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빼서 봤다. 시인이 낯설다. 소개를 보니 <고엽>의 작사가라고 한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을 난 몰랐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파라락 넘겨 몇 편을 읽었다. 내가 알던 프랑스 시인들하곤 다르다 싶었다.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담백했다. 그렇게 이 유명한 프레베르를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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