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에도 치자 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 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 가끔 …… 전기가 …… 나가도 …… 좋았다 …… 우리는 ……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시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 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 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돌아보면 어린 시절엔 쉬운 계절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에겐 견딜만한 계절이란 없다. 여름과 겨울이 가장 힘들지만 봄과 가을이라고 해서 만만한 것은 아니다. 작은 단칸방에서 꽃구경과 단풍놀이 소식을 뉴스로 접하며 계절을 났다. 언젠가 말했듯이, 벚꽃을 보고 감탄한 건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이게 벚꽃이구나... 단풍을 보기 위해 여행을 간 건 더 한참 뒤여서, 불과 몇 년 전이다.
80년대의 “국민”학생이 남에 집 사정을 알 리 없다. 인터넷도, 스마트 폰도 없던 시절이다. 학교에선 가정환경조사랍시고 집에 무슨 가전제품이 있는지, 부모의 학력은 어떤지, 직업이 뭔지 묻는 조사를 했다. 가난은 그렇게 서류화 되어서 학교에 저장됐지만 아이들에겐 돌아서면 잊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보다 나은 집이 어떻게 사는지 본 적은 있다. 친구를 집에 부를 수 없으니 나 또한 친구 집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의정부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친구 집에 놀러 간 건 다섯 번이 안 된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친구 집은 우리 집보다 훨씬 잘 살았다. 우리 집이 뭔가 잘못됐다는 감은 있었는데, 친구 집에 갔다 온 이후 그 잘못이 뭔지 명확해졌다. 그것은 가난이었다.
사랑이 지탱해 주는 것
시의 내용처럼, 가난해도 부부와 가족이 사이가 좋으면 견뎌낼 수 있다. 좋은 날을 꿈꾸며 지금 겪고 있는 가난을 지나가는 성장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가난한데 가정도 평화롭지 않으면 그건 마른풀에 불붙은 성냥을 던지는 것과 같다. 당시 내 주변의, 소위 가출을 하고 지각과 결석을 밥먹듯이 하는 불량 청소년들은 단순히 가난한 집 애들이 아니었다. 단순한 결손가정의 애들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가난해도 집안에 사랑이 넘치고 큰 소리 안 나고 평화로우면 가난을 모르고 클 수 있다. 알아도 견딜 수 있다. 아이들을 견디지 못하게 하여 집 밖으로 내쫓는 집은 사랑이 없는 집이다. 그렇게, 내 친구들 몇몇과 내 동생과 동생의 친구들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평범한” 사람처럼 그들의 삶을 제 궤도로 돌려보내는데,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렸다. 그 일탈의 세월은 그들의 탓이 아니었다.
공단지역의 이혼율이 경기의 변동과 실업률에 연동되는 요즘, 달동네에 사는 신혼부부의 사랑이 담긴 시가 동화처럼 읽힌다. 아니 그냥 동화다. 평강공주가 되기 위해선 바보 온달이 있어야 한다. 아침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출생의 비밀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을 만나야, 사랑으로 현실을 이기는 “동화”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도 결혼도 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겐 드라마와 동화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사랑을 머리로 하는 사람에겐 사랑도 다큐멘터리일 뿐이다. 아니 뉴스 같으려나? 아니면 패션 잡지? 현실의 반복? 그 사이, 남에게 자랑할 만한 자극이 잠시 끼어들 뿐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동화 같고 영화 같은 사랑은 그야말로 현실에 없다고 하는 사람에겐 이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세 연의 시는 그야말로 시로 남는다. 가슴으로 건너오지 않고 책 속에 글자로 남는다.
그러나 어느 노래 가사처럼,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시키는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서 어떻게 살아도 좋겠다는 마음을 먹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시를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러니까.
편지
갑자기
서로를 모른다고 해야 할 때
예전에 무심히 드린 편지
편지 쓸 때의 내 고운 생각들이
손때 묻은 서랍에서 책갈피에서
샛노란 유채꽃으로 피어나
그대를 흔들어 깨울
튼튼한 아이 하나 낳아주고 떠나온 양
마음 든든하다고 그렇다고
쓸쓸한 퇴근길 육교 위에서
새하얀 눈송이로 펄럭이는
편지
아직 거기 있는 사람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주고받은 편지들이 생각난다. 사랑이 끝난 후 돌려받고 보낸 편지들이 생각난다. 돌려보내지 못한 편지들을 태우던 것이 생각난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대학교 기숙사 애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철렁했던 것이 생각난다. 무심히 최영미의 시집을 꺼내어 읽다가 페이지 곳곳에 남긴 그녀의 글과 글씨를 보고 울컥했던 것이 생각난다.
마치 나도 모르게 태어난 아이가 어느 주말의 낮잠자리에 불쑥 나타나 엉금엉금 기어 품 속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내 적막했던 삶에도 그렇게 따뜻하고 좋은 사랑이 있었음을 증언하는 흔적을 보며 지루한 일상이 흔들렸던 적이 있다.
사랑은 스콜처럼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또 당신의 사랑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나에 사랑은 스콜처럼 찾아왔다. 동남아의 어느 휴양지, 쨍쨍하게 맑은 하늘에 방심하여 손가락에 맥주 한 병 걸쳐 들고 나른하게 거닐 때, 슬쩍 어디선가 밀려온 구름하나가 대차게 쏟아붓는 그 비처럼, 내게 사랑은 그렇게 찾아왔다. 또 그렇게 갔다. 갑자기. 물론 조짐도 있었고 예감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던, 그런 그날에 사랑은 서로를 모르는 사람으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어디 그게 말처럼 쉽게 되나. “자, 지금부터 우린 남남이야. 그러니 이제부턴 당신의 인생에서 난 남이야. 모르는 사람이야.”하고 말을 하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주의를 주고 다짐을 받는다고 해서 어디 그게 그렇게 되느냔 말이다. 남는다. 이름도, 기억도, 후회도, 고마움도. 나이가 들수록 후회보단 고마움이 더 크다.
화려하고 예뻤던 청춘의 한 자락, 그 인생의 소중하고 찬란한 날들을 기꺼이 내게 내어주었다. 자신의 인생에 나라는 사람의 기억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고맙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건강하고 곱게들 늙었으면 좋겠다. 소식을 들을 방법은 없다. 그러니 그저 그러길 바랄 뿐이다.
늦깎이
햇빛만 따라다녔다
비탈길 오르던 아픈 스무 살
함께 자란 친구들이 지성인의 손수건을 흔들며
흔들며 떠나갈 때
빈 교정에 남아 우리는
누군가 흘린 꿈 조각을 줍는다
희고 넓은 이마로 웃고 있는
잘 자란 약력들이
눈송이처럼 추운 눈동자 속으로 녹아내리는 밤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창문 너머 그믐달이 손잡아 끌지만
귀 붉히며 돌아서는 노란 은행잎
떨며 흔들린다 오를 수 없는 나무 아래서
잔뿌리며 사랑이며 한세상 헝클어진 넝쿨이며
늦게 늦게 우리는 자라
허물도 그만큼 늦게 벗는다
뒤처진 사람
모든 게 늦었다. 사춘기 때의 열병 같은 가슴앓이를 연애라고 볼 수 없다면, 요즘 청춘들의 기준으로 보면 사랑은 늦게 찾아왔다. 이십 대 중반이 늦은 거라면 우린 어쩌란 것이냐, 하며 울분을 토하는, 소위 모태 솔로도 독자 중에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저 통상적으로 좀 늦었다는 것이다. 아니 통상적이라면, 서른이 넘도록 연애 한 번 못한 나는 비정상이라는 말이냐, 하며 또 울분을 토할지도 모르겠다만... 그냥 넘어가자.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여하간, 어찌 됐건, 좀 늦었다. 고등학교를 건넌 뛴 뒤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은 것도, 그 뒤에 스물넷이나 되어서 대학에 들어간 것도 그렇다. 사랑도 이때 찾아왔으니 늦게 왔다. 서로의 마음을 진즉에 드러내어 보여줬다면 좀 일찍 사랑이 왔을 수 있겠다만, 이 또한 열매처럼 익을 때가 되어 익은 것 아니겠나? 용기 내어 고백하지 못해 보내버린 세월을 아쉬워하며 우린 이 늦깎이의 사랑을 열심히 했다.
돌이켜보면 다 늦었다. 진학도, 사랑도, 취업도, 결혼도, 아빠가 된 것도 다 늦었다. 다시 진부한 표현을 가져와 말하면, 통상적인 남자보다 훨씬 늦었다. 다들 고등학교와 대학에 들어갈 때 난 그 밖에 있었고, 다들 꿈을 좇아 취업을 할 때 난 여전히 학교에 있었다. 그렇게 한 발작, 아니 서너 걸음 뒤에서 쫓아갔다. 늦게 들어선 주제에 제법 힘든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주제넘는다는 사람도 있었고 늦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안 될 거라는 사람도 있었으며 쉬운 길을 찾아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늦은 사람치곤 호사스러운
어차피 늦은 거 나만의 페이스로 가자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갔다. 아직 가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나 하나만 보면 부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직장 좋은 아내에게 기대어 아이를 돌보며 한량처럼 카피라이터 일을 하면서 잘 둔 대학원 동기 덕에 칼럼도 써가면서, 또 이렇게 여기저기 돈 안 되는 글을 써가면서 살고 있다. 늦깎이 치고는 제법 호사스러운 삶이다. 여전히 운전도 못하고 차도 없고 내 이름으로 된 땅이며 집도 없으며 내 나이면 다 친다는 골프도 한 번 안 쳐 봤지만 호사스러운 삶이다.
일주일에 서너 번, 정확히 한 시간 동안 수영을 하고 학위를 준다는 사람도 없고 책을 내자는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한가하게 철학 책이나 읽고 있고 시에 대해 긴 글도 쓰면서 일주일에 두어 번 출근하여(물론 집에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카피와 홍보 영상 시나리오와 기획서를 쓰지만) 감독과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그 덕분에 (아내에게 대부분 가지만) 매달 수영장 등록과 몇 권의 책과 몇 병의 맥주를 살 돈이 통장에 있으니, 분명 호사스러운 삶이다. 게다가 이 나이에 아직 현역 카피라이터로 여기저기 명함을 내밀고 있으니 늦게 출발한 사람치고는 제법 오래가고 있는 셈, 이 또한 호사스럽다.
시의 발문을 보니 시집의 탈고는 1990년 가을에 끝난 모양이다. 판본을 보니 초판은 1990년 12월 15일에 나왔고, 난 1994년 4월 28일에 나온 초판의 9쇄를 샀다. 뒤에 붙은 서점의 직인은 대전의 <문경서적>의 것이다. 서정윤이나 도종환, 김용택이나 안도현의 시집과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꾸준히 제법 팔렸다. 덕분에 내가 갖고 있는 다른 시집, <너에게 세 들어 사는 동안>에선 시인의 나아진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다. 내가 갖고 있는 박라연 시인의 시집 두 권을 모두 소개했다. 아이들에게 백희나 작가의 동화가 필요하듯, 어른에겐 동화 같은 시가 필요할 듯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