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Sep 16. 202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

동해선에서 읽은 책 98

"너는 남색 교복 재킷에 마찬가지로 남색 플리츠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리본이 달린 흰색 블라우스, 흰색 양말에 검은색 슬립온 슈즈. 양말은 온통 하얗고 신발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 P.30     


핀볼의 기억

2018년 9월 9일,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을, 알라딘 중고서점 경성대점에서 읽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던 딸이 <마법의 시간 여행> 시리즈에 꽂혀서 그 시리즈를 세 권인가 네 권 연달아, 애들을 위해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꼼짝도 안 하고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도 뭐라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어 들고 읽었다. 다행히 끝까지 다 읽어서 블로그에 서평을 남겼다. 그 서평의 일부다.     


“이 소설은 이후 하루키 소설의 모든 단서들, 장치들, 오브제들이 담겨 있다. 우물, 음악, 여자, 일상, 수영, 해안 마을, 등대, 위스키, 스웨터와 레인코트, LP... 이야기의 단초도 많이 보인다.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기사단장 죽이기>의 단서들이 흩어져 있다. 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수십 가지 이미지의 나열일 수 있다....... 혁명의 염원, 학생 운동, 그리고 청춘도 핀볼과 비슷하다. 여기저기 튕겨대고 부딪쳐가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불을 밝힌다. 여러 사람의 손을 타지만 그 모든 손들은 다 개별적으로 핀볼과 만난다. 모두 같은 게임을 하지만 모두에게 모두는 개별적 타자다. 그 파편화된 타자들로 인해 그 시대의 연대는 쉽게 잊히고, 청춘의 기억만이 개별적으로 남는다.......


하루키는 그것들을 자잘한 것들로 조직한다. 음반, 주크박스, 맥주, 기차역, 우물 파는 사람, 208/209 티셔츠, 스웨터, 더플코트, 스웨터를 꿰매 준 경리, 말장화, 우비, 레인코트, 배선반, 폭스바겐, 커피, 토스트와 버터, 침대와 섹스 그리고 핀볼. 너무나 많은 청춘의 미장센은 일상의 어디쯤, 어느 시기에 청춘의 기억을 소환해 낼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스나이퍼가 종탑에만 있다고 확신할 수 없듯이, 대인 지뢰가 길목에만 있다고 확신할 수 없듯이 말이다. 하루키는 그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 모든 것, 모든 시기에 청춘의 기억이 잠복해 있다.”


숫자 따위라니

앞서 다른 글에 썼듯이 그가 일관 되게 전개하는 주제 중 하나는 기억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사건을 영화적인 몽타주와 미장센 기법으로 직조한다. <1973년의 핀볼>엔 주인공이 쌍둥이 자매와 한 침대에서 잠자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매는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다른 숫자가 써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게 없으면 그 문란한 기억조차 선명해질 수 없다.


요즘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젊은 시절엔 몇 명이랑 자봤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내들이 있었다. 그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훨씬 나이가 들어서야 알았다. 가장 좋았던 순간,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여름밤의 기억이 흐릿하다. 몇십 명과의 잠자리가 기억이 안 나더라도 좋다. 그날, 그 사람과 보냈던 딱 두 시간의 여름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났으면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절대적 갈망을 정확히 알고 있다.     


어느 시대의 어떤 기억은 사물과 대상, 공간과 기운, 사람과 내가 없으면 발생할 수도, 잔존할 수도 없다. 반대로 그런 것들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사건으로 그 시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생각해 봐라. 당신이 스물다섯 일 때, 그 해 여름, 당신에게 있었던 가장 신나고 뜨거웠던 기억이 무엇인지?



"그리고 물론 나한테도 편지를 써줘. 도저히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긴 편지를. 부탁이야.", P. 64     


"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모든 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나는 한동안 혼자 남아 네가 남기고 간 기척을 말없이 음미한다. ", P.76     


강박, 몽타주, 그리고 미장센

무라카미 하루키는 강박적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끊임없이 뭔가를 기억해 내려고 한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의 곡명, 연주를 쿼텟이나 트리오의 구성, 림스키코르사프키와 무소르그스키 등이 멤버였던 러시아 5인조의 나머지 세 명의 이름 등. 주인공은 심지어 기억만으로 도시를 만들고 그 도시를 함께 만들었던 “소녀”의 기억을 평생 안고 산다. 이 정도면 강박 아닌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회상뿐이다. <1Q84>에 나오는 노부인의 대사처럼 “나이 들어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음에는 예전 기억으로 몸을 따스하게” 덥히는 것 말고는 도대체 무엇을. 그건 기척의 음미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 아주 오래전 사라진 것, 그러나 과거 한 때 내 삶에서 그 고유의 부피와 무게를 갖고 있었던 것, 있을 땐 소중한지 몰랐던 것, 그래서 그것을 누리던 날들, 그날들의 하루, 하루를 무심히 흘려보낸 것을 나이 들어 후회하게 만드는 것.     


그 후회의 기억들이 도시의 도서관에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좋은 기억들을 다시 한번 재생할 수 없어서 안타까운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아우성이 “오래된 기억”에 갇혀 있다. 이미지와 은유와 말들과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던 쾌락과 슬픔까지.......      


저 도시의 도서관 소녀는 사과 과자를 잘 만들었다. 현실 세계의 한적한 산골마을의 도서관 관장-이미 죽었으나 떠나지 않고 배회했던-은 홍차를 잘 끓였다. 그는 사과나무를 태우는 난로가 있는 작은 공간으로 주인공을 안내한다. 향과 맛, 그것으로 기억되는 공간과 사람.


작은 카페에서 파는 블루베리 머핀처럼, 영업이 끝난 후 딱 한 대만 피는 멘솔 담배와 싱글 몰트 위스키 한 잔처럼. 사람과 공간은 매개를 통해서 기억된다. 아니 그렇게 기억되어야만 한다. 구분되어, 향기롭게. 그래서 그 사람이 여기 없더라도 우린 그 기척을 오래 음미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남긴 향, 맛, 공간. 심지어 그 공백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만히 남기고 가는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P280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추억의 무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있다. 반면 당연한 삶의 무게는 보이는 것들에 있다. 헤쳐 나가거나 가져가거나 두고 가거나 이뤄나가면 되는 것이 지금, 당면한 삶이다. 슬프지만 슬퍼할 새 없이 밀고 나가야만 하는 것이고 아프지만 참고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삶에 추억이 이미 사라진 핀볼 모델처럼 훅 하고 생각날 때가 있다.  <1973년의 핀볼>의 서평 일부를 다시 인용한다.


“해안가의 쥐가 일주일에 수요일을 제외하곤 모든 날을 행복하게 해 줬던 여자 친구를 갑자기 떠나는 것처럼, 주인공 "나"가 어느 날 갑자기 핀볼이 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청춘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고, 상실되고, 불쑥 추억된다. "나"가 추억의 그 사라져 버린, 일본에 세 대 밖에 수입 안 된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을 찾아 "여기도 도쿄인가요?"라고 물을 정도로 외곽의 창고까지 간 이유는 그 "불쑥" 솟아나는 추억 때문이다.


추억이란 것은 그만큼 힘이 세서 무덤덤한 일상 속에선 없는 듯하다가, 그러니까 시가전이 다 끝났다고 믿고 한가롭게 이열 종대로 소대가 걸을 때 불쑥 종탑의 스나이퍼로부터 한 발의 총알이 소대장에게 날아와 박히는 것처럼 "불쑥" 튀어나온다.”     


추억의 기척

우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추억과 마주할 수 없다. 자신의 기억을 뒤적여 겨우 그 잔상을, 기척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 주인공은 강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갈수록 젊어진다. 이윽고 소설의 초입에 나온 그 순간, 그 장면에 다다른다. “그녀는 열여섯 살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열일곱 살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모습 또한 그대로였다. “너는 노란색 비닐 숄더백에 굽 낮은 빨간색 샌들을 대충 쑤셔 넣고 모래톱으로, 나보다 조금 앞서 걸어갔다. 젖은 종아리에 젖은 풀잎이 달라붙어 근사한 초록색 구두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생해도, 그것은 그림자다. 내가 살아온 만큼 길어져 뒤에 남겨진 추억이라는 그림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부분을 읽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술렁대는 걸 느꼈다. 가짜여도 좋다. 아니 가짜인 걸 알아도 좋다. 생생하게 다시 그 추억을 “겪었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 당연하게도 그런 추억으로의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은, 그런 여정은 얼른 끝내야만 한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의 당면한 삶이 있으니.


사족

읽으면서, ‘야, 이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랑 비슷한데.’하고 생각했었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 소설로 자신이 과거에 썼던 “긴 단편”의 확장을 완성시키려 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대응이 또 있어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그 결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탄생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은 소위 초기 3부작이라 불린다. 앞에 두 편은 운영하던 재즈 카페에서 썼다고. 난 분명 이 세 편을 다 읽은 것 같은데 셋 다 없다. 그 뒤에 이어지는 소설들도 대체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 작가의 젊은 시절, 특히 1970년대가 주 무대인 이야기들이지만. 이 세 편과 <노르웨이의 숲> 사이에 출간한 몇 편의 소설엔 이상하게 관심이 없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이 소설 2부에 등장하는 커피숍의 여사장은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 나오코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인지 내심 둘이 진도가 나가길 바랐더랬다. 뭐, 소설이 좀 더 이어졌다면 그 문제도 해결이 됐을지도. 어쩌면 <노르웨이의 숲>의 또 다른 인물인 레이코처럼 됐을지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은 거의 대부분 수영을 한다. 특히 성인인 주인공은. 기억이 맞는다면 수영을 하는 남자 주인공은 정기적으로 섹스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둘 다 안 한다. 최소한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딱히 다른 운동을 하는 장면도. 특이하다면 특이한 주인공이다. 아, 그렇다고, 수영이 성적 매력이나 능력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만 봐도 그 둘 사이엔 인과관계도, 상관관계도 없는 듯하다.     


진짜 마지막 사족. 엊그제 <무쇠 소녀단>을 우연히 보는데, 맏언니인 배우 진서연이 다른 멤버들에게 책을 선물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이 책 8장에, 저자가 철인 3종 경기를 준비하는 과정이 나오기 때문에 선물했을 수도. 여하간 방송에 나왔으니 제법 팔릴 것 같아서 미리 경고해 두자면, 이 책, 달리기를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 난 달리기를 한창 할 때 읽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문장 표현에서 문장부호까지-이수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