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꽃을 보네 05
소한이 지나고 혹한이 몰려왔다. 1월 들어 겨울은 겨울다운 모습을 보였고 부산도 영하로 떨어졌다. 강추위에 빌라 주차장, 좁은 화단에 버티고 있던 노란 소국들도 얼어 죽었다. 여린 줄기를 바람에 맡긴 채 흔들리던 핫립 세이지도 얼었다. 빨간 열매를 맺고 있는 나무들과 빨간 동백꽃만 혹한의 기세에도 그 색을 잃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1월 둘째 주말에 접어들어 딸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분명 토요일까지는 괜찮았는데 일요일이 되자 한 줌씩 빠지기 시작했다. 마른 솔잎이 흩날리듯, 늦가을에 내린 비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메타세쿼이아의 가는 잎들처럼 딸이 지나간 곳엔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이때를 대비해서, 조금씩 빠지더라도 티가 덜 나길 바라며 짧게 자른 머리칼이 한 줌씩 빠졌다.
월요일 아침, 자고 일어난 베개에도, 이불에도 딸의 머리카락이 빠져 있었다. 딸을 위해 싹 바꾼 빨간색 베갯잇은 그 검은색 머리카락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 딸은 접착식 청소도구로 자신이 일어나 자리, 그 주변을 열심히 문질렀다. 몇 번 굴리자 금세 접착력이 떨어졌다. 떼고 다시 굴렸다. 당황한 듯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원래 예약은 금요일이었다. 항암 치료에 들어가기 전 항암 가발 전문 업체에서 상담을 할 때, 원장은 2회 차쯤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니 그즈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고른 날이 금요일이었다. 머리카락이 예상보다 일찍 빠지자 아내는 일정을 앞당겨 화요일에 하기로 했다. 아내는 오후 반차를 내고 집에 와 딸과 나를 데리고 센텀시티, 벡스코 앞, 그 번화가에 있는 가발 전문 업체로 갔다.
아내는 잠시 업무를 정리하러 사무실에 갔다 온다고 나갔다. 그 사이, 담당 디자이너가 들어와서 딸의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난 뒤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딸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 또한 담담하게 지켜봤다. 짧게 잘라 놨다 하더라도 잘려 나가는 머리카락은 많았다. 금세 딸이 앉은 의자 밑으로 수북이 쌓였다. 딸의 표정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 또한 그랬다. 마지막으로 기계가 동원되어 딸의 머리를 밀었다. 동자승처럼.
“야, 패션의 완성이 얼굴이라더니, 예쁘니까 뭐, 밀어도 볼만하다. 두상도 예쁘네.”, 내가 가볍게 말을 던지자 딸 뒤에 서 있던 디자이너가 말을 받았다. “그렇죠. 아버님.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예쁘네요. 두상도 짱구여서 동글동글하니 귀엽고요.”, 어른 둘의 말에도 딸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핑크색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더 크고 또렷이 보였던 딸의 눈망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 인생 참.”하고 입을 뗀 건 한참 뒤였다. 요즘 딸이 종종 하는 말이다. 그렇다. 고작 열두 살 밖에 안 살았는데,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고, 다시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을 들락날락거리고, 그런 들락날락거림 속에 중학 시절 처음 맞는 봄을 보내야 한다. 열두 살 인생에 맞은 겨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줄은 당연히 예상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은 큰 감정의 동요 없이 견뎌내고 있다. 막 항암치료를 시작했을 때, 엄마랑 함께 크게 울면서 솟아올랐던 감정을 말끔히 씻어 내려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리카락을 다 밀어낸 후 두피 관리를 받았다. 향후 다시 머리카락이 날 때 도움이 된다고 추천받은 것이었다. 아내에게 그 효과 여부는 나중 문제였다. 딸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건 다해보리라 다짐한 아내에게 그깟 돈 몇 푼은 고민거리도 아니었다. 딸의 모습을 함께 지켜보던 아내는 내게 주변에 식당이 많으니 당신 바람도 좀 쐴 겸 다 끝나고 점심으로 뭘 먹을지, 어떤 식당들이 있는지 둘러보고 오라고 했다. 한 군데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책 같은 걸 읽지 않고는 뭔가를 기다리는 걸 잘 못하는 나를 배려한 아내의 심부름 아닌 심부름이었다.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사방이 호텔이었다. 건너편엔 벡스코 본관이, 오른쪽으로 2관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렇다면 길 건너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는 건물이 있다는 뜻이리라. 길을 건너 그리로 들어갔다. 딸의 치료가 시작된 후, 혹시라도 면역력이 약해진 딸에게 독감을 옮길까 싶어 수영장을 안 가고 있는 내게, 서점 배회는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나 오래 있을 순 없었고, 한병철의 <권력이란 무엇인가>의 개정판만 집어 들었다.
기존 판본과 내용도, 페이지도 똑같고 표지만 다른 건데, 한몇 년 전, 기존판에 커피를 쏟아 몇 페이지에 얼룩이 생기고 종이가 울게 된 것이 신경이 쓰였던 차에, 눈에 띄어서 고른 것이었다. 계산하러 가는 도중, 한 서가가 눈에 띄어 잠시 훑어보는데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가 눈에 들어왔다. 복도훈의 <묵시록의 네 기사>와 같은 시리즈 중 하나여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눈에 띈 것이다.
이십 분쯤 후, 다시 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한 시에 시작한 일정은 두 시를 지나 세 시를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리 준비해 놓은 가발을 피팅했다. 두 개의 가발 중 더 잘 맞는 걸로 골랐다. 헤어스타일도 미리 정해 놓았기에 앞머리와 뒷머리의 기장만 더 상의했다. 이후 딸의 원래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으로의 염색 과정을 거쳐, 다시 써본 후 최종적으로 점검을 했다. 디자이너가 “아버님, 어떠세요?”하고 묻기에 가볍게 말해줬다. “전성기 시절 기무라 타쿠야 같네요.”, 딸은 누군지도 모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나중에 검색해 보겠지.
딸과 디자이너, 그리고 아내는 의견을 주고받으며 최종 점검을 했고, 그렇게 결정이 난 후, 딸은 시험 삼아 가발을 쓴 채 그곳을 나왔다. 네 시가 넘은 시간,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 그 건물 - 벡스코 앞에 있는 건물이 다 그렇듯 엄청 높고 큰 건물이다. - 1층에 있는 태국 음식 전문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집에 와서 가발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아내가 미리 사놓은 항암 비니를 썼다. 딸이 입은 파자마는 연한 핑크색인데 비니도 그랬다. 영락없이 급식용 큰 소시지 같다고 했다. 딸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동그란 얼굴에 그걸 씌워 놓으니 골무를 낀 손가락 같다고도 말해줬다. 딸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이날 저녁은 단골 만두 가게에서 만두를 사다 먹었다. 평소엔 3인분을 사는 데, 늦게 점심을 먹은 터라 2인분만 샀다. 난 맥주를 좀 샀다. 딸이 만두를 먹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맥주를 마셨다.
딸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은 없다. 물론 딸도 그런 적은 없다. 가발 매장에서 딸의 눈시울은 약간 붉어졌었다. 모른 척했다. 딸은 끝까지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난 상상도 할 수 없는 의지력으로 눈물을 다시 밀어 넣었다. 집에 와서 빡빡 깎인 자신의 머리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엄마가 미리 준비한 비니를 번갈아 써보면서도 그랬다. 다음 날, 유명 등산 브랜드의 패딩 모자가 택배로 왔다. 얇은 비니를 쓴 채, 그걸 씌워보니 눈치 없이 잘 어울렸다. 그렇다고 해줬더니, 엄마랑 백화점에서 써 보고 주문한 것이라 말해줬다. 정말 잘 어울렸다.
어제, 세 살 때부터 친구인 지유의 교복 사진이 카톡으로 왔다고 보여줬다. 두 녀석은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지유 엄마는 벌써부터 걱정을 했다. 지유가 은채에게 많이 의지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때는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며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딸의 남자 사람 친구라 할 수 있는 온유 어머니도 감사하다는 말을 아내를 통해 한 적이 있다. 딸이 수술하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함께 병문안을 왔을 때였다. 딸 덕분에 온유가 초등학교5학년과 6학년을 건강하고 즐겁게 다녔다고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딸은 의지하고 싶었던 친구였고, 의지가 되는 친구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십 대로 성장했다. 그런 소녀에게, 겨우 열두 살 소녀에게 이런 시련이 온 것이다. 딸에게 의지를 했던 친구들은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딸에게 힘을 주고 있다. 마지막 초등학생의 겨울방학에 친구가 맞은 시련에 공감해주고 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짐작도 못하겠지만 분명 큰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기에 나름 조심스럽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 힘이 되어주고 있다.
혹한이 몰려왔다. 물러갔다. 딸에게 닥친 혹한 같은 시련도 언젠간 물러갈 것이다. 아무리 겨울이 춥다고 한들 봄이 오는 걸 막을 수가 있을까. 딸은 겨울 뒤에 올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읽고 싶은 책들과 읽었으나 다시 읽고 싶은 책들, 그리고 공부하기 위해 주문해 달라고 해서 받아놓은 문제집과 참고서가 딸을 기다리고 있다. 요즘 딸은 홀리 잭슨이라는 작가에게 빠져 있다. 요 근래 그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열심히 보더니 결국엔 원서로 그 작가의 책을 읽어나가고 있다. 지유는 얼마 전 집에 병문안 오면서 <A Good Girl’s Guide to Murder.>를 사 왔다. 다른 두 권은 우연히 울산 알라딘에 있어서 내가 사 왔다. 온유는 재미있게, 그래서 몇 번이나 다시 읽은 책이라며 <일리아스>를 학교에 가져왔고, 학급 벼룩시장에서 딸에게 거의 강매하다시피 떠 넘겼다. 딸은 지금 지유가 사준 걸 먼저 읽고 있다.
공부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했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무한도전>에 빠져 있다. 삼촌이 결제해 준 어플로 열심히 영어 공부만 하고 있다. 미국 할아버지에게 안부 전화가 왔을 때도 둘이서만 대화했다. 그렇게 여전히 많이 웃으면서, 영어를 중얼거리면서, 가장 핫한 추리 드라마와 소설에 빠져서 겨울을 건너가고 있다. 봄을 기다리며.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겨울이 춥다고 한들 봄이 오는 걸 막을 수가 있을까. 딸은 겨울 뒤에 올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마음은 벌써 거기 가 있다.