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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19. 2024

겨울꽃, 동백

딸과 함께 꽃을 보네 1

겨울의 시작

조짐 같은 건 없다. 대부분의 불행은 어제와 같았던 오늘, 저번 일요일과 같았던 이번 주 일요일에 온다. 우리가 아는 몇몇 전쟁의 시작을 알렸던 기습이 그랬던 것처럼.      


12월 7일은 대설이었다. 나라는 시끄러웠다. 딸은 이날 부산 시에서 선발하는 영어 영재 선발 시험을 봤다. 점심엔, 여름이면 몇 십 명씩 줄을 서는, 집 근처 밀면 집에서 비빔 밀면을 먹었다. 난 칼국수를, 아내는 들깨 칼국수를 먹었다. 저녁엔 딸이 좋아하는 마라 떡볶이를 시켜줬다. 저녁 생각이 크게 없었던 난 아내가 곁들여 시킨 순대 몇 개와 떡볶이 몇 개를 먹었다.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12월 8일은, 당연하게도 일요일이었다. 딸은 약간의 열이 있었다. 전날에도 미열이 있었는데, 시험 탓이라 여겼다. 자기 나름 전력을 다했다고 했으니 몸 어디가 이상한 것이 당연하지 싶었다. 가벼운 몸살감기라고 생각했다. 나가서 종합 감기약을, 종류가 다른 것, 두 개를 사 왔다. 그걸 먹이니 딸의 열은 내려갔다. 이후 배가 아프다고 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변비가 왔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맹장이 아픈 건 아닐까 염려했으나 아픈 위치가 다르다고 했다. 그렇게 밤을 맞았다.      


이날 밤, 여전히 배가 아프다는 딸과 함께 아내가 같이 자기로 해서 난 딸의 방에서 자기로 했다. 옷을 다 벗고 자는 내가, 이날은 종일 입었던 반팔 티와 두꺼운 운동복 바지와 겨울에 주로 신는 두툼한 흰색 트레이닝 양말을 신고 잤다. 그러고 잤으니 잠이 깊을 리 없다. 아내와 딸이 화장실에 함께 가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변비를 해결한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설핏 잠이 들었다. 새벽, 아내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다니는 병원의 응급실 당직 의사와 통화하는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시 후 아내가 문을 열었다. “지금 응급실로 오래요.”     


응급실, 그리고 수술

응급실엔 보호자가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다. 병실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함께 들어갔다. 새벽 네 시 반, 올 때마다 언제나 사람으로 넘쳐나던, 하루에도 몇천 명이 오가는 병원의 가장 바쁜 1층엔 아무도 없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으리라 짐작했던 편의점조차 일곱 시나 되어야 문을 연다고 쓰여있었다. 난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밤 근무자와 교대를 해주기 위해 간호사들이 가장 먼저 출근하기 시작했다. 여섯 시 반부터 그 행렬이 이어졌다. 그즈음, 아내가 응급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내의 말은 간단했다. 우리가 예상했던 문제는 아니다. 딸의 하복부에 혹이 있다. 위치로 보아 산부인과 의사와 영상의학과 교수가 출근한 뒤에 판독과 진단을 받아봐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등 뒤로 절벽이 새로 생긴 느낌이 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등을 덮쳤다. 절벽의 바닥이 보이지 않아 검은 진공만이 가득했다. 아내는 다시 들어갔다.     


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입원실에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지속되던 통증을 작은 몸으로 견뎌내는 걸 보면서도 눈물을 삼켰다. 수술실에 들어가 보호자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을 들은 것도 아내였다. 난 그 사이, 울컥하는 눈물을 다시 욱여넣느라 갖은 애를 썼다.


딸은 화요일에 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딸을 보며 쏟아지는 눈물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보호자로 따라 들어간 아내는 직장 동료이기도 한 간호사와 의사의 설명과 위로를 동시에 들으며 눈물을 쏟고 있었다. 문이 서서히 닫혔다. 그 문을 등지자마자 눈물의 댐이 무너졌다. 다시 틀어막았다. 쏟아졌다. 다시 막았다. 쏟아졌다.      


로비를 중심으로 ㅁ 자 형태로 지어진 건물의 특성으로 인해, 딸이 들어간 수술실이 있는 4층에서도 지하 1층에 있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였다. 입점해 있는, 부산의 유명 빵집의 간판과 갓 나온 빵이 보였다. 그 앞, 널찍한 공간에 놓인 색색의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빵을 먹는 보호자의 가족들이 보였다.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재차 틀어막았다.      


잠시 후 아내가 나왔다. 터지는 눈물을 욱여넣었다. 붉어진 눈을 한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뜨거운 커피와 간단한 빵 따위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딸은 그 뒤로, 며칠 더 병원에 있으면서 회복을 하고 지난 월요일에 퇴원했다.      


이 일주일로 인해, 어쩌면 딸의 인생의 경로가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엄청난 대수술도 아니었고 금세 회복했으며 손쉽게 치료할 수 있었지만 딸의 마음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공부에 대해, 딸의 꿈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얘기를 안 하던 우리 부부도 딸의 무리한 도전이나 늦은 밤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힘든 공부를 말릴지도 모른다. 아직은 모른다. 앞이 어떻게 될지. 딸은 자기 인생에 처음 닥친 짧고 시린 겨울을 막 통과했다. 그뿐이다. 그다음은?


꽃의 도래

내가 누린 가장 큰 복이 있다면, 딱 하나를 꼽으라면 딸이 크는 걸 본 것이다. 능력 있고 직장 좋은 아내 덕분에 제 하고 싶은 공부, 일을 하는 동안 딸의 곁에 있는 시간이 다른 아빠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 시간 속에서 딸이 걷고 말하고 뛰고 웃고 우는 것을 봤다. 뒤집고 기고 잡고 걷다가 그냥 걷고 그러다 뛰는 딸을 봤다. 봉오리에서 피는 순간까지, 꽃의 매 순간을 지켜보듯이, 언제나 예쁘게 핀 꽃이었던 딸을 지켜봤다. 이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복이다.


꽃은 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때도 알려주지 않는다. 사람의 손을 탄 화초든, 공원에 있는 것이든, 야생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사람은 그저 그 시기를 짐작만 할 뿐이나, 그 짐작은 그 시점의 폭을 어림잡을 수 있을 뿐 꽃이 피는 순간을 콕 집어낼 수는 없다. 심지어 이 짐작조차 빗나갈 때가 있다. 꽃은 은근슬쩍 눈치를 줄 뿐 약속은 하지 않는다. 질 때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가 보면 떨어져 있다. 어떤 꽃은 통째로, 어떤 꽃은 한 잎씩, 그렇게 간다는 언질 없이 사라져 간다. 내일 또 보러 오겠다는 사람의 다짐을 무심히 뒤로하고 그렇게 가버린다.      


그렇기에 꽃은 지금 이 순간, 앞에 있는 자신에게 집중하길 원한다. 봉오리를 보며 필 날을 예측하는 헛된 호기를 부리지도 말고 꽃의 시간을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의 시간 감각과 한정된 세월의 일정에 맞춰 또 보러 오겠다는 헛된 기약을 하는 객기를 부리지도 말고, 지금 피어 있는 나를 보라고 말한다.      


겨울의 꽃, 동백

사람들은 꽃을 보기 위해 봄을 기다린다. 봄날의 꽃을 기대하며 겨울을 견딘다. 그러나 그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다. 동백은 그런 꽃이다. 인생이 힘들 때도 여전히 붉게 타오르는 희망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꽃이다. 얼핏 장미 같은 모양새로, 때로는 카네이션 같은 모양새로, 붉은 장미의 색으로, 심지어 분홍과 흰색으로도 피어 봄에 올 모든 꽃의 전조를 알려주는 꽃이다. 더 많은 꽃이 온다. 더 많은 기쁨이 온다. 그러나 그것들을 기다리는 이 괴로운 시간에도 꽃은 피어 있다. 다가올 무엇을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을 견디지 말고 오늘 내 앞에 놓인 축복을 만끽하라. 그리 말하는 꽃이다.      


어떤 꽃은 향수가 된다. 기름이 되기도 한다. 동백꽃도 그렇다. 그러나 그 무엇이 되기 전에 꽃은 꽃이다. 자식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 아이를 낳아 키우는 부모나, 앞으로 아이를 낳고 키울 부모 중엔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큰 부모가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와 명예를 거머쥐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사람은 더욱더 그 자체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한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그 꽃이 질 때까지 제 색깔대로 살다가 가면 된다.      


우리가 기적이라 불러 마땅한 것들은 일상 속에 있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나이가 들고, 애가 학교에 가고 전혀 모르던 지식을 습득하고 전혀 모르던 소년에게 호감을 느끼고 호감을 받는 것.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하고, 아침에 학교 갔다가 오후에 집에 오고, 저녁에 학원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오고. 이런 것들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겨울에 동백꽃이 피는 것이, 그 동백나무의 견딤과 수고로움이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매화가 고개를 내밀기 전까지 겨울바람과 꽃샘추위를 견디며 꽃을 피우고 지지 않고 견뎌내는 동백꽃의 겨울, 겨울의 동백꽃이 그러한 것처럼. 내 인생도, 당신의 인생도, 그리고 사랑하는 내 딸의 인생도 기적이다.


남해의 꽃

이십여 년 전 부산에 처음 정착했을 때, 동백이 흔해서 놀랐다. 동네 공원에도 뒷산에도 심지어 아이의 등하굣길에도 남해안 어느 도시의 호텔, 펜션, 풀빌라를 가도 동백이 있다. 12월 이후, 울산, 부산, 창원, 거제, 통영까지, 남해안 도시 어디를 가도 동백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내가 다니는 수영장 건물 옆에도 있다. 특히 거제도에선 어지간한 소나무만 한 크기의 키 큰 동백나무도 쉽게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영어로 동백을 뜻하는 카멜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가 곳곳에 있겠나. 부산에는 그 유명한 동백섬과 함께 카멜리아라는 이름의 여객선도 있다.      

 

가장 흔한 색은 붉은색인데, 흰색과 분홍도 있다. 이 세 가지 색 두 개 이상이 피는 동백나무도 있는데, 심지어 흰색, 붉은색, 진홍색, 연분홍색, 진분홍색이 한 나무에서 자라는 동백나무도 있는데 오색팔중이라고 부른다. 필자의 앞집 뜰에도 한 그루 심겨 있다. 울산시청 광장에도 심겨 있다.       


언제 피고 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을 뿐. 우리 동네를 보면, 은목서와 금목서가 지는 11월 중순쯤 동백꽃의 봉우리가 올라오며 서서히 피기 시작한다. 이후, 초봄까지 버티는 데, 종종 벚꽃보다 오래 버티는 것도 있다.


<딸과 함께 꽃을 보네>로 제목을 바꿨다. 딸의 퇴원 후, 제목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함께 꽃을 볼 계절들이 무수히 많이 남았음을 깨달았기에. 표지의 꽃은 딸이 입원한 병원으로 가는 인도 옆에 피어 있던 것이고, 나머지는 동네에서 딸과 내가 찍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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