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관련 전문 사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정해 놓은 기한을 넘겨 피어 있는 꽃을 종종 본다. 모든 것이 수도권 중심인 나라이다 보니 식물의 생육기간과 꽃의 유지 기간 또한 수도권의 기후를 그 생존 조건의 기준으로 삼은 탓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요즘도 길을 걷다 보면,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이 꽃이 왜 아직 피어 있나 싶어 경이로움에 시선을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다.
필자의 집과 우리 식구들이 단골로 가는 밀면 집(겨울엔 칼국수도 파는 데, 칼국수집으로 그 간판을 바꿔 달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과의 거리는 불과 백여 미터 정도인데, 그 길 한가운데, 여전히 핫립 세이지가 피어 있다. 찾아보면 통상적으로 세이지 종류는 가을에 핀다고들 하는데 이 한겨울에도 마치 폴란드 국기를 연상시키는 빨강과 흰색이 딱 절반씩 있는 그 꽃을 꿋꿋이 유지한 채 겨울바람에 누웠다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울산의 작업실로 갈 때면, 태화강역까지는 동해선을 타고 간 뒤, 역에서 버스를 갈아타 울산대학교 방향으로 간다. 가는 도중 태화강역을 벗어나 두어 정거장 가다 보면 임대가 나붙은 큰 식당 건물을 지나친다. 어떤 건물이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시간이 길수록 황폐화의 속도가 가속되기 마련이고 화단에 심은 나무와 꽃들도 시들기 마련인데 유독 길가에 심긴, 그것도 버스 정거장 지척에 있는 화초 하나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며 흔들리고 있다.
주로 늦여름에 피어서 당체 언제 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백접초와 홍접초다. 접(蝶) 자는 나비 접자인데, 그 꽃 모양이 영락없이 봄날의 배추흰나비를 닮아서 이름이 그리 붙었다. 꽃대라도 굵으면 겨울바람 앞에 선 모양새가 그나마 안쓰럽지 않을 텐데, 그것이 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가늘고 길다 보니 부추 꽃 위에 앉은 나비처럼, 꽃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거린다.
핫립 세이지이든, 백접초이든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두 꽃은 모양이나 색이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아 슬쩍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 수 있기에 오가는 이들의 주목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작고 하얀
딸이 입원해 있는 동안, 장산역과 병원 사이를 오가는 동안 동백꽃에 시선을 뒀다. 그러다, 겨울바람에 누렇게 얼어버린 키 작은 가로수가 눈에 들어왔다. 이 나무는 저번에 말한 남천과 함께 부산 지역 곳곳의 화단과 도로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로, 이름은 꽃댕강나무다. 이 나무엔 그 줄기와 잎의 평범한 모양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작고 하얀 꽃이 핀다. 작고 하얀 꽃이, 마치 흰색 종이 달려 있는 듯하다.
대체로 꽃은 가지의 끝에 열리거나 잎의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꽃댕강나무의 잎사귀는 비록 작지만 워낙에 촘촘히 맞물려 있기에 꽃송이라도 커야 이목을 끌고 주목을 받을 텐데 꽃 자체가 작다. 게다가 이목을 끄는 것엔 큰 관심이 없는지 사람을 향해서도, 태양을 향해서도 그 얼굴을 처 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꽃이 피어 있는지, 진 건지 무심히 지나치는 행인들은 알 수 없다. 필자처럼 하릴없는 사람, 꽃을 보면 그 가던 걸음을 늦춰 유심히 보는 사람에게나 그 작은 모습, 낮은 자리에 핀 그 모습이 보일 뿐이다.
어스름하게 저녁이 오려 준비하는 늦은 오후, 낮 동안 병실에서 딸과 함께 있던 아내와 교대하기 위해 병원으로 올라가는 길, 흰 꽃은 안 그래도 작은 송이를 잎 뒤에 감출 정도로 숙여 숨어 있곤 했다. 일찍 지는 해는 이미 장산역 쪽으로 저물어 가고 있고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빛조차 사방을 둘러싼 고층 아파트로 인해 그 한 줌의 줄기조차 찾기 쉽지 않다. 당연히 그 어떤 꽃이라도 움츠러들기 마땅한 시간, 흰 꽃도 그렇게 겨울밤 나기를 일찍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꽃은 시선과 거리에 따라 달리 보인다. 아무리 크고 예쁜 꽃이라도 무심히 지나치면 그 아름다움은 묻히고 잊힌다. 반면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누군가 다가가 들여다보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부연하면, 꽃이 만발한 풍경을 찍을 때, 꽃보다 사람이 보일 때, 꽃은 사람의 뒤에서 그 아름다움을 다 말하지 못한 채 물러선다. 반면 작은 꽃이라도 그 꽃을 향해 렌즈와 시선을 고정한 뒤 다가서면 그 꽃만의 아름다움이 발견된다.
꽃을 볼 때 물리적인 꽃의 크기보다 중요한 건 꽃과의 거리다. 그러나 그 크기와 거리보다 중요한 건 꽃을 보는 이의 마음이다. 보고자 하는 의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의 시선. 결국 이 세상 모든 꽃의 아름다움은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이다. 사람의 아름다움처럼.
자식을 향한 마음
내게도 이런 마음이 있었나 싶은 마음을 자식을 키우면서 발견하게 된다. 워낙에 생소한 마음이어서 뭐라 이름을 붙이기도 어렵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부성애다, 부모 마음이다, 하고 말한다. 부모가 된 사람들이 처음 솟아오른 감정을 먼저 부모 된 이들이 그리 부르니 그런가 보다 할 뿐, 그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감정에 익숙해지진 않는다. 조금 크면 달라지려나 싶었으나 애가 큰다고 해서 그 마음이 없어지거나 담담해지지 않는다.
솔직히 연애의 감정, 연인을 향한 사랑의 감정, 더 나아가 배우자를 향한 감정은 시간이 경과하면 처음 생겼던 그 설레는 마음이 제법 길들여져 일상 수준이 된다. 담담해지고 심하면 무덤덤해진다. 가족 같고 친구 같고 그렇게 된다. 물론 함께 헤쳐 온 세월의 고난이 길어질수록 서로의 애틋함이 깊어지는 건 사실이나 그 마음과 처음 들었던 마음과는 분명 다른 마음이다.
자식을 향한 마음은 좀 다르다. 세상에 나온 아기를 처음 봤을 때 든 마음이 그대로 간다. 물론 크면서 속을 썩이고 말썽을 부리면 그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마는 대체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그 자식이 장성했다고 해서 덤덤해지거나 담담해지지 않는다. 아침마다 딸이 집을 나서고 나면 닫은 문 안에 잠시 서성거리는 내겐 옅은 불안이 남아 있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덤덤히 건네는 인사의 말 안에 반가운 마음이 숨겨 있다. 자식은 자신이 닫은 문 뒤에 남긴 부모의 불안과 기다림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을 마주하며 무심히 건네는 “오늘 학교에서 어땠어?”하고 건네는 어제와 같은 인사에 담긴 반가운 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된장찌개를 앞에 두고
지난 월요일, 딸의 첫 항암 치료 기간의 첫 입원 주간이 끝나고 그 월요일, 난 새해 첫 출근을 했다. 출근이라고 해 봤자 아직 이렇다 할 일도 없는 시국이니 감독과 나, 단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게 다인 걸 알면서도 그래도 꾸역꾸역 나갔다.
그날, 감독과 난 근처 단골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자주 먹던 두루치기 2인 분을 시켰다. 두루치기가 나오긴 전, 반찬이 먼저 깔렸고, 우리는 그 반찬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루치기와 이 집의 메인 메뉴라 할 만한 된장찌개가 함께 나왔다. 우린 한동안 맛있게 밥을 먹었다. 이 식당은 늘 공깃밥을 인원수보다 하나 더 주는데, 감독은 그 공깃밥을 늘 나보고 먹으라고 했다. 본인은 90킬로그램 가까이 나가고 난 70킬로그램에도 못 미치니, 일종의 배려라면 배려일 것이다.
그렇게 첫 공기를 비우고, 두 번째 공깃밥에 된장찌개를 듬뿍 퍼 담아 먹고 있는데, 불쑥 같은 시간, 외래 항암주사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딸이 떠올랐다. 뒤이어 ‘새끼는 잘 먹지도 못하는데, 잘도 처먹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된장찌개를 푼 숟가락을 보고 있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애써 눈물을 구겨 넣고 숟가락에 얹은 밥을 욱여넣었다. 그 뒤로 계속 밥을 퍼 넣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도 말하지 않은 마음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꾹꾹, 남은 두루치기와 된장찌개를 다 먹었다.
겨울이 품고 있는 희망
앞서 말했듯, 식물학자들은 꽃에 따라 저마다의 적기를 정해놓았다. 피어 있는 시기가 짧은 꽃의 아름다움을 민끽하려면 그 적기를 알아야만 한다. 또, 그 꽃을 핑계삼아 열리는 축제에 생계가 걸린 사람들 또한 그 적기를 알아야 밥을 벌어먹는다. 금세 피었다 흩날리며 지는 벚꽃의 개화시기를 두고 전문가들의 갑론을박이 설 직후부터 이어지는 이유다.
그러나 어떤 꽃은 전문가의 예상과는 다르게 피고 버티고 진다. 다른 생명이 그러하듯 꽃 또한 생명이어서 사람의 지식으로 그 생명의 남과 감을 다 알 수 없는 것이리라.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말이다. 진즉에 졌어야 할 꽃이 버티고 버텨 봄날에 나올 동료에게 생명의 바통을 넘겨준다. 동백이 붉고 힘차고 선명하게 그 책임을 다하고 있을 때 이 작고 흰꽃은 잎사귀의 그늘 뒤에 숨어 묵묵히 겨울을 견디고 있다.
항암치료라는, 자기 인생에 처음 도래한 혹독한 계절을 딸은 잘 견디고 있다.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소식도 확인하면서 그렇게 버티고 있다. 가끔 아비와 산책을 할 때마다 저질 체력이 됐다는 핑계로 팔짱을 꼭 끼고 간다. 그렇게 가족이 함께 이 겨울을 지나고 있다.
다사다난했다는 말이 요즘처럼 잘 어울리는 연말연시가 없다. 국가의 차원에서도, 국민의 차원에서도, 내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다. 그래도 다들 버티며 살아야만 한다. 하나의 작은 꽃이 거기 있어 누군가는 힘을 얻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