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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소국

딸과 함께 꽃을 보네 2

by 최영훈

국화축제의 주인공

국화축제 중 가장 유명한 마산의 국화축제는 대략 10월 말에 시작해 11월 첫 주에 끝난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밀어졌다 당겨지기를 반복한다. 최근에는 점점 뒤로 미뤄지는 추세다. 기간의 결정은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다. 다른 지역 뉴스에선 다루지 않겠지만 부산 경남 지역 뉴스에선 가을마다 축제시기를 두고 고심하고 있는 시청 담당 부서의 고뇌가 보도되곤 한다. 축제의 주 무대인 창원의 마산 주변 상인들은 물론이고 인근 도시의 관광객들 또한 이 시점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국화 축제 시기 또한 전문가의 고민과 관청의 숙고, 시민과 관광객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그 날짜가 선택된다. 개화시기와 변덕스러운 가을 날씨와 추석 명절과의 조율 속에서.


전국 각지의 국화 축제엔 새로운 품종이 꾸준히 출시된다. 우리가 알거나 자주 보는 국화라고 해봐야 몇 종류 안 되지만 실제로는 몇 천종이 되는데, 화훼 업계에선 계속 이런저런 새 품종을 출시하고 있는 것이다. 꽃의 크기를 키우고 꽃잎을 풍성하게 하고 색을 추가하고 섞어가면서 말이다. 덕분에 매해 열리는 국화축제는 매번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떠들썩하던 국화 축제와 함께 가을꽃은 야외에서 서서히 퇴장한다. 국화는 당연하고 코스모스도 물러간다. 제법 생명이 길어서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백접초와 홍접초도 그 꽃을 접는다. 생명력이 강한 세이지 같은 허브들도 찬바람을 견디다 12월에 접어들면 움츠러든다. 그나마 좀처럼 영하로 가지 않는 부산이니까 그나마 다들 그렇게 늦게까지 버틸 테지.


노랗게, 살아 있다.

추운 겨울, 일요일 밤, 아내의 지령을 받들어 빌라 밖에 쓰레기를 내놓는 김에 추위를 가르고 맥주를 사러 집 근처 편의점을 가다 보면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부산에서 이십 년을 넘게 산 남자도 깜짝 놀랄 만큼 추운 날씨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겨울바람을 맞이하는 꽃, 소국 때문이다.

소국이 초대받는 곳은 거의 없다. 주인공 대접은 어림도 없다. 국화축제에 초대받는다 하더라도 진입로 양쪽에서 노란색 가드레일처럼 길을 꾸며주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건물이나 아파트 등지에서도 더 화려한 국화를 보조해 주는 배경 역할을 주로 맡는다. 그러나 그 주인공들이 하나 둘 무대에서 내려가도 마지막까지 남는다.

소국은 줄기가 약해 사람들이 인위적인 잔기둥을 만들어 받쳐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촘촘히 핀 꽃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옆으로 쓰러진다. 길을 걷다 보면 그렇게 꽃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소국의 무리를 만나곤 한다. 줄기와 잎이 땅에 닿아서 잎은 누렇게 되고 줄기는 휘다 못해 부러지기 일보직전인데 꽃은 버틴다.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그 작은 꽃을 한송이도 땅에 떨구지 않고 꿋꿋이 피어낸다.


우리가 겪어 온 인생의 파도

아내와 나는, 속된 말로 인생에 파도가 많았다. 아내는 고등학교 졸업 즈음, 이런저런 이유로 빚잔치가 있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지인의 소개로 병원의 조무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일 잘하고 재치가 있다는 것이 알려져 원장실 비서로 발탁됐고 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일하는 동안 대학을 다녔고 대학원을 다녔다. 그 후 나와 결혼하면서 비서실을 쫓겨나다시피 - 유부녀는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 비서실의 관례라면 관례였다. - 나온 뒤, 잠시 다른 곳에서 일하다 재단 산하 병원이 신설된다는 걸 알고 대학원 시절부터 준비한 자격증으로 직원 선발에 응시했고, 그렇게 몇 년 만에 사무직으로 당당히 개원 멤버로 합류했다. 그 후 현재에 이르러, 재단 전체에서도 몇 안 되는 고위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다.


나? 난 중학교 때, 아버지의 대책 없는 바람으로 인해 풍비박산 난 집안 사정으로 인해 고등학교 진학을 못했다. 어머니는 생활력 없이 나와 동생을 떠안았고 부모가 함께 있을 때도 가난했던 집안은 정말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가난해졌다. 여동생은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갔고 그럴 배짱도 없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가난을 함께 견디며 살다 평택의 기지촌까지 흘러들어 가 정착했다. 그 후, 어머니의 재혼 덕분에 뒤늦게 공부를 해서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갔고 IMF에 발목 잡혀 대학원으로 도망쳤었다. 그즈음 오래전에 알고 지냈던 아내와 다시 연락이 되어 인연을 이어갔고 연인이 되어 부산에 정착, 우연히 카피라이터의 길에 들어서 지금에 이르렀다.


잔잔하게, 파도 없이

이런 이유로, 역설적이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둘 다 딸에게 이런저런 압박을 준 적이 없다. 한글이 배우고 싶다고 할 때까지 가르치지 않았고, 수학을 배우고 싶다고 하기 전까진 학습지도 시키지 않았다. 유일하게 우리가, 엄밀히 말하면 아내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돼서 시킨 건 음악 줄넘기와 주산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이 두 개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았을 정도로, 난 이걸 왜 시키나 의문이 들었지만 말리지 않았다.


딸은 또래 애들이 흔히 겪는 잔병치레를 좀 했을 뿐 건강하게 자랐다. 키도 큰 편이고 몸무게도 적당하다. 전체적으로 비율도 좋고 얼굴도 예쁘다. 물론 아빠의 눈으로 본 것이라 다들 그렇게 보리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또, 성실하고 부지런했고 머리도 제법 좋았다. 승부욕도 있어서 성적이 드러나는 시험에선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나름 애를 썼다. 어린이집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 딸은 반에서는 물론이고 전교생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재였다. 천재는 분명 아니지만 조금만 노력을 하면 영재가 될 수 있었고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두뇌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리더십도 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난 그런 딸에게 공부나 학교생활과 관련해선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만 하라고 했다. 안전하게 학교에 갔다고 안전하게 돌아오기만 하라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진, 특별한 일이 없다면 등하굣길에 늘 동행했다. 그런 딸에게 인생 처음으로 시련이 닥쳤다.


수술은 성공리에 끝났고 결과도 좋았다. 수술 후 일주일 후, 외래를 가서 수술로 걷어냈던 종양의 발생 이유에 대해, 그 종양이 터지면서 남겼을지도 모를 작은 세포와 그 세포가 다시 암이 될 일말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받아야만 하는 항암치료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을 하기 전, 담당의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딸을 보며 “너도 같이 들을 거야?”하고 물었고, 내가 볼 수 있었던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이 사태의 전말에 대해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었음을, 그런 메시지를 의사에게 분명히 전달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와 아내, 딸은 딸을 괴롭혔던 종양의 정체와 그것의 제거를 위한 수술 과정 전반,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항암치료의 일정에 관해 들었다.


바람과 기대

승승장구까지는 아니어도, 무리 없이 무난하게 클 줄 알았다. 큰 사고만 겪지 않으면 건강한 몸과 제법 쓸만한 두뇌를 갖고 잘 살아나갈 줄 알았다. 아내와 내가 겪은 인생의 파도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코로나19에도 두 번 걸렸고 독감도 두 번이나 겪었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찢어지거나 하는 일 없이 무난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어쩌면 내가 딸에게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 내용은 늘 비슷했다. “네가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가는 데 보행자 신호가 바뀌는 걸 보인다면 절대 뛰지 마라. 저 지하에서 네가 타려는 지하철이 오는 소리가 들려도 절대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가지 마라. 그 몇 분 아끼려다가 몇 달, 몇 년을 허비하는 수가 있다. 더 빨리, 더 일찍 가고 싶고 가야만 한다면 더 일찍 집을 나서라. 체육 시간에도 너무 무리하지 마라. 운동장에서, 체육 선생님이 뛰라고 할 때를 제외하곤 쓸데없이 뛰지 마라. 길을 걸으면서 휴대폰을 보지 마라. 보행자 신호가 켜지자마자 건너지 마라.”


이 사태는 잔소리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거로는 예방도, 대비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불가항력적이다. 무기력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갖고 있어도, 아무리 조심을 시켜도 딸의 조그만 신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몰랐다. 잔소리가 닿지 않는 곳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아내는 딸과 함께 울며 감정을 정리했고 나는 아내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내 감정을 전달했다. 그렇게 딸이 감당해야 될 고통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고 안타까워 한 뒤, 우리는 항암치료에 맞서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흙처럼 물처럼

딸의 돌잔치가 있던 날, 난 오신 손님들 앞에서 인사말을 해야만 했다. 그때 난, 와주셔서 감사 인사를 한 뒤, 딸을 흙처럼 물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딸은 내 바람과는 다르게 주목받는, 친구들 사이에서, 소위 인싸로 대접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내 바람은 여전하다. 흙처럼 물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 세상의 끝 날까지 끝까지 남아 있을 그런 존재로 살아가길 바라고 있다.

축제를 빛냈던 커다랗고 아름다운 국화들이 가을의 온기와 함께 겨울의 냉기에 밀려 사라진 뒤에도 소국은 생명력을 웅변하듯이 노지(露地)에서 노랗고 하얗게, 때로는 보라색으로 피어나 겨울을 버틴다. 화훼 농가의 하우스에서 자라는 커다란 국화들이 겨울날 장례식장의 근조화환을 장식할 때 소국은 내리는 눈과 비를 맞으며, 사람의 손길도 마다하며 척박한 한 겨울의 화단에서 꽃을 보이고 있다. 줄기가 쓰러지고 잎이 얼어 누렇게 되어도 소국은 노랗게, 눈부시게 피어 버틴다.

내년 이맘때면, 웃으며 얘기할지도 모른다. 아니, 여름에는 가족이 함께 가곤 했던 거제도의 어느 풀 빌라에서 며칠 휴가를 보내며 함께 견뎌냈던 겨울의 시련을 이야기할 줄도 모른다. 종종 가곤 하는, 황룡원이 보이는 경주의 어느 낡은 호텔의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겨울을 함께 견뎌낸 우리 모두를 격려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 전, 당장은 버텨내야 한다. 소국처럼 흔들림 없이, 찬바람과 예고 없는 눈과 비와 혹한, 그 모든 변덕스러운 날씨를 닮은 우리 인생 앞에 느닷없이 닥쳐온 시련을.



예상치 못하게, 투병기가 되어 버렸다. 겨울이 지나면 투병의 이야기는 사라질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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